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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제
[2650호] 2021.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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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가]트럭 한 대로 시작해 육,해,공을 접수한 정석 조중훈

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 근현대편 저자  2021-03-24 오후 5:09:41


정석 조중훈
   
   1920년 2월 11일 서울 미근동에서 태어남
   1937년 진해 해원양성소 기관과 2년 수료
   1944년 김정일씨와 결혼
   1945년 한진상사 설립
   1961년 한진고속 설립
   1969년 대한항공 인수
   1977년 한진해운 설립
   1989년 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 인수
   2002년 11월 17일 인하대부속병원에서 별세
   

   정석(靜石) 조중훈(趙重勳)은 25살 때 트럭 한 대로 시작해 재계 8위의 육·해·공 종합 수송회사를 일으키는 데 평생을 바친 인물이다.
   
   그는 1945년 11월 1일 인천시 해안동에서 ‘한민족의 전진’이라는 의미를 담아 해방둥이 기업 ‘한진상사’를 창업했다. 이후 “수송사업은 인체의 혈맥과 같다”는 지론으로 수송사업이라는 한우물만 팠다. 정석은 ‘수송보국(輸送報國)’의 신념을 앞세워 대한항공, 한진해운, ㈜한진, 한진중공업, 동양화재 등 21개 계열사를 거느린 한진그룹을 키워냈다.
   
   정석은 1920년 2월 11일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에서 부친 조명희와 모친 태천즙 사이의 4남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0대째 서울 토박이로 살아온 그의 집안은 물려받은 전답이 있어 형편이 넉넉했다. 그는 1935년 미동초등학교를 졸업했고, 1937년 휘문고보 2년을 수료했다. 그보다 20년 먼저 태어난 한국인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이 미동학교와 휘문고보 선배인데, ‘항공맨’으로 입지한 그의 생애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사실이다.
   
   여덟 살이던 어느날 조중훈은 집에서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들고 재봉틀을 뜯어보겠다고 졸라댔다. 어머니는 귀한 재봉틀을 못 쓰게 될까 봐 보채는 아이를 나무랐지만 아이는 포기하지 않고 종일 졸라댔다. 결국 어머니가 허락하자 아이는 고사리손으로 드라이버를 움켜쥐더니 부속품을 하나하나 뜯어내기 시작했다. 해체된 부속품들이 마룻바닥에 놓여졌다. 어머니가 재봉틀을 버리게 되었다며 체념하고 “다시는 집안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 야단치려는 순간, 아이는 기름 묻은 손으로 이마에 송송 맺힌 땀을 훔치더니 부품을 하나씩 집어들고 조립하기 시작했다. 놀란 어머니는 가족들을 불렀고, 아이는 신통하게도 분해한 순서를 정확히 기억해내 역순으로 조립했다.(‘정석 조중훈 이야기’·이임광)
   
   
   아버지 사업 실패가 ‘낚싯대론’ 교훈으로
   
   그의 아버지는 조용히 학문에 열중하고 사색을 즐기는 장남과 달리 기계 만지는 것을 좋아하는 차남이 탐탁지 않았다. 뜯고 고치며 집안 곳곳을 어질러놓는 아들이 걱정스러웠던 부친은 ‘지나치게 동(動)한 것을 경계하고 정(靜)한 성품을 더해 동과 정이 조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정석(靜石)’이란 아호를 지어주었다.
   
   휘문고보 시절 부족함이 없던 그의 집안은 부친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었다. 그때 정석은 준비 없이 모르는 사업에 함부로 뛰어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통감한다. 훗날 정석은 이런 철칙으로 무리한 사업 확장을 경계한다. 모르면서 남들이 한다고 따라하는 것은 사업이 아니라며 ‘수송의 길’만을 고집했다.
   
   훗날 조중훈은 이런 사업철학을 유명한 ‘낚싯대론’으로 정립했다. 낚싯대를 여러 개 드리운다고 고기가 많이 잡히는 것이 아니라 포인트를 잡아 하나의 낚싯대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1998년 외환위기 때 우리 기업들을 각성시킨 ‘선택과 집중’과 일맥상통한다. 자원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고 위험요인을 최소화하는 위기관리 전략을 일찍이 터득하고 실천했던 셈이다. 낚싯대론은 오늘날 한진이 세계적 수송그룹으로 우뚝 서게 한 안전장치가 되었다.
   
   가세가 기울자 정석은 고심 끝에 학교를 그만두고 진해 해원양성소로 갔다. 오늘날 해양대학의 모태였는데 당시만 해도 학교라기보다는 선원이나 선박정비사를 키우는 기술학원 수준이었다. 숙식을 하면서 기술도 배울 수 있는 데다 월 8원이 넘는 봉급까지 준다는 소리에 귀가 솔깃해 찾아간 것이다. 초등학교 교사 월급이 15원이던 시절이었다.
   
   기계에 호기심이 많았던 그는 밤잠을 설칠 정도로 기술을 익히는 데 몰두했다. 2년 만에 해원양성소 기관과를 우등으로 졸업한 정석은 일본 고베에 있는 후지무라조선소에서 일할 수습생으로 발탁되었다. 일본에서도 기술력을 인정받은 그는 고베뿐 아니라 오사카와 히로시마 등지의 공업지대로 스카우트되며 귀한 경험을 쌓았다.
   
   
1 1982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그랑 오피시에 훈장을 받은 정석.
2 1950년대 한진상사의 미군 군수품 수송 장면.
3 1966년 주한 미8군 사령부를 방문한 정석(맨 왼쪽).
4 1969년 3월 6일 김포공항에서 거행된 대한항공공사 인수식. photo 대한항공

   일본서 2등 기관사 자격증
   
   그러나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밤을 새워 책을 읽다가 폐결핵을 앓기도 했다. 낡은 책장에 침을 발라가며 읽다가 결핵균이 옮은 것이다. 학업을 중단하고 귀가한 아들을 본 모친은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온갖 정성을 들여 병구완을 했다. 고기를 먹일 형편이 못 돼 이웃에게 빌린 돈으로 쌀을 조금 사 근처 설렁탕집으로 데리고 갔다. 주인에게 가마솥 바닥에 남은 고깃국물에 쌀을 넣어 끓여 달라고 부탁해 그것을 아들에게 먹였다. 그 정성으로 몸을 추스른 정석은 돈을 벌려고 다시 일본으로 갔다.
   
   1940년 마침내 그는 조선소 수습을 마치고 2등 기관사 자격증을 받았다. 이어 일본 우선사 외항선에 올라 중국 톈진과 상하이, 홍콩을 비롯해 동남아 각지로 항해했다. 그 과정에서 정석은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조선이 얼마나 좁은지 실감했다. 1942년 여름 귀국한 그는 엔진재생업이 전망이 있다고 보고, 우선 보링기계 한 대를 장만해 서울 효제동에 ‘이연(理硏)공업사’라는 작업장을 차렸다.
   
   사장 겸 기술자로 밤낮없이 일한 덕에 입소문이 퍼지면서 고객이 늘기 시작했다. 그해 겨울에는 보링기계를 한 대 더 늘리고 직원 수도 10명을 넘어섰다. 보링뿐 아니라 아연주물 작업까지 하게 되었지만 첫 번째 시련이 닥쳤다.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8월 조선총독부는 모든 물자와 산업시설을 군수지원체제로 편입시키는 ‘기업정비령’을 내렸다. 모처럼 자동차 정비공장으로 번듯한 모습을 갖춰 가던 이연공업사는 설비를 군수업체에 넘기고 문을 닫아야 했다. 그는 징용 영장까지 받아들었지만 용산에 있는 철도공작창에 들어가 가까스로 징용을 피했다. 그 사이 집안 어른들의 중매로 규수 김정일(金貞一)과 결혼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정석은 광복 전 운영하던 보링공장을 일제의 기업정비령에 따라 정리할 때 받은 돈과 저축해둔 돈을 합쳐 트럭 한 대를 장만한다. 그리고 이를 밑천 삼아 인천에 한진상사 간판을 건다. 그는 애초 무역업을 꿈꿨으나 미 군정청의 통제가 심한 상황에 대응해 적성에 맞는 수송 분야로 나가기로 결정한다.
   
   ‘내가 기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기초 지식이 있었던 데다가, 인천항을 드나드는 화물선을 통해 움직이는 많은 화물들이 소비자의 손에 전달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또 하나의 수송 과정이 필요하리라는 판단에서였다. 교통과 수송은 정치·경제·문화·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중추적인 기능을 맡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일제의 통제 경제가 광복 후 점차 자유 경제로 전환되면서 많은 화물들이 움직이고 있었으나 수송 수단의 절대부족으로 곤란을 겪고 있었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광복 당시 남북한 전국을 합쳐 자동차는 8000대가 못 될 정도였다.’(‘내가 걸어온 길’·조중훈)
   
   
   사업 초기부터 신용과 자금관리 중요시
   
   광복 이후의 혼돈과 무질서 속에서 물가는 매일 치솟았다. 정석은 운수업을 보조하는 사업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카바이트와 인견사 유통업에도 손을 댔다. 당시에는 전력이 부족하여 카바이트를 많이 썼다는 사실에 착안한 것으로, 강원도 삼척에서 카바이트를 사다 도매상에 넘긴 뒤 그 돈으로 인천에 들어오는 수입 인견사를 구입했다. 구입한 인견사를 가내수공업 형태의 방직공장이 많이 있던 강화에 유통시키면서 계절에 따라 자금을 원활하게 회전시킬 수 있었다.
   
   한진상사는 꾸준히 성장하여 2년 뒤에는 보유 차량이 10여대에 달하게 되었다. 아울러 경기도 일원의 화물차 운송사업 면허를 정식으로 취득하여 본격적인 수송 사업의 기틀을 다졌다. 정석은 ‘사업에는 정확한 판단 능력과 함께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것을 체험으로 터득한다. 그는 ‘사람의 얼굴을 조각할 때는, 처음에 코는 크고 눈은 작게 새겨 놓고 가다듬기 시작해야 한다(刻削之道 鼻莫如大 目莫如小)’는 한비자(韓非子)의 명언을 새기며 사업의 타이밍을 줄곧 중시한다.
   
   한진상사 초창기부터 정석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신용과 자금관리였다. 사실 처음에 얻지 못한 신용을 나중에 얻기란 힘든 일이다. 자금회전도 치밀한 계획으로 처음부터 잘 돌아가게 해야지, 아무리 좋은 사업이라도 초기에 자금을 다 쏟아붓고 회전이 안 되면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다. 그는 뒷심이 달려서는 큰 사업을 이루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정석은 6·25전쟁의 발발로 회사가 쓰러질 위기에 놓였을 때, 주한 미8군과 군수물자 수송계약을 맺으면서 회사 재건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미군이 직접 수송하던 캔맥주를 대리수송할 기회를 얻어 신뢰를 얻었다. 그러면서도 미군에 굽실거리기보다는 어엿한 기업가라는 점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한번은 함께 일하던 직원이 빌린 자금을 상환하는 심부름을 게을리하여 채권자와의 약속 기일을 하루 넘기는 일이 생겼다. 정석은 마음 아픈 일이었지만, 공사를 분명히 구분하고 후일의 경계로 삼기 위해 그 직원을 해고한 후 바로 채권자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나는 미국인들과 만날 때는 지프차를 이용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중고 지프차를 애용했지만 대개 출처가 불분명해 오해받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구경하기조차 힘들던 벤츠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기업인으로서의 확실한 신뢰감을 심어주는 한편 미군들과의 교류를 넓혀 갔다.
   
   특히 한번 알게 된 사람이 임기를 마치고 귀국할 때에는 집에까지 초대하여 송별연을 베풀기도 하였다. 그 집이 지금 부암동에 있는 자택인데, 남이 건축하고 있던 미완성 석조건물을 사서 완성하여 여름별장처럼 접대 시에만 이용했던 것이다.
   
   나는 접대 석상에서 절대로 업무에 관한 사항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때로는 미국에서도 쉽지 않은 풀 코스의 식사도 성심성의껏 대접하여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내가 걸어온 길’)
   
   
▲ 2017년 6월 23일 델타항공과 조인트벤처 협약을 체결한 정석의 장남 고 조양호 당시 회장(가운데)과 조원태 현 회장(조양호 회장 오른쪽). photo 대한항공

   미국 친구들이 만들어준 베트남전 사업
   
   이 무렵에 사귀었던 많은 미국인 친구들이 귀국하여 나중에 국방부 등에 근무하면서 전혀 예기치 않게 한진이 베트남 용역사업에 참여할 기회가 열린다. 미국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그의 후일담대로 미군 사업 수주는 남다른 신용을 쌓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진상사에는 1956년 큰 사고가 터졌다. 미군 겨울 파카 1300여벌을 수송하던 트럭 운전기사가 남대문시장에 물건을 모두 팔아넘긴 것이다. 정석은 즉시 직원들을 보내 도난당한 파카를 비싼 가격을 주고서라도 모두 사들이게 했다. 당시로는 3만달러라는 큰 손실을 봤지만 납품은 제대로 끝낼 수 있었다.
   
   한진상사는 연평균 300%의 급신장을 거듭했다. 1960년에는 가용 차량이 500대에 이르는 눈부신 성장을 기록했다. 정석은 그해 8월 15일 수송보국의 꿈을 펼쳐보겠다고 결심하고 4인승 세스나 비행기 한 대로 에어택시 사업을 시작했다. 그해 11월에는 ‘주식회사 한국항공’ 설립 신고서를 냈다. 그러나 국내선만 취항했기 때문에 경쟁력이 약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정석은 이듬해 주한미군 통근버스 20대를 매입해 서울~인천 간 한국 최초의 좌석버스 사업도 시작했다. 그후 큰 인기를 끌면서 전국망을 구축하기 시작한 한진고속의 출발이었다.
   
   그가 회사를 비약적으로 성장시킨 것은 베트남전 당시 미군의 군수물자 수송을 맡으면서였다. 1966년 3월 주베트남 미군사령부와 790만달러의 계약을 성사시킨 후 1971년 전쟁 종료 때까지 한진그룹이 획득한 외화는 1억2000만달러에 달했다.
   
   그는 특히 1969년 국영항공회사인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하여, 소형 항공기 10여대로 대한항공을 출발시켰다. 대한항공은 30여년 만에 보유 항공기 121대를 갖춘 세계 10대 항공사로 성장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당시 중역들이 완강히 반대했지만, ‘우리 국적기를 타고 해외 나들이를 한번 하고 싶은 게 소망’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강권에 못 이겨 억지로 인수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나는 “돈을 벌자고 시작했다가 밑지는 사업도 있고, 밑지면서도 계속해야 하는 사업이 있는 것”이라며, 항공공사의 인수는 국익과 공익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하나의 소명임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우리 한진상사가 베트남에서 번 돈은 국익을 위해 재투자되어야 하며, 육·해·공 삼위일체를 이룬 수송기업의 구축은 나의 이상”이라고 고집하였다.’(‘내가 걸어온 길’)
   
   
   중역들이 반대한 항공사업 뛰어든 배경
   
   그는 대한항공 인수 직후 하루 여섯 시간 이상 자지 않으며 사업에 몰두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떠올리기조차 싫은 일도 생겼다. 1990년 3월 대한항공 실무진은 당시 소련 측과 모처럼 새로운 노선에 합의했다. 소련 영공 통과 허가를 받아 서울~독일 프랑크푸르트 노선 운항시간을 기존 17시간에서 12시간으로 5시간 단축시킨 것이다. 운항거리도 1만3500여㎞에서 8550여㎞로 크게 줄였다. 하지만 한진그룹 회장인 정석은 웬일인지 새 노선에 비행기를 띄우는 것을 차일피일 미뤘다. 그는 임원회의를 소집해 “소련이 우리 민항기를 격추하고도 사과하지 않았는데, 아무리 이익을 좇는 기업이라지만 선뜻 합의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소련 측으로부터 1983년의 대한항공 007기 폭파 사건에 대해 비공식적인 사과를 받아낸 뒤에야 새 노선 운항에 서명했다.
   
   그는 1977년 한진해운을 설립하고 1987년에는 당시 국내 최대 선사인 대한선주까지 인수하여 한진해운을 세계 5대 선사 대열에 올려놓았다. 정석은 육영사업에도 힘써 1968년 인하학원, 1979년 한국항공대를 인수했다. 인천정석항공과학고는 당시 돌산을 깎아 세운 학교로 유명하다. 그는 정석교육상과 정석장학금 제도도 제정했고, 전경련 부회장과 대한관광협회 중앙회 회장, 한국유네스코협회 회장 등을 맡아 활발한 대외활동을 벌였다.
   
   정석은 항공사 경영을 통해 쌓은 광범한 인맥을 활용해 국익에 크게 기여했다. 1981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1988년 올림픽’ 개최지를 결정한 국제올림픽조직위원회(IOC)가 열렸을 때 총회에 참석해 서울 유치를 반대하던 프랑스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국가들을 막후에서 설득했다. 그는 1970년대 초 포항제철 건립을 위해 일본 정부와 차관 교섭이 벌어졌을 때도 두터운 인맥을 활용해 지원사격에 나서기도 했다. 1973년부터는 한·불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민간 외교와 경제 교류에도 앞장섰다. 그 결과 1990년에는 프랑스 정부가 최고 예우로 수여하는 ‘레지옹 도뇌르 그랑 오피시에’ 훈장을 받았다. 그는 1977년부터 20여년간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몽골 정부로부터 9개의 훈장을 받았는데 외교관이나 관료가 아닌 민간인으로서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정석은 2002년 11월 17일 인천시 인하대부속병원에서 별세하여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하갈동 선영에 안장됐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은 2014년 그를 기리는 ‘조중훈 석좌교수’직을 신설하기도 했다. 정석의 뒤를 이은 아들 조양호 회장도 부친에 이어 프랑스 최고훈장을 받아 ‘부자 수훈’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조양호 회장도 고인이 된 후 뒤늦게 생전의 선행들이 알려진 바 있다. 경기도 양평군 지평의병지평리전투기념관의 정운학 학예관은 고인이 된 조양호 회장이 생전에 지평리전투기념관 건립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조선일보 기사를 보고 거금 5억원을 내놓았다는 사실을 밝히기도 했다.
   

   정석의 가계
   
   정석은 김정일과 사이에 4남1녀를 뒀다. 장녀 현숙(76)씨는 숙부인 조중건 대한항공 부회장의 중매로 서울지법 판사이던 이태희(81·대한항공 법률고문·하버드대 법학박사)씨와 결혼했다. 정석의 장남 양호(작고)씨는 이재철 전 교통부 차관의 장녀 명희(72·서울대 미대 졸업)씨와 결혼했다. 정석의 차남 남호(70·한진중공업 회장)씨는 김원규 전 서울시교육감의 차녀 영혜씨와 결혼했다. 정석의 3남 수호(작고)씨는 전 한진해운 회장으로 최은영(59·유수홀딩스 회장)씨와 결혼했다. 은영씨의 모친 신정숙씨는 롯데 창업주인 신격호(작고) 회장의 넷째 여동생이다. 정석의 4남 정호(63)씨는 메리츠종금증권 회장으로 구자학(91) 아워홈 회장의 차녀 명진(57)씨와 결혼했다.
   
   조양호 회장의 외아들인 원태(한진그룹 회장)씨는 김태호 충북대 교수(정보통계학과)의 외동딸 미연(43)씨와 결혼했다. 김 교수는 김재춘 전 중앙정보부장의 장남이다. 조양호 회장의 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은 경기초등학교 동창인 박종주(47·서울대 의대 졸업·성형외과 의사)씨와 결혼했다.
   
   정석의 맏형인 중렬(한일개발 부회장 역임)씨는 최학희(96)씨와 결혼하여 2남1녀를 두었다. 장남 지호(73·한양대 명예교수)씨는 이병호 전 상공부 장관의 장녀 숙희(65)씨와 결혼했다. 차남 건호(69)씨는 영태(70·재미동포 윤주덕 내과의사의 딸)씨와 결혼했으며, 장녀 인숙(75)씨는 문영호(82·동부 제일병원 내과과장 역임)씨와 결혼했다.
   
   정석의 동생인 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은 이영학(84·이상실 전 상공은행장의 3녀)씨와 결혼하여 1남3녀를 두었다. 장남 진호(59)씨는 이종남 전 감사원장의 장녀 경아(51)씨와 결혼하였으며, 장녀 윤정(57)씨는 이동원 전 외무부 장관의 장남 정훈(60·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씨와 결혼하였다. 차녀 주연(56)씨는 김태효(56·성균관대 교수)씨와 결혼했다. 정석의 막냇동생 중식(80)씨는 한일개발 부회장으로 김복수(84)씨와 결혼했다.
   

   

   내가 본 정석 조중훈
   손실 감수하면서도 국위선양이 먼저
   
   

이상우 전 한림대 총장

정석 선생 생전에 수시로 뵙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면서 한진그룹이 커오는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정석 선생의 말씀에서나 어려운 고비를 넘기는 대목마다에서 그분이 일을 처리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점차로 존경하게 되었다. 그분의 뜻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정석 선생은 모든 일에서 사익보다는 공익을 앞세우셨다. 기업인이면서도 회사의 손실을 감수하면서 나라의 일을 앞세우셨다.
   대한항공의 노선 개척사를 보면 정석 선생의 뜻을 쉽게 알 수 있다. 모두 회사 이익보다도 한국 기업의 진출 지원, 국위선양 등을 앞세운 것이었다. 실무진들이 걱정하고 반대해도 정석 선생은 한 번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정석 선생은 사람을 키우면서 사람들에게 멀리 넓게 보는 시각을 가지도록 독려했다. 사람이 세상을 만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국 최초로 기업 내에 대학을 설치하여 배움의 기회를 못 가졌던 직원에게 공부할 기회를 만들어주고, 대학을 인수하여 발전시키고, 장학금 규모를 키워가고, 교직자에게 상을 주고 하는 일에 열을 다해 왔다.
   정석 선생은 이루어 놓으신 일보다 평생 닦아온 뜻 그 자체로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이다. ‘뜻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을 실천으로 보이신 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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