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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제
[2652호]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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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가]대림 창업자 수암 이재준과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대물림

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 근현대편 저자 



   수암 이재준
   
   1917년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남
   1929년 군포공립보통학교 졸업
   1936년 한일정미소 운영
   1939년 부림상회 설립
   1963년 대림산업 대표이사 취임
   1980년 대한건설협회 회장 취임
   1995년 11월 29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자택에서 별세
   

   수암(修巖) 이재준(李載濬)은 건설업 기반 국내 대기업 중 가장 오래된 대림그룹 창업자이다. 대림은 경영 기반이 탄탄하기로 유명한 기업이다. 2014년을 제외하면 창사 이래 적자를 낸 적이 한 번도 없으며, 1966년 해외 건설시장에 진출한 이래 36개국에서 600개 이상 프로젝트를 완수했다. 베트남, 태국, 대만, 캄보디아, 브루나이, 홍콩을 비롯해 러시아, 핀란드, 이집트,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전 대륙에 걸쳐 사업을 진행하거나 완료했다. 뿐더러 대림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동체·사회를 위해 써달라’며 개인 재산을 기부금으로 내는 데 앞장서 와 ‘한국의 록펠러가’로 불리기도 한다.
   
   수암은 1917년 7월 30일 경기도 시흥(현 산본신도시 일대)에서 부친 이규응과 모친 양남옥 사이의 5남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전주이씨인 그는 선조 왕의 일곱 번째 아들 인성군의 10대손이다. 그의 아호는 동네 뒷산 수리산 수암봉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재형 전 국회의장이 바로 손위 형이며, 이재연 아시아스타 회장이 막냇동생이다. 부친은 장남에게는 공부를 시켰지만, 사업 기질이 보였던 차남에게는 장사를 배우라면서 보통학교만 졸업시킨 뒤 자기 밑에 두었다.
   
   
1 1958년 1월 3일 경영회의를 마치고 서울 동자동 사옥에서 사원들과 기념촬영을 한 수암.
2 1972년 3월 브루나이 천연가스액화공장 현장을 시찰 중인 수암(오른쪽 두 번째).
3 1978년 여의도 사옥 기공식.
4 1986년 8월 포항제철 1열 연학리화공사 준공식에서 박태준 회장과 함께한 수암(오른쪽). photo DL그룹

   부친의 정미소에서 경영수업
   
   수암은 18세 때 부친이 상경하여 정미소를 경영하게 되자 그 일을 거들며 기업가로서의 수업을 쌓아간다. 부친이 경영하던 한일정미소는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1가 62번지 옛 동양극장(현 문화일보사) 옆자리로 원래는 한성은행 터였다. 한일정미소의 자본금은 약 5만원. 당시 500섬지기는 할 수 있는 큰돈이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수확한 벼를 그대로 매매해왔고 가끔 식용으로 백미를 내놓기는 하였으나, 이것은 방아로 찧은 쌀이어서 중백미(中白米)였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강화도조약에 의해 개항이 강요된 이래 우리나라에도 정미공장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서울·부산·인천 등 주로 개항장이 그 중심이었다. 정미소가 문을 열고 지방에서 벼를 사다가 동력기로 찧어서 시내 도·소매상에 넘겼다.
   
   ‘직원이라야 20여명에 불과했으므로 하루 평균 200여가마를 찧어서 팔러 다니려면 여간 바쁘게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물건을 팔러 다니던 영업사원이 사흘이 멀다 하고 결근을 하자 부친은 역정이 나셨던지 잔심부름이나 시키며 일을 배우게 했던 아들에게 그 일을 맡겼다. 영업사원이 하는 일이라야 매일같이 시내를 돌며 쌀가게에 물건을 대주고 수금을 하는 단순한 일이었지만, 몇몇 거래처에서 몇 달씩 물건만 받고 수금을 미루는 데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자기 물건 내주고 대금을 받아오지 못한다고 꾸중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 수암은 어떤 거래이건 서로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이어야 하며, 신뢰와 신용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대림그룹 60년사’)
   
   부친은 그에게 매달 월급 45원에다 50전을 점심값으로 별도로 주었다. 점심을 건너뛰면 한 달에 60원은 되니까 그 돈을 받아서 식산은행에 3년 기한으로 2000원짜리 적금을 부었다. 큰 집 한 채를 사고도 남는 돈이었다. 하루 두 끼니로도 돈 느는 재미에 배고픈 줄을 몰랐다. 수암의 근검·근면·절약의 생활철학은 이때부터 다져진 신조였다. 사람은 우선 부지런해야겠다는 것을 체득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거래처에 느지막이 수금을 나가면 만나야 할 사람이 자리를 비우거나 외출 중이라 허탕을 치기 마련이었지만 새벽같이 찾아가면 그런 실수가 적었다.
   
   
▲ 여수 석유화학단지 고밀도 폴리에틸렌 공장.

   오전 4시 근무 시작 ‘새벽탕’의 탄생
   
   ‘대림의 초창기 때 간부사원들은 새벽 4시면 일어나 발주처의 담당자 집을 찾아나서는 것이 하루 일과의 첫 순서였는데, 이를 이른바 ‘새벽탕’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식전에 두세 시간씩 일을 해보면, 아침 밥맛도 나고 건강에도 좋을 뿐더러 엄청난 양의 일을 해낼 수가 있어서 일거양득이었다. 이러한 부지런함이 오늘의 대림을 일궈낸 원동력이 되었음은 물론이다.’(‘대림그룹 60년사’)
   
   수암의 근검·절약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1950~1960년대에 재계에 널리 회자되었던 ‘설렁탕 외교’다. 당시 대림은 외부인사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대접했다’ 하면 메뉴는 단 한 가지 설렁탕이었다. 수암은 평생 자기 분수를 모르고 사치하고 낭비하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인색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한때 대림은 어느 해외 현장에서나 식당 입구에 ‘마음껏 드시고 버리지 맙시다’라는 팻말을 붙여 놓았었다.
   
   실제로 그의 선친은 “사람은 널리 사귀되 쉽게 버려서는 안 된다” “손해를 보더라도 약속은 반드시 지켜라” “멀리 내다보고 일을 도모하라” “순리를 저버리지 말아라” “정직하고 솔직해야 한다”는 등 상인이 갖추어야 할 자질을 익히도록 독려했다. 바로 이러한 자질 훈련은 훗날 수암이 사업가로서 대성하게 되는 밑거름이 되었고 경영철학으로 굳어졌다.
   
   수암은 1939년 10월 10일 대림그룹의 모체인 부림(富林)상회를 세운다. 그와 그의 고종사촌형인 이석구씨가 각기 1만5000원, 원장희씨(이석구씨 둘째 매부)가 1만원 등 4만5000원을 공동출자하여 부평역 앞에서 시작한 건자재 판매사업이었다. 때마침 일제가 대륙 침략을 위한 대규모 조병창 시설을 이 지역에 세우면서 일기 시작한 개발 붐으로 사업은 2년 만에 매출액이 백 배로 늘어났다.
   
   사업이 잘되자 단순한 건축자재 영역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목재 생산에 들어갔다. 현재의 경기도 광릉보다 나무가 많은 수원 근방의 화산과 팔달산에 대규모 벌목장을 설치하여 수원비행장 건설 때 수백만 개의 레일용 침목 등을 납품하고, 경인 지방에 목재를 거의 독점 공급했다.
   
   ‘부림상회는 급증하는 목재 수요에 맞추어 직접 원목을 생산, 제재하기로 계획을 세워 그 첫 사업으로 수암의 생가인 경기도 시흥군 산본리 일대의 선산70여정보(1정보=1만㎡)와 화성군 매송면 원리의 야산 10여정보의 벌채 허가를 받아 원목 생산에 착수하였다. 대부분의 목재상은 제재한 상품을 매입, 판매했지만 부림상회는 초창기부터 ‘사업의 일관성’에 착안하여 제재공장을 세웠고 원목 생산에도 참여함으로써 이소성대(以小成大), 즉 ‘작은 것으로써 큰 것을 이룬다’는 창업주 수암의 경영철학의 면모를 이때부터 보여주었다.’(‘대림그룹 60년사’)
   
   
   부림상회 시절부터 쌓은 서비스 정신
   
   그뿐이 아니었다. 원목의 생산, 수송, 제재 방법에서부터 섭외, 상품을 주문받고 배달하기까지의 전 과정에서 모든 직원으로 하여금 수암 특유의 정성과 훈련을 쌓게 하였다. 이를테면 누가 공장을 짓기 위해 목재를 주문해 오면, 재고품 중에서 그냥 수량만 맞추어 배달해주는 것이 아니라 쓰임새가 어디이며, 공사는 어디까지 진척되었으며, 어떤 재료를 써야 좋은 건물이 될 수 있는지를 미리 따져 연구하여 거기에 알맞게 납품해 주었다. 즉 같은 기둥이라고 해도 도면에 따라 전면이냐, 측면이냐, 후면이냐를 가려서 제재하여 납품하게 했다. 또 공사의 진척에 맞춰 그때그때 필요로 하는 용재를 대줌으로써 자재 보관의 장소와 수고를 덜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자재 대금이 한꺼번에 투입되지 않도록 함으로써 발주자에게 이익이 돌아가도록 하였다.
   
   이러한 서비스 정신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림의 변함없는 고객 제일주의로 굳어지게 되었다. 또 상대편과 거래를 함에 있어서 올바른 상도의를 지키는 데 진력해 왔는데, 수암은 이때부터 원리원칙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시기적으로는 민족경제의 암흑기였지만 시류를 잘 탄 부림상회는 사업영역을 전국으로 넓혀갔다. 전국 목재업계를 제패하겠다는 야심만만한 꿈을 가지고 전 재산의 70%를 투자, 평북 안변 부근 신고산 일대에 서울 사대문 안 넓이와 맞먹는 100㎢(300만평)의 대규모 벌목장을 설치했다. 대규모 제재소도 공사현장에 세워졌고 인부 2000여명이 동원됐다. 또 목재 운반용 달구지를 끌기 위한 소 600마리가 현장에서 사육됐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였다.
   
   ‘그러나 벌목해서 제재한 목재의 첫 화차가 서울에 도착하던 날 광복이 됐다. 부림상회가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고산 벌목장은 나중에 공산군에 몰수당했고, 부림상회 창업주들은 빈털터리 신세가 됐다.’(‘재벌 25시’ 조선일보 경제부)
   
   실의에 빠져 있던 부림상회 창업자들은 활로를 찾기 위해 건설업에 뛰어들기로 했다. 부평에서 닦은 기반을 이용, 첫 건축사업으로 부평경찰서를 지었으며 뒤이어 광주경찰서도 맡아 지었다. 군정청으로부터 원목을 값싸게 인수해 교실을 짓는 데 들어가는 목재 등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이후 사업이 번창해 1947년 건설업에 진출하면서 상호를 대림산업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사우디아라비아에 건설 중인 정유플랜트 JER 현장.

   기존 건설업체들의 ‘검은돈’ 커넥션 거부
   
   그러나 시련도 있었다. 국내 최대 공사였던 영암선 철도공사를 하는 도중 6·25전쟁이 터져 공사비 일부를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환도 후에도 시련은 계속되었다. 당시 큰 공사는 지명입찰에 의해 발주됐는데, 집권층 일부에서 3~10%의 커미션을 공공연히 요구했고 이에 불응하면 공사를 맡을 수 없었다. 이른바 ‘건설업계 5인조’가 정부 공사를 거의 독점했다.
   
   대림산업은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이것은 대림이 정치권력과 결탁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사업을 끌고 가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대림의 이 같은 초연한 태도로 인해 같은 건설업계에서도 모략을 당하기 일쑤였다. 당시 정계에서 야당계 의원으로 활동 중이던 운경(수암의 형) 이재형 때문에 피해를 보기도 했다. 국회에서 무소속으로 활동 중이던 운경이 족청계와 가깝다는 이유로 대림은 여러 차례 세무 사찰을 받았다. 서울 수복 후 부서진 미도파백화점을 대림이 수리해 준 뒤 공사비 대신 소유권의 상당 부분을 갖고 있었는데, 권력층의 개입으로 소유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것도 당시의 일이다.
   
   대림이 그룹으로서의 발판을 굳히게 된 것은 1960년대에 들어와 경영체제가 바뀌면서부터다. 1963년까지 사장으로 있던 이석구씨가 별세하고 수암이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경영 전략도 대폭 바꿨다. 국내 공사뿐 아니라 해외로 눈을 돌려 1966년 베트남과 일본 이오지마에 진출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해외 건설 수출에 나섰다. 특히 중동에 진출하면서부터 원청공사보다 이익이 많은 플랜트 하청공사를 주로 맡아 노다지를 캐내기 시작했다.
   
   그 사이 국내에서는 경부고속도로, 소양강댐 건설 등 사회간접자본 건설 현장마다 대림이 참여했다. 서울 영동·반포지구 개발과 광진교, 영동대교, 양화교 등 한강 다리 공사에도 대림이 큰 족적을 남겼다. 잠실종합운동장 주경기장, 포항제철 등도 대림의 손을 거쳤다. 하지만 1986년에는 개관 11일을 앞두고 독립기념관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그러나 대림은 이듬해 8월까지 당초보다 더 완벽한 복구공사로 전화위복의 계기를 잡는 저력을 과시했다.
   
   1987년에는 이란·이라크전쟁의 피해를 떠안기도 했다. 이란 캉간 가스정제공장 현장에서 이라크 공군기의 무차별 폭격으로 13명이 죽고 19명이 부상을 당한 사고가 발생했는데 이 사고의 가장 큰 피해자로 여론의 지탄까지 감수해야 했다.
   
   수암은 1936년 수원 지역 대지주의 딸인 이경숙씨와 결혼했다. 그러나 장남 준용(83·DL그룹 명예회장)씨를 낳은 지 4년 만에 작고했다. 수암은 박영복(작고)씨와 재혼하여 차남 부용(77·대림요업 사장)씨를 두었다.
   
   수암은 1995년 11월 29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자택에서 별세하여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선영에 안장됐다.
   
   
▲ (좌) 이준용 대림산업 명예회장. 2015년 8월 ‘통일과나눔’ 재단에 자신의 전 재산 2000억원을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우) 2015년 부회장이었던 이해욱 현 회장(왼쪽에서 세 번째)이 폴리부텐 라이선스 수출 계약을 체결하고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업을 업그레이드한 2세 경영
   
   장남 준용씨는 선친과 달리 정규교육의 혜택을 입고 착실히 경영수업을 받았다. 경기고,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뒤 미국 덴버대에서 통계학을 전공했으며, 귀국한 후에도 영남대와 숭실대에서 잠시 강의를 맡다가 1966년부터 대림산업에 출근했다. 이후 국내외 공사를 막론하고 창업주를 도왔다. 유창한 영어는 해외 공사 수주는 물론 각종 문제 해결사로 큰 도움이 됐다. 1978년 부사장 시절에는 건설업계 최초로 업무전산화 작업을 추진하는 등 경영정보시스템 구축에 앞장섰다. 이듬해 사장이 되면서는 건설과 양대 축을 이루는 유화 부문의 틀도 마련했다. 창업주가 목재상을 건설업으로 키웠다면, 이준용 명예회장은 건설과 석유화학의 양대 사업을 구축해 안정과 성장을 이루는 기업의 새 기틀을 마련했다.
   
   
   ‘통일과나눔’ 재단에 재산 2000억원 내놓아
   
   이준용 명예회장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하는 재계의 대표적 원로 경영자로 꼽힌다. 2015년에는 조선일보사로 찾아와 2000억원 개인 재산 전액을 재단법인 ‘통일과나눔’에 선뜻 내놓아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를 아는 지인은 “자기에게는 엄격하지만 어려운 이웃은 절대 외면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칭송한다. 1995년 대구지하철 가스폭발 사고 당시에도 피해복구비와 유가족 성금으로 20억원을 기탁했다. 평소 수행비서 없이 차 문을 직접 열고 직원용 엘리베이터를 직원들과 함께 탄다. 부인상을 당했을 때도 친·인척을 제외하고는 전혀 알리지 않았다. 심지어 1999년 3남의 결혼식 때는 날짜만 적혀 있고 시간과 장소가 없는 청첩장을 돌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수암의 가계
   
   수암의 장남 준용씨는 한경진(작고·이화여대 졸업·대림미술관 이사장 역임)씨와 사이에 3남2녀를 두었다. 준용씨의 장남 해욱(53·미 컬럼비아대학원 응용통계학 석사)씨는 DL그룹 회장으로 LG그룹 구자경 명예회장의 외손녀인 김선혜(50·이화여대 졸업)씨와 결혼했다. 해욱씨의 장모는 구자경 회장의 장녀 구훤미씨, 장인은 희성금속 회장을 지낸 김희중씨다. 미국에서 개인사업을 하는 준용씨의 차남 해승(52)씨는 미주리대 물리학과 교수인 김현영 박사의 딸 경애(53)씨와 결혼했다. 삼남 해창(50)씨는 대림켐텍 사장이다. 준용씨의 장녀 진숙(55)씨와 차녀 윤영(49)씨가 있으며, 윤영씨는 김동일(48·외국계 은행 근무)씨와 결혼했다. 수암의 차남 부용(77)씨는 대림요업 사장으로 이종수 서울주철 회장의 딸 이선희(73·경희대 졸업)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해영(50)씨, 해성(48)씨, 해서(47)씨를 두었다.
   

   

   내가 본 수암 부자
   사당동 25평 후생주택서 산 창업주
   

김정원 국제변호사·전 청와대 안보담당 특별보좌관

대림산업가와 접하면서 나는 문득 이 집안이야말로 ‘한국의 록펠러가’가 아닐까 생각했다. 미국에서 유학 시절 나는 마침 록펠러 3세와 대학생활(하버드대)을 함께하는 행운을 누렸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미국의 록펠러는 누구든지 선망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생활 속에서 실현해 보인 세계적 명가이다. 록펠러가 기부한 거액으로 뉴욕 시민이 된 자는 누구든지 평생 수도요금을 내지 않는다. 내가 사귄 록펠러 3세는 항상 상대방이 편하도록 배려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옷차림도 항상 검소하고 소탈하였으며 언제 어디에서 만나든지 친절히 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귀국해서 대림산업의 창업주 아들인 이준용 회장을 만났는데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록펠러 3세의 화신 같았다. 그를 만나면 늘 즐거웠다. 그의 꾸밈없는 겸손함을 배워보려고 늘 애썼다. 한번은 함께 운동을 하다 다치게 돼서 일행에게 미안해 숨듯이 혼자서 병원을 찾아 진료에 나섰는데 어느덧 이준용 회장이 나타나 자상하게 뒷바라지를 해줘서 감명을 받은 적도 있다.
   대림의 이재준 창업주는 자신이 창업한 기업이 우수기업으로 꼽힐 정도로 커졌는데도 사당동의 25평(82㎡)짜리 후생주택에 살아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대림의 임원들은 생전에 회장과 식사를 할 때는 음식찌꺼기를 남기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가 음식을 먹다 남기는 것을 무척 싫어했기 때문이다.
   선친의 근검과 절약 습성을 꼭 빼닮은 이준용 회장이 개인 재산 수천억원을 남김없이 사회에 환원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역시 그분답게 살고 있다고 또다시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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