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암(玄岩) 김종희(金鍾喜)가 1952년 설립한 한국화약은 한화그룹의 모태다. 재계 7위인 한화그룹은 현재 ㈜한화를 비롯해 한화솔루션, 한화에너지,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한화생명, 한화건설 등 수십 개 계열사를 거느린 대기업 집단을 이루고 있다. 현암의 뒤를 이은 김승연 회장은 2021년 신년사에서 “방산, 에너지를 비롯한 우리 사업들은 세계시장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성장하고 있으며, 혁신의 속도를 높여 K방산, K에너지, K금융과 같은 분야의 진정한 글로벌 리더로 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또한 모빌리티, 항공우주, 그린수소에너지, 디지털 금융 솔루션 등 미래 신규 사업에도 진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암은 1922년 11월 22일 충남 천안시 부대동 128번지에서 김재민과 오명철 사이의 7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호 현암은 아득히 먼 피안의 경지를 상징한다.
현암은 1935년 직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40년 경기도립상업학교(후에 경기공립상업학교로 바뀜) 4년 중퇴 후 원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농사를 짓던 그의 부친은 애초 차남까지 상급학교에 진학시킬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중학 진학을 다짐한 현암은 야간 가출을 감행해 서울의 당숙을 찾아갔다. 현암의 사정을 들은 당숙이 부친을 설득하여 현암은 재수 끝에 꿈에 그리던 경기도립상업학교에 합격한다. 하지만 하숙비를 마련할 수 없었던 그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서울까지 기차 통학을 했다. 고달픈 기차 통학이었지만 현암은 1·2학년 내내 결석 한번 한 적이 없었으며, 성적 또한 학급에서 항상 5위권을 유지했다.
그러나 1등을 꼭 한번 하고 싶었던 그는 부친에게 소원을 하나 들어달라고 간청한다. “1등이 하고 싶으니 한 학기 동안만 하숙을 시켜달라”는 부탁이었다. 충청도 성환에서 서울까지 300리 길을 통학하는 데 뺏기는 시간이 하루 여섯 시간이니 현암의 요청은 매우 타당한 것이었다. 부친은 서울 안국동에 살고 있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그 집 문간방에서 현암이 3학년 1학기부터 하숙을 하도록 한 달에 쌀 한 가마니씩을 주기로 했다.
“그는 정말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려는 듯 머리를 싸매고 무섭게 공부했다. 도상(道商·경기도립상업학교)에는 럭비부를 비롯해 농구부·정구부·유도부 등이 있었으며 그밖에도 취미활동 중심의 여러 서클이 있었지만 그는 시간이 아까워 운동부나 서클 같은 데는 일절 참여하지 않고 토·일요일도 없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시간 말고는 거의 대부분을 오직 하숙방에 틀어박혀서 책상하고만 씨름했다. 그의 노력은 과연 헛되지 않았다. 그는 3학년 1학기 말 당당히 학급 1위의 영예를 성취함으로써 노력하면 된다는 자신의 끈끈한 잠재능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실록 김종희’)
그는 교사들 사이에서도 항상 모범생으로 꼽혔다. 그러나 호사다마일까. 4학년 2학기 11월 어느날, 현암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어둑어둑해진 효자동 길을 내려오고 있을 때였다. 옆골목에서 학생 한 패거리가 일대 활극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도상 4학년의 럭비부 일본인 학생 4명과 조선인 학생 3명이었다. 열세에 몰린 조선인 학생들을 보는 순간 현암은 앞뒤 생각 없이 무조건 조선인 학생 편에 가세해 일본인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걷어차고 들이받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일본인 학생들에 맞서다
이윽고 순사들이 달려와서 학생 8명을 파출소로 연행했다. 다음 날 교장실 분위기는 침통했다. 학생 8명에 대한 징계 논의는 무기정학에서 퇴학 처분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현암이 조선인 학생 편에 가세한 것은 단순히 그들이 열세에 몰려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억압되어 오던 의분의 폭발과도 같은 것이었다. 충남 출신 도상 학생 중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1년에 몇 차례씩 충남회 서클 조직 모임을 가졌는데 그 모임에서 오가는 학생들의 대화도 주로 조선민족의 장래에 관한 문제들이었다.
“김종희가 충남회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한 것은 2학년 1학기부터였다. 그때 충남회를 이끌던 학생은 4학년에 재학 중인 천안 출신의 성백우를 중심으로 임현재, 이종하 등이었다. ‘중국에 있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지금도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인가. 만주를 무대로 활약하는 마적대는 조선독립군인가. 일제의 조선민족 말살정책이 이대로 계속되어 조선민족은 끝내 독립을 못 하고 영영 일본에 예속되고 말 것인가.’ 그와 같은 선배들의 열띤 토론은 김종희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족했다.”(‘실록 김종희’)
문제의 심각성은 일본인 학생들과 조선인 학생들 간에 일어난 패싸움이라는 데 있었다. 다음 날 조회 단상에 오른 교장은 어젯밤에 패싸움을 벌인 학생 전원에게 퇴학 처분을 내린다고 선언했다.
실의에 낙담하고 있던 현암은 동네 유지인 친척 아저씨와 가깝게 지내온 원산경찰서장 고이케 쓰루이치의 노력으로 한 달 후 원산공립상업학교 4학년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엄격한 조건이 붙었다. 편입 후에는 반드시 원산경찰서 관사인 고이케 경부 집에서 통학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