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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5호] 2021.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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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가]학교 퇴학당하고 화약으로 산업보국 이룬 현암 김종희

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 근현대편 저자  2021-04-29 오전 8:45:01


   현암 김종희
   
   1922년 11월 22일 충남 천안시 부대동 128번지에서 태어남
   1935년 직산공립보통학교 졸업
   1940년 경기도립상업학교 4년 중퇴
   1941년 원산공립상업학교 졸업
   1942년 조선화약공판주식회사 입사
   1945년 광복 후 조선화약공판을 지배인 자격으로 인수
   1946년 강태영과 결혼
   1952년 한국화약주식회사 설립
   1972년 그리스 정부로부터 금성십자대훈장 수훈
   1974년 제11회 ‘수출의날’에 철탑산업 훈장 수훈
   1976년 학교법인 천안북일학원 설립
   1977년 전경련 부회장에 취임
   1981년 7월 23일 숙환으로 별세
   

   현암(玄岩) 김종희(金鍾喜)가 1952년 설립한 한국화약은 한화그룹의 모태다. 재계 7위인 한화그룹은 현재 ㈜한화를 비롯해 한화솔루션, 한화에너지,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한화생명, 한화건설 등 수십 개 계열사를 거느린 대기업 집단을 이루고 있다. 현암의 뒤를 이은 김승연 회장은 2021년 신년사에서 “방산, 에너지를 비롯한 우리 사업들은 세계시장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성장하고 있으며, 혁신의 속도를 높여 K방산, K에너지, K금융과 같은 분야의 진정한 글로벌 리더로 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또한 모빌리티, 항공우주, 그린수소에너지, 디지털 금융 솔루션 등 미래 신규 사업에도 진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암은 1922년 11월 22일 충남 천안시 부대동 128번지에서 김재민과 오명철 사이의 7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호 현암은 아득히 먼 피안의 경지를 상징한다.
   
   현암은 1935년 직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40년 경기도립상업학교(후에 경기공립상업학교로 바뀜) 4년 중퇴 후 원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농사를 짓던 그의 부친은 애초 차남까지 상급학교에 진학시킬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중학 진학을 다짐한 현암은 야간 가출을 감행해 서울의 당숙을 찾아갔다. 현암의 사정을 들은 당숙이 부친을 설득하여 현암은 재수 끝에 꿈에 그리던 경기도립상업학교에 합격한다. 하지만 하숙비를 마련할 수 없었던 그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서울까지 기차 통학을 했다. 고달픈 기차 통학이었지만 현암은 1·2학년 내내 결석 한번 한 적이 없었으며, 성적 또한 학급에서 항상 5위권을 유지했다.
   
   그러나 1등을 꼭 한번 하고 싶었던 그는 부친에게 소원을 하나 들어달라고 간청한다. “1등이 하고 싶으니 한 학기 동안만 하숙을 시켜달라”는 부탁이었다. 충청도 성환에서 서울까지 300리 길을 통학하는 데 뺏기는 시간이 하루 여섯 시간이니 현암의 요청은 매우 타당한 것이었다. 부친은 서울 안국동에 살고 있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그 집 문간방에서 현암이 3학년 1학기부터 하숙을 하도록 한 달에 쌀 한 가마니씩을 주기로 했다.
   
   “그는 정말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려는 듯 머리를 싸매고 무섭게 공부했다. 도상(道商·경기도립상업학교)에는 럭비부를 비롯해 농구부·정구부·유도부 등이 있었으며 그밖에도 취미활동 중심의 여러 서클이 있었지만 그는 시간이 아까워 운동부나 서클 같은 데는 일절 참여하지 않고 토·일요일도 없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시간 말고는 거의 대부분을 오직 하숙방에 틀어박혀서 책상하고만 씨름했다. 그의 노력은 과연 헛되지 않았다. 그는 3학년 1학기 말 당당히 학급 1위의 영예를 성취함으로써 노력하면 된다는 자신의 끈끈한 잠재능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실록 김종희’)
   
   그는 교사들 사이에서도 항상 모범생으로 꼽혔다. 그러나 호사다마일까. 4학년 2학기 11월 어느날, 현암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어둑어둑해진 효자동 길을 내려오고 있을 때였다. 옆골목에서 학생 한 패거리가 일대 활극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도상 4학년의 럭비부 일본인 학생 4명과 조선인 학생 3명이었다. 열세에 몰린 조선인 학생들을 보는 순간 현암은 앞뒤 생각 없이 무조건 조선인 학생 편에 가세해 일본인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걷어차고 들이받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일본인 학생들에 맞서다
   
   이윽고 순사들이 달려와서 학생 8명을 파출소로 연행했다. 다음 날 교장실 분위기는 침통했다. 학생 8명에 대한 징계 논의는 무기정학에서 퇴학 처분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현암이 조선인 학생 편에 가세한 것은 단순히 그들이 열세에 몰려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억압되어 오던 의분의 폭발과도 같은 것이었다. 충남 출신 도상 학생 중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1년에 몇 차례씩 충남회 서클 조직 모임을 가졌는데 그 모임에서 오가는 학생들의 대화도 주로 조선민족의 장래에 관한 문제들이었다.
   
   “김종희가 충남회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한 것은 2학년 1학기부터였다. 그때 충남회를 이끌던 학생은 4학년에 재학 중인 천안 출신의 성백우를 중심으로 임현재, 이종하 등이었다. ‘중국에 있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지금도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인가. 만주를 무대로 활약하는 마적대는 조선독립군인가. 일제의 조선민족 말살정책이 이대로 계속되어 조선민족은 끝내 독립을 못 하고 영영 일본에 예속되고 말 것인가.’ 그와 같은 선배들의 열띤 토론은 김종희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족했다.”(‘실록 김종희’)
   
   문제의 심각성은 일본인 학생들과 조선인 학생들 간에 일어난 패싸움이라는 데 있었다. 다음 날 조회 단상에 오른 교장은 어젯밤에 패싸움을 벌인 학생 전원에게 퇴학 처분을 내린다고 선언했다.
   
   실의에 낙담하고 있던 현암은 동네 유지인 친척 아저씨와 가깝게 지내온 원산경찰서장 고이케 쓰루이치의 노력으로 한 달 후 원산공립상업학교 4학년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엄격한 조건이 붙었다. 편입 후에는 반드시 원산경찰서 관사인 고이케 경부 집에서 통학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1 1959년 7월 한국화약에 이승만 대통령(가운데)이 방문한 모습.
2 파인케미칼 공장을 돌아보던 현암.
3 일본 화약 공장을 방문한 현암(오른쪽). photo 한화그룹

   화약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다
   
   “김종희의 고이케 경부 집 하숙은 그의 학교생활에 큰 장애요인으로 작용했다. 원산상업에는 조선인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는 학생들로부터 서울에 사는 거물급 친일파의 아들로 오해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김종희로서는 학생들에게 원산상업으로 전학해 온 사정을 얘기해 줄 수도 없었다. 전학해 온 사정을 설명하자면 도상에서 퇴학당한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도상에서 퇴학당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고이케 경부로부터 절대 함구령이 내려져 있었다. 만약 전학해 온 까닭을 묻는 학생들이 있을 때는 도상에 다니다가 건강이 나빠서 1년간 휴학을 했는데 도상에 그대로 복학하면 후배들과 같이 공부하게 되는 것이 창피해서 학교를 옮겨 온 것으로 둘러대게끔 약속되어 있었다.”(‘실록 김종희’)
   
   그후 고이케 경부가 경기도 경찰부로 전근하자 현암은 바로 하숙을 옮겼는데, 새 하숙집이 경찰서장 관사에 비하면 너무도 차이가 큰 아주 초라한 집이라 학생들은 다시 놀랐다. 학생들의 궁금증이 풀린 것은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었을 때였다. 방학 동안 서울의 친척집에 놀러갔던 한 학생이 도상 학생을 만나서 현암이 일본인 학생들과 패싸움을 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이야기가 곧 학생들 사이에 무용담이 되어 퍼졌다.
   
   1941년 원산상업학교를 졸업한 현암은 고이케 경부의 추천으로 조선화약공판회사에 입사한다. 이 회사는 당시 조선에 있는 유명한 4대 화약제조회사와 2개 화약판매회사가 통합된 것이었다. 현암이 화약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그의 성실성에 각별히 주목한 마쓰무로 취체역(이사의 일본식 표현)의 배려로 숙소를 홍제동 기숙사로 옮긴 다음부터였다. 일요일이면 그는 자연히 연구소의 각종 시설을 돌아보게 되었다. 또 마쓰무로 취체역 사택으로 놀러갔다가 화약이 근대 산업 발전에 끼친 영향이라든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노벨의 집념 어린 생애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또 화약의 본질이 어떻고 화약의 역사가 어떻고 하는 얘기를 많이 듣게 되었다. 마쓰무로 취체역은 화약이야말로 인류문명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동양의 3대 발명품 가운데 하나라고 그에게 설파했다.
   
   1944년 현암은 마쓰무로의 추천으로 생산부 다이너마이트계 계장으로 승진한다.
   
   “내가 너의 승진을 적극 천거한 것은 너에게 화약에 관해 폭넓은 수업을 시키고 싶어서다. 화약계에서 입신하려면 보다 많은 화약 지식을 쌓아야 할 것이 아닌가. 생산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연 여러 공장으로 직접 출장을 나가게 될 것이다. 그런 기회에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배워라. 네가 장차 화약회사 사장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을 테니까.”(‘실록 김종희’)
   
   광복을 맞아 귀국을 앞둔 조선화약공판 중역들은 회의에서 현암을 지배인으로 선정하기로 결정한다. 그에게 ‘화약 안전’ 업무를 맡기고 일본인들은 귀국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 현암은 그를 취직시켜줬던 고이케 경부를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지난 설 시골집에서 가져와 먹다 남은 쌀을 팔고, 주머닛돈을 보태서 환불한 625달러를 봉투에 담아 그에게 귀국 비용으로 건넸다. 당시 공정환율은 50원 대 1달러였으니 큰돈이었다.
   
   이듬해 현암은 수원여고를 나온 강영선의 3녀 태영과 결혼했다. 이어 미 군정법령 73호에 의거 조선화약공판㈜ 관리인으로 선임됐다. 이후 그는 군수용·민수용 화약 조달을 위해 미 군정청과 상공부, 재무부, 외자청 등으로 동분서주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가 6·25전쟁을 맞게 되었다.
   
   
▲ 2011년 G20 비즈니스서밋에 참석한 김승연 회장.

   화약 국산화에 앞장
   
   그 무렵 홍제동 화약고에는 5월에 들여온 다이너마이트 3000상자가 보관되어 있었다. 전란 중 이를 방치할 경우 어떤 사고가 발생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 위험물을 방치한 채 일신의 안전만 생각하고 피란길을 떠난다는 것은 화약인으로서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전쟁이 터진 어느 날 아침 날이 밝자 서울 거리에는 공산군의 탱크가 육중한 모습을 드러냈다. 현암은 평소보다 일찍 출근하여 캐비닛 속의 서류부터 꺼내 파쇄한 후 우물 안에 쏟아붓고 종이가 물에 풀릴 때까지 막대기로 휘저었다. 그리고 직원들끼리 직함을 내려놓고 모두 화학기술자라는 뜻에서 ‘기사’라고 부르기로 했다. 회사에 나타난 내무서원에게 화약고의 문을 활짝 열어 보이면서 폭발 위험이 있는 물건이라고 겁을 줬더니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잘 보관하고 있으라고 명령했다.
   
   이후 서울이 수복되었다가 유엔군이 후퇴할 때 현암은 심혈을 기울여 화약 철수 작업을 지휘하는 한편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피란했다.
   
   “김종희는 업무수행을 위해 상공부에 자신을 화약공판 관리인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정부 수립 후에는 귀속재산 관리인을 다시 주무당국이 임명하게끔 되어 있었다. 이미 김종희가 화약공판 업무를 집행해 온 사실을 아는 상공부로서도 그를 관리인으로 기피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화약공판이 8군의 화약관리용역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상공부에서는 1951년 2월 7일 자로 김종희를 서둘러 관리인에 임명했다,”(‘실록 김종희’)
   
   화약공판과 8군 병참기지 사이에 화약관리용역계약이 체결된 것은 1951년 2월 10일. 이로써 현암은 동란기 한국화약계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이듬해 10월 한국화약주식회사를 창립한다.
   
   그가 이끈 화약사업은 화약처럼 폭발적으로 번창해 나갔다. 한국화약㈜은 창업 1년 만에 233% 성장이라는 기적을 이룩했다. 그후 현암은 이승만 대통령의 화약 국산화 지시에 적극 앞장서서 불모지대로 남아 있던 인천화약공장을 재건한다. 일제 때부터 다져온 인맥을 통해 일본 현지에서 뒤져내 인천화약공장 설립 당시의 설계도를 찾아내고 기술자들을 동원할 수가 있었다. 1958년에는 한국 최초로 다이너마이트를 생산했다. 이어 1964년에는 한국베어링공업을, 1965년에는 한국화성을 설립했고 경인에너지와 한국정공도 설립하였다. 그러나 한국화약그룹이 성장을 거듭하던 1977년 11월 11일 이리역에서 대규모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사망자만 59명에 달했고 재산 피해액이 80억원에 달하는 등 광복 후 가장 큰 사고였다.
   
   
▲ 한화시스템이 개발 중인 UAM 버터플라이 기체 실물모형 모습. photo 한화그룹

   이리 폭발사고 때 전 재산 털어 수습
   
   현암은 당시 그의 전 재산인 90억원을 내놓겠다는 통 큰 결단으로 사태 해결에 나섰다. 정부는 현암에게 피해보상금 90억원을 30억원씩 3년 분할로 납부하되 1977년도분은 연말까지 납부하도록 조치했다.
   
   “처음부터 김 회장이 처신을 잘한 거야. 그때 우물쭈물하지 않고 ‘이게 전부올시다’ 하고 발가벗으니까 정부에서도 봐준 거지. 안 그랬으면 결딴났을 거라고.”
   
   “하긴 그래. 그때 만약 김 회장이 쩨쩨하게 ‘몇십억…’ 하고 나왔으면 회사가 날아가게 됐을지도 모르지.”
   
   “결국은 살신성인의 정신이 회사를 위기에서 구해낸 거야.”
   
   사람들은 그의 처신이 옳았다고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1972년부터 1980년까지 한화그룹은 주력 분야인 화약산업을 비롯하여 기계, 석유화학, 무역, 건설, 관광, 서비스, 금융, 식품, 전기, 전자, 운수, 육영사업 등으로 사업 분야를 의욕적으로 확장했다. 그러다가 뜻밖에 이리역 폭발사고라는 대형 암초를 만난 것이다. 폭발사고 이후 국민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사고 수습에 노심초사하던 현암은 1981년 7월 23일 서울 가회동 자택에서 별세하여 충남 공주시 정안면 선영에 안장됐다.
   

   현암의 가계
   
   현암은 강태영과 사이에 3남매를 두었다. 장남 승연(69·드폴대 석사)씨는 서영민(서울대 약대 졸업)씨와 결혼하여 동관(38·한화솔루션 전략부문 대표이사), 동원(36·한화생명 전무), 동선(32·한화에너지 상무)씨 3형제를 두었다. 현암의 차남 호연(66·빙그레 회장)씨는 백범 김구 선생의 손녀딸 김미(64·백범의 차남 김신 전 공군 참모총장의 막내딸)씨와 결혼하여 동환(38)·정화(37)·동만(34)씨 3남매를 두었다. 현암의 딸 영혜(73)씨는 이동훈(73·전 제일화재 회장)씨와 결혼하여 재환(49)·석환(48)·준환(44)·지환(41)씨 등 4형제를 두었다. 현암의 형 종철(작고)씨는 국회의원과 국민당 총재를 역임했으며, 동생 종식(작고)씨는 신민주공화당 의원을 지냈다.
   
   현암의 뒤를 이은 장남 김승연 회장은 그룹 이름을 한국화약그룹에서 한화그룹으로 바꾸고, 제2 창업을 선언했다. 1981년 5000억원이던 한화그룹의 자산이 그의 취임 2년 만인 1983년에는 1조원을 넘어섰다. 이후 그룹의 자산이 매년 늘어나면서 2020년에는 215조원에 육박, 취임 때에 비해 430배로 급성장했다.
   
   현암의 차남 호연씨는 한·미 간 상호이해와 협력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2015년 밴플리트상을 받았다. 김호연 회장은 이사장을 맡았던 김구재단을 통해 미국 내 한국 역사 알리기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김구재단은 2005년 하버드대에서 김구포럼을 열었고, 2010년에는 미 터프츠대에 한국학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내가 본 현암 김종희
   화약사업이 가르쳐준 의리와 사명
   한화그룹 관통하는 기본정신 됐다

   

이광주 한국경영사학회장

현암 김종희 회장은 경기도립상업학교와 원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첫 직장인 조선화약공판에 몸담으면서 화약과 인연을 맺었다. 그가 평생 추구했던 사업관은 ‘사업으로 국가에 보답한다(事業報國)’는 것이었다. 그는 기간산업에 속하면서도 위험성 때문에 누구도 쉽게 진입하지 못하는 화약사업을 토대로 지금의 한화그룹의 토대를 쌓는 혜안을 보여주었다. 현암은 혼란기에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소비재 사업을 외면하고 힘들고 어려운 기간산업 육성에 주력했다. 나라의 틀이 갖추어질 무렵 화약을 통해 인생을 점화했다. 국가 경제가 오랜 질곡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기간산업의 한 부분을 일구어간 그의 삶은 사업보국 그 자체였다.
   
   제품의 성격상 작은 실수와 방심도 용납되지 않는 화약사업장을 운영하면서 자연히 의리와 사명을 강조하게 되었고, 이는 신용과 함께 오늘날까지 한화그룹을 관통하는 일관된 기본정신으로 남아 있다.
   
   현암의 뒤를 이어 29세의 김승연 회장이 그룹 경영을 승계할 때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김 회장은 일부의 우려를 말끔히 씻고 한화그룹의 자산규모를 430배 이상으로 성장시킴으로써 ‘제2의 창업자’로 일컬어지는 데 조금도 손색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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