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1일 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이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 앞에서 상장을 앞두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3월 11일 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이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 앞에서 상장을 앞두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뉴욕증시 상장으로 화제를 모았던 쿠팡이 기업집단으로 지정된다. 쿠팡의 지난해 자산이 5조7000억원으로 공시대상기업집단 기준인 5조원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자산총액 5조원 이상이면 공시대상기업집단, 10조원 이상이면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으로 분류한다. 공시대상기업집단으로 지정되면 공정거래법에 따라 총수 일가의 사익편취 규제와 각종 신고 의무가 부여된다.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은 상호출자금지, 순환출자금지, 채무보증금지 등의 규제가 추가된다.

공정위는 기업집단을 지정하면서 의무 부과 대상인 동일인으로 자연인 또는 법인도 함께 지정한다. 원칙적으로는 삼성과 롯데처럼 자연인인 총수가 따로 있는 대기업집단은 자연인을, 포스코와 KT처럼 자연인인 총수가 없는 대기업집단은 대표회사를 각각 동일인으로 지정하면 된다. 쿠팡의 창업자는 김범석 이사회 의장이다. 작년까지 대표를 맡았다가 이사회 의장으로 물러났다. 김범석 의장은 쿠팡 지분을 10.2%밖에 갖고 있지 않지만, 차등의결권에 따라 76.7%의 절대적 의결권을 확보하고 있다. 문제는 김범석 의장의 국적이 미국이라는 점이었다. 김 의장은 일곱 살 때 대기업 주재원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미국 시민권자다.

현재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한 대기업집단 64곳 중 총수 없는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된 곳은 KT와 포스코, KT&G, NH농협금융지주, 대우조선해양, 대우건설, HMM(옛 현대상선) 등 9곳이다. 여기에는 쿠팡처럼 외국계 기업인 에쓰오일, 한국GM도 포함돼 있다. 에쓰오일의 모기업은 아람코다. 아람코의 최대 주주는 물론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이다. 한국GM은 본사가 미국 GM이다. 주주권을 기준으로 동일인을 정해야 한다면 에쓰오일의 동일인은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이 되어야 하고 한국GM의 동일인은 미국 GM 본사의 메리 바라 회장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공정위는 두 회사 동일인을 각각의 한국법인으로 지정했다. 공정거래법에는 동일인에 대한 국적 기준은 없다. 하지만 공정위는 지난 35년간 모든 기업집단에 대해 동일인을 내국인 또는 국내 법인으로만 지정해왔다. 외국인이나 법인을 지정할 경우 규제의 실효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한국에만 있는 총수 지정 제도

김 의장이 미국 시민권자임을 고려하면 에쓰오일과 한국GM, 두 기업처럼 쿠팡 한국법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하는 것이 형평성에 맞다. 형평성을 훼손하지 않으려면 기준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 공정위는 논란 끝에 쿠팡 법인을 동일인으로 정했고 쿠팡은 ‘총수 없는 대기업집단’으로 구분돼 회사 일반 현황과 주주, 임원 구성, 계열사 지분 변동 등에 관한 내용만 공시하면 된다. 만약 김범석 이사회 의장을 동일인으로 지정했다면, 동일인을 중심으로 배우자, 6촌 이내 혈족, 4촌 이내 인척의 계열사 주식 보유 현황 등을 고려해 기업집단 범위를 정하고 일감 몰아주기 등 규제도 이에 맞춰 달라진다. 각종 정보를 제출할 의무도 부여되며 제출 과정에서 누락 등이 발생하면 동일인이 고발 대상이 된다. 실질적인 효과가 없다고 해도 규제는 규제다. 굳이 말하자면 한국계 미국인이기 때문에 받는 불이익이 됐을 것이다.

대기업집단을 따로 규제하는 것은 해외 선진국에선 찾아보기 힘든 제도다. 총수를 별도로 지정한다는 개념도 한국에만 있는 규제다. 세계적으로 대기업집단 및 총수를 지정하고 이들에게 특별한 규제를 가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소수의 재벌을 중심으로 고도성장을 해온 한국만의 독특한 제도다. 대기업집단 및 동일인에 대한 규제 개념은 1986년 12월 31일 개정 공정거래법에 처음으로 들어갔다. 공정거래법상 동일인 지정제도는 총수 한 사람이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기업군 전체를 대기업집단으로 보고 내부거래나 상호출자 등의 비시장적 경쟁 제한행위를 규제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총수가 적은 자본으로 다수의 계열회사를 지배하고 친인척 회사에 일감을 몰아주는 걸 막겠다는 명분이 강했다. 동일인 지정의 법적 근거는 없다. 개념의 법률적 정의도 사실상 없다.

공정거래법에는 동일인에 대한 정의가 적시돼 있지 않다. 공정위가 내부적으로 ‘특정 그룹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나 법인’이라고 규정할 뿐이다. 동일인은 해당 기업집단이 지정을 요청하거나 공정위가 직권으로 지정한다. 보통의 경우는 공정위 기업집단국이 매년 초 대기업집단에 동일인에 대한 의견을 제출해 달라고 요청하면 대기업집단의 대표 기업이 당사자의 자필 서명을 받아 의견서를 공정위로 보내고 회사 의견대로 동일인이 지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대기업집단 뜻에 반해 공정위가 자체적으로 다른 이를 동일인으로 지정하기도 한다. 총수의 직·간접 지분율과 경영 활동에서 드러나는 영향력을 근거로 공정위가 ‘사실상 지배’ 여부를 심사하는 것이다. 현행법상 동일인은 대기업집단 지정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기업집단의 정의 자체가 ‘동일인이 사실상 그 사업 내용을 지배하는 회사의 집단’으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배주주가 없는 공기업 등의 경우에는 법인이 맡아 왔다. 자연인 지배주주가 없을 때는 법인 자체가 기업집단을 지배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명확한 개념도 없고 적용할 기준도 없다 보니 논란도 자주 일어난다. 네이버가 대표적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17년 9월 국내 최대 인터넷기업 네이버를 공시대상기업집단으로 지정했다. 동일인으로는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 겸 글로벌투자책임자를 지정했다. 당시 네이버는 이해진 창업자의 지분율이 4%로 낮고 이사회와 전문경영인 체제로 회사가 운영돼 개인을 총수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진그룹도 공정위의 결정이 논란을 초래한 경우다. 2019년 5월 한진그룹은 조양호 회장이 사망하면서 경영권 승계를 두고 잡음이 일었다. 경영권을 둘러싼 갈등 속에서 공정위는 고 조양호 회장의 장남이자 창업주 3세대인 조원태 회장을 총수로 직권 지정했다. 정부가 나서 경영권 분쟁을 정리해준 결과가 됐다.

2018년 12월 6일 공정거래위원회가 56개 공시대상기업집단을 대상으로 총수 일가 이사 등재 현황, 이사회 작동 현황, 소수주주권 작동 현황 등을 분석해 발표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2018년 12월 6일 공정거래위원회가 56개 공시대상기업집단을 대상으로 총수 일가 이사 등재 현황, 이사회 작동 현황, 소수주주권 작동 현황 등을 분석해 발표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재벌 규제를 위한 기업집단법제의 낙후성

공정거래법상 기업집단법제는 흔히 ‘재벌’로 지칭되는 일단의 기업집단 지배구조의 문제가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실제적·잠재적 위험 요인이라는 인식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제도 자체가 한국의 재벌체제, 특히 가족경영을 중심으로 한 경영방식의 폐해를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내부거래나 일감 몰아주기 등 총수 일가의 사익편취는 규제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규제의 실효성과 한계도 감안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흔히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는 재벌이 반드시 일정한 규모 이상의 기업집단과 동의어는 아니다. 네이버, 카카오 등 최근 대기업 반열에 오른 IT 기업들은 순환출자나 상호출자 등과는 거리가 멀다.

동일인 지정제도는 과거 ‘재벌’ 규제를 위한 것이었다. 최근 등장하고 있는 혁신 기업, IT 기업들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재검토가 필요하다. 자칫 정작 지배구조 개선이 필요한 상위 재벌에는 실효성이 없는 반면 지배구조의 문제가 크지 않은 기업집단, 특히 글로벌 경쟁에서 대외적 평판이 중요한 IT 기업에는 과잉규제가 될 수도 있다.

원칙적으로는 어떤 기업이든 투명한 지분 구조와 의사결정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면 오로지 기업의 규모가 커졌다고 해서 굳이 기업집단 지정을 통해 규제해야 할 이유는 없다. 당장 쿠팡의 경우는 중복 규제 논란도 제기된다. 쿠팡 한국법인의 100% 지분을 가지고 있는 모회사인 미국 쿠팡 INC는 지난 3월 11일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됐다. 이미 공시와 내부거래에 관해 관련 미국 법령에 따른 규제를 받고 있다. 여기에는 특수관계인 또는 다른 회사에 상품, 부동산 등을 제공하거나 상당히 유리한 조건으로 거래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등 한국 공정거래법에 명시된 규제가 모두 포함돼 있다.

사실 공정거래위원회도 문제점을 알고 있다. 창업주인 총수가 동일인이던 시절에는 이미 정해진 동일인에서 출발해 손쉽게 대기업집단을 획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재벌이 2세와 3세로 승계되고 대기업집단 지배구조가 다변화하면서 한진그룹과 네이버의 사례처럼 사전적으로 정해져 있는 대기업집단을 놓고 동일인을 누구로 해야 할지 사후적으로 고심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부도 고민이 많다고 하지만, 아직 대안을 찾지 못한 상태다.

일각에서는 김범석 의장을 동일인으로 지정했을 경우 최혜국대우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자유무역협정(FTA) 위반 가능성을 거론하기도 했다. 만약 그랬대도 미국이 이를 문제로 제기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하지만 형평성의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통상마찰의 가능성과 관계없이 분명한 것은 지금의 규제가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재벌 규제는 이미 균열이 시작됐으나 제도가 시대적 변화를 미처 따르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공정위가 제도 개선에 나서지 않다 보니 계속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당장 규제개선이 어렵다면 유연하게 판단을 해야 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사회가 제 역할 하는데도 총수 지정 필요?

기업집단 지정제도의 목표는 결국 좋은 지배구조의 구현이다. 좋은 지배구조와 투명한 경영 시스템을 가진 기업들은 예외를 인정해 지주회사나 법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총수는 대기업집단을 지정하는 출발점이다. 그러나 총수라는 개념 자체는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일정 규모로 성장한 모든 민간기업에 재벌과 총수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기업을 보는 우리 사회의 시각이 기업집단 지정제도가 만들어졌던 30년 전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감 몰아주기 관행이 개선되고 이사회와 주주 중심 지배구조가 정착되면 동일인 지정을 포함한 기업집단 지정제도는 의미가 줄어든다. 더욱 곤란한 것은 동일인 제도 폐지의 전제로 생각할 수 있는 이사회 중심, 주주 중심의 지배구조 정착에 동일인과 기업집단 지정제도가 오히려 장애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기업을 지배하라고 만든 이사회나 주주총회라는 법적 기구가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이와 별도로 사실상 기업을 지배하는 사람이라면서 별도로 동일인 혹은 총수라는 지위를 인정하는 제도라면 오히려 주식회사 제도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비판이다.

김상철 경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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