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최초의 기축통화였던 기원전 6세기 아테네의 드라크마 은화. ⓒphoto 셔터스톡
역사상 최초의 기축통화였던 기원전 6세기 아테네의 드라크마 은화. ⓒphoto 셔터스톡

세계 최초의 기축통화는 기원전 6세기 그리스 아테네에서 탄생했다. 기축통화로 통상의 번영을, 솔론의 개혁으로 민주정치의 토대를 이루어낸 아테네는 그리스의 맹주가 된다. 하지만 패권에 대한 집착과 팽창정책의 유혹에 젖어들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금화에 구리를 섞는, 도덕적 해이가 뚜렷한 통화주조 방법으로 세입보다 세출을 늘렸다. 이른바 역사상 최초의 재정적자 정책이었다. 그 끝은 통화에 대한 신뢰의 상실이었다. 통화시장이 붕괴되자 아테네도 수명을 같이했다.

로마 데나리우스 은화의 붕괴

인간은 역사에서 배운 교훈을 그리 오래 간직하지 못한다. 그리스를 정복한 로마제국도 아테네와 똑같은 우를 범한다. 로마제국의 기축통화는 데나리우스 은화였다. 네로 황제는 늘어나는 조세 저항과 로마 대(大)화재로 재정적자가 발생하자 데나리우스 은화에 구리를 섞어 통화를 늘리기 시작했다. 이후 역대 황제들이 구리의 양을 늘려가자 시민들이 동전 및 은화를 불신해 통화시장이 붕괴되었다.

통화시장의 붕괴는 시장 기능을 마비시켜 물물교환이 시작되었다. 도시에서 식량을 구할 수 없게 되자 도시민들은 시골로 내려가 영주의 땅을 빌려 농사짓는 농노가 되었다. 이렇게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찬란했던 그리스·로마의 도시문명이 암흑에 묻히는 이른바 ‘암흑의 중세’가 시작되었다.

13세기 중국과 이슬람 지역을 정복한 원나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건설했다. 중상주의 정책을 취한 쿠빌라이는 1260년 은과 비단에 기반을 둔 교초 지폐를 발행했다. 원나라는 모든 금과 은을 몰수한 뒤 지폐로 바꿔주며 교초만을 유통시켰다. 교초는 고려부터 지금의 시리아에 이르는 원나라 영향력하의 모든 지역에서 통용되는 동양 최초의 기축통화였다.

문제는 거액의 재정지출이 필요하면 지폐를 마구 발행했다는 점이다. 1380년 지폐 한 장당 동전 1000개였는데 1535년에는 지폐 한 장당 동전 0.28개로 교초 가치가 4000배 가까이 폭락했다. 그로 인해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해 통화시장이 붕괴되면서 물물교환 시대로 되돌아갔다. 이후 농민봉기와 주원장의 발흥으로 제국은 무너졌다.

16세기 스페인은 세계 최초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해 세계 금과 은 총생산량의 83%를 차지하는 최고 부국이었다. 당시 스페인의 ‘페소 데 오초’ 은화는 세계 기축통화였다. 문제는 식민지로부터 금은보화가 쏟아져 들어와도 과도한 팽창주의와 방만한 재정으로 적자규모가 엄청나게 불어났다는 점이다. 1543년 경상수입의 65%가 이자상환에 지출되었다. 결국 1557년 부도가 났고 이는 현대적 의미의 첫 국가 파산이었다. 이후 1560년, 1575년, 1596년 연이은 파산으로 결국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1599년 화폐 주조 때는 모든 주화에서 은을 빼버렸다. 시중의 구화도 강제로 신화와 교환케 해 여기서 뽑아낸 은으로 빚을 갚으려 했다. 이로써 저질 주화만 시중에 유통되어 화폐에 대한 불신은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었다. 그 뒤 스페인제국은 서서히 해체되기 시작해 세계 강대국 대열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대대적 부채 탕감을 단행한 아테네의 집정관 솔론. ⓒphoto 위키피디아
대대적 부채 탕감을 단행한 아테네의 집정관 솔론. ⓒphoto 위키피디아

아테네 드라크마화의 흥망성쇠

역사상 최초의 기축통화였던 기원전 6세기 아테네의 드라크마 은화의 탄생과 몰락을 더 자세히 살펴보자. 당시 그리스 집정관 솔론은 몰락 귀족 집안의 장사꾼 출신으로 경제와 통상에 밝았다. 그는 아테네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아테네와 페르시아 간 무역을 늘릴 방안을 찾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양국 간 화폐 통일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아테네 드라크마와 페르시아 은화의 무게를 같게 만들어 서로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으면 교역을 늘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드라크마 은화의 무게를 살짝 줄여 1달란트=6000드라크마의 가치를 1달란트=6300드라크마로 만들었다. 4.3g의 순은으로 만들어진 1드라크마는 당시 숙련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다. 그의 의도는 성공했다. 이로써 당시 최대 무역국인 페르시아와의 교역이 증가했다. 이후 아테네 은화가 지중해 교역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화폐가 되었다. 곧 기축통화가 탄생한 것이다.

그 뒤 아테네는 그리스 화폐 주조의 중심지가 되었다. 더구나 기원전 483년에 발견된 라우리움 은광은 국부를 획기적으로 높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아테네 해군력을 향상시켜 페르시아를 무찌르는 계기가 되었다. 아테네는 은광에서 채취해 쓰고 남은 은을 매년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는 시민들에게 풍요를 안겨주어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정치시스템을 탄생시켰다.

아테네는 주변 도시국가들의 화폐와 도량형을 표준화하기 위해 기원전 449년 그리스 전역에 아테네식 주화와 도량형 사용을 강제하는 통화법령을 반포했다. 이는 교환에 드는 거래비용을 최소로 줄여주었다. 이로써 기원전 5세기 아테네 항구 피레우스가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기축통화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를 계기로 지중해 상권이 페니키아와 히브리왕국으로부터 아테네로 넘어왔다. 해상무역뿐 아니라 지중해 경제권 중심축이 완전히 아테네로 이동했다. 아테네 항구 피레우스는 무역상과 환전상의 본고장이 되었다. 피레우스에서 일하는 큰 상인들은 대부분 외국인이었는데 특히 유대인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유대인 무역상들은 어디에서 어떤 상품을 구할 수 있는지 파악하는 정보수단을 갖고 있었고 유대인 환전상들은 각국 화폐에 정통했다. 아테네 ‘시장경제’는 오늘날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개인 창고업자, 화물운송인, 은행가 같은 서비스가 피레우스 항구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강력한 통화가 가져온 아테네 민주주의

기원전 5세기 말에는 아테네 주화를 본떠 그리스 도시국가들 거의가 독자적 화폐를 만들어 사용했다. 기원전 4세기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시 쓰였던 화폐의 기원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각종 생활필수품은 쉽게 가지고 다닐 수 없으므로 사람들은 철이나 은같이, 본질적으로 유용하고 생활에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서로의 거래에 이용할 것에 합의했다. 이러한 물건의 가치는 처음에는 크기나 중량으로 측정됐으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일일이 계량해 가치를 기재하는 수고를 줄이기 위해 사람들은 그 위에 각인을 하게 됐다.”

그 뒤 동전 각인에 국가권력을 상징하는 도안을 집어넣었다. 이러한 표시는 동전의 품질과 가치를 보증했고 위조로부터 동전을 보호했다. 고대사회에서 돈은 상업과 교역뿐 아니라 군인 급료로 쓰였으며 사회 전반의 교환수단으로 이용되었다. 화폐 발명 덕분에 똑같은 기준에 의거해 모든 물건의 가치를 측정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아테네가 경제사에 크게 공헌한 것이 있다. 다름 아닌 ‘민주주의와 토지사유제의 인정’이 그것이다. 이는 훗날 자유시장경제의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 아테네 민주화의 첫걸음은 솔론에 의해 시작되었다. 기원전 594년 그리스 집정관 솔론은 이른바 ‘솔론의 개혁’을 단행했다.

솔론의 개혁이 나온 배경을 보자. 기원전 6세기 초는 아테네인에게 어려운 시기였다. 무엇보다 시민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게다가 귀족과 시민 간의 빈부격차가 날로 늘어났다. 여기에 더해 시민과 농민을 괴롭힌 것은 기원전 7세기경에 제정된 일명 ‘드라콘의 법’이라는 악법이었다. 처벌조항이 혹독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폐단도 극심했다. 사소한 잘못에 사형을 당하고 빚을 지면 노예로 전락해버리는 공포의 법이었다.

귀족계급이 좋은 땅을 소유하고, 정치를 독점하며, 파벌싸움에 골몰해 있었다. 가난한 농민들은 쉽게 그들의 채무자로 전락해 빚을 갚지 못할 때는 농노 신세가 되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중간계급인 농민·수공업자·상인은 정치에서 배제되어 불만이었다. 이렇듯 아테네는 유력자들과 데모스(demos·시민) 사이에 알력이 있었다.

기원전 5세기 펠로폰네소스전쟁 당시 시민들에게 연설하는 페리클레스. ⓒphoto 셔터스톡
기원전 5세기 펠로폰네소스전쟁 당시 시민들에게 연설하는 페리클레스. ⓒphoto 셔터스톡

부채를 탕감해준 ‘솔론의 개혁’

당시 가난한 자들은 예속민이라 불렸는데 유력자 농지에서 일하고 소출의 6분의 1을 바쳤다. 만일 임대료를 내지 못하면 감옥에 갇히고 심하면 노예가 됐다. 모든 부채는 인신(人身)이 담보로 설정되었다. 따라서 시민이 가장 공포를 갖는 것이 바로 노예가 되는 것이었다. 다수가 노예가 되자 시민들이 유력자들에 대해서 반기를 들어 격심한 분쟁이 오랫동안 지속됐다. 결국 양측은 기원전 594년에 솔론을 조정자이자 집정관으로 추대했다.

솔론은 집정관이 되자 개혁을 단행했다. 아테네 시민들에게 역사상 최초로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는 법령을 공포했는데 개혁 내용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먼저 말 많던 드라콘법의 처벌조항을 완화하고 빚진 자들에게 빼앗겼던 땅들을 모두 돌려주고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그리고 당시 귀족들이 독점했던 정치를 시민들도 부의 정도에 따라 참여할 수 있게 했다. 모든 시민은 민회에 참석할 권리가 주어졌다. 최하층에도 참석할 권리를 주어 평민의 불만을 해소했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개혁이었다. 이리하여 장차 민주정치의 토대가 마련되었고 직접민주정치가 시행되었다.

솔론은 유대 희년제를 본받아 부채탕감을 시도했다. 희년제란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에 모든 걸 원상태로 돌려놓는 것을 의미한다. 곧 부채를 탕감해주고, 토지를 원 소유주에게 돌려주며, 죄수들에게도 사면을 베풀고, 모든 노예를 해방시키는 아름다운 제도이다. 더 나아가 가축과 땅까지 휴식기간을 주었다. 희년은 유대인의 이상인 평등공동체의 회복을 뜻한다.

솔론은 기원전 594년에 모든 채무자의 빚을 말소했다. 그리고 채무자를 노예로 삼는 제도 자체를 폐지하는 법률을 통과시켜 빚을 탕감하고 땅을 재분배했다. 그리고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토지의 상한선을 정하여 부의 집중을 막았다.

원래 솔론의 개혁은 고리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채무자들이 처음에는 자녀를, 나중에는 자기 자신을 노예로 팔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따라 시민사회가 붕괴 위기에 처했다. 그러자 솔론은 채무 무효를 선언해 채무 때문에 외국으로 팔려간 자들과 도망간 자들을 돌아오게 했다. 솔론은 또한 인신을 담보로 이루어지는 대부행위를 금지했다. 한편 주화 사용이 촉진되었고 새로운 도량형이 도입되었다. 그의 조치는 100년간 효력을 갖는 것으로 선포되었고 회전 나무판에 새겨져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게시되었다.

통화에 구리를 섞기 시작한 아테네

기원전 5세기 펠로폰네소스전쟁은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그리스 지배권을 놓고 다툰 패권전쟁이었다. 27년간 지속된 이 전쟁에서 아테네는 거의 모든 금화가 전쟁비용으로 소진되자 아테네 여신상에서 금을 벗겨내어 금화를 주조했다.

결국에는 금이 모자라자 통화량을 편법으로 늘렸다. 세금으로 거둔 금화를 녹여 새 금화를 주조하면서 구리를 섞은 것이다. 처음에는 국민들이 눈치 채지 못했다. 하지만 구리의 양이 점차 늘어나면서 구릿빛 금화만 시장에서 통용되고 원래의 금화는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것이다.

시장에 갑자기 늘어난 ‘동전 색깔 금화’는 푸대접을 받았다. 기원전 404년에는 아예 금이 안 들어간 동전만 남게 되어 역사상 최초의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해 통화시장이 붕괴되었다. 결국 아테네는 통화시장 붕괴로 용병들로 구성된 전투부대에 더 이상의 전비를 보낼 수 없게 됐고 이는 스파르타의 승리로 이어졌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위세도 오래가지 못했다. 양국이 모두 탈진한 나머지 새로이 부상하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왕에게 지배권을 내주고, 종국에는 신흥 로마에 정복되어 찬란했던 고대 그리스 시대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홍익희 세종대 대우교수·‘월가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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