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의 교초.
원나라의 교초.

별보배조개 껍데기가 돈으로 쓰이던 중국에서 기원전 8세기부터 청동으로 만든 칼처럼 생긴 도전(刀錢)과 가래처럼 생긴 포전(布錢)이 사용되었다. 이는 리디아에서 서구 최초의 주화 일렉트럼이 사용된 시기와 비슷하다. 기원전 3세기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는 문자, 도량형, 차축폭, 화폐 등을 표준화하면서 반량전(한 냥 절반 무게의 동전)을 대량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전한 무제 때는 오수전이 사용되었다. ‘한서(漢書)’ 지리지에 의하면 고조선의 법률인 범금(犯禁) 8조 중에는 도둑질한 자는 물건 주인의 노예가 되어야 하며, 속죄하려면 금속화폐 50만개, 곧 500관(貫)을 내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고조선에서도 금속화폐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동로마제국 금화와 사산왕조 은화의 통합

6세기에 발흥한 이슬람은 신정일치의 종교와 형제애로 다져진 ‘움마공동체’를 만들어 빠른 시간에 사라센제국을 건설했다. 이슬람은 7세기 말에 동로마제국의 금화와 사산왕조의 은화를 통합했다. 이로써 서양과 이슬람의 화폐 교환이 한결 수월해져 무역이 활성화되었다.

750년 압바스 왕조가 이슬람 세계를 장악하자 수도를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동양과 좀 더 가까운 메소포타미아에 계획도시 바그다드를 만들어 옮겼다. 이후 바그다드는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로서 정치와 종교를 총괄하는 도시로 성장해 한때 인구가 150만명에 달하는 세계 최대 도시가 되었다. 당시 바그다드와 견줄 수 있는 도시는 당나라 수도 장안과 동로마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 정도였다.

이후 이슬람은 인도와 남중국해로 해상무역 반경을 넓혀나갔다. 삼각돛을 단 ‘다우(Dhow)’ 범선으로 아프리카에서 중국에 이르는 해상을 연결하며 비단, 도자기 등 각종 교역품목을 실어 날랐다. 당시 광주(廣州·광저우)와 그 인근에만 20만명의 이슬람 상인과 유대 상인, 페르시아 상인들이 거주하는 자치구역이 있을 정도였다. 이들 중 12만명이 875~884년에 발생한 ‘황소의 난’ 때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고, 특히 유대 상인 4만명이 학살당해 광동 지역 유대인 정착촌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이후 중국과 이슬람 상인은 인도 남부 항구 퀼론을 경계로 동서 해역에서 각각 해상무역을 담당했다.

은 부족 사태로 어음이 출현하다

이슬람 상인과 중국 상인의 해상교류로 인도양 주변 해안 도시들의 상업이 활발해지자 유라시아 경제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게다가 중국은 비단과 도자기 수출 대금을 은으로만 받았다. 그러자 은 공급량이 경제 팽창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10세기에 이슬람 세계는 극심한 은 부족 현상을 겪게 되었다. 중국은 은이 조세의 기본이라 은이 금에 비해 고평가되었는데, 서양의 금과 은 교환비율이 1 대 12라면, 이슬람은 1 대 9, 중국은 1 대 6 정도였다. 당연히 서양과 이슬람의 은이 고평가된 중국으로 흘러들어갔다.

이러한 은 부족을 극복하기 위해 이슬람에서 외상거래와 어음이 탄생했다. 당시 이슬람 사회의 유대인 공동체와 이슬람 움마공동체는 그들의 경전인 탈무드와 코란이 국제법 역할을 해 먼 거리에 위치한 공동체 간에도 서로 신뢰할 수 있었다.

특히 유대인 공동체는 디아스포라 간의 오랜 정보공유 전통으로 지역별 환시세에 정통했다. 그들은 시장에서 서로 다른 화폐를 바꾸어 주는 환전상 업무를 하면서 들고 다니기 무겁고 위험한 금속화폐 대신 다른 지역의 유대인 공동체에서도 통용되는 어음과 수표를 960년께부터 발행함으로써 부족한 은화를 보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연이어 일어난 시아파 봉기로 바그다드 주변이 혼란에 빠지자 경제의 중심이 이슬람에서 지중해로 옮겨 갔다. 중세 베네치아에서는 유대 상인과 이탈리아 상인들이 상업과 무역을 발전시켰고, 어음도 이들을 따라 여러 도시로 퍼져나갔다.

중국에서도 이슬람과 비슷한 시기에 어음이 출현했다. 북경(北京·베이징)과 항주(杭州·항저우)를 잇는 대운하 개발로 당나라 말기부터 북송 시대(960~1127)에 걸쳐 중국의 강남지역이 활발히 개발되었다. 물이 풍부한 강남지역의 특성상 경제의 중심은 보리보다 생산력이 수십 배나 높은 쌀로 옮겨 갔다. 경제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지면서 거래할 때 쓸 동전이 심각하게 부족해지자 북송의 사천(四川·쓰촨)에서 민간 금융업자가 철전과 동전 대신 종이로 만든 어음인 ‘교자(交子)’를 유통시켰다. 10세기 후반 발행된 ‘교자’는 동전이나 철전을 맡기고 받은 예탁증서였다.

본격적인 지폐 시대를 연 원나라 쿠빌라이 황제. ⓒphoto 위키피디아
본격적인 지폐 시대를 연 원나라 쿠빌라이 황제. ⓒphoto 위키피디아

10세기 후반 북송에서 교자가 출현하다

교자의 편리성이 입증되자 나중에는 나라가 직접 발행을 관장했다. 교자는 여진족의 금나라를 거치면서 ‘교초’라는 지폐로 발전했다. 원래 여진족은 동전을 기본통화로 썼는데, 북송을 멸망시키고 화북지방을 점령한 후 구리가 부족해지자 1142년에 비단을 기반으로 지폐를 발행했다. 금나라는 동시에 은화와 동전도 발행해 금속화폐와 지폐가 함께 통용되었다.

이후 금나라가 아래로는 남송과 싸우고 위로는 북쪽의 몽골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전쟁 비용이 증가하자 지폐가 남발되었다. 금나라 말기인 1214년 무렵엔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해 1000관짜리 지폐도 발행되었다. 금나라는 화폐개혁을 단행해 새로운 지폐인 보천(寶泉)을 발행했으나 이미 실추한 신뢰의 상실로 시장에서 거부되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지폐로 은과 비단을 교환하지 않았다. 과도한 지폐 남발은 금나라 멸망 원인의 하나로 작용했다.

13세기 몽골인들이 대제국을 건설했다. 칭기즈칸이 25년간 정복한 땅은 로마제국이 400년간 정복한 땅보다 넓었고 알렉산더 대왕과 나폴레옹, 히틀러 등 세 정복자가 차지한 땅을 합친 것보다도 넓었다. 당시 고작 15만명의 군사로 그 넓은 땅을 정복한 것은 한마디로 기적이었다. 칭기즈칸의 사망으로 몽골군이 회군하지 않았다면 서유럽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역사학자들의 중론이다.

몽골군은 신출귀몰한 기동력 덕분에 중국 대륙과 중앙아시아, 러시아와 동유럽 일대를 순식간에 정복할 수 있었다. 보통 몽골 기병 한 명이 서너 마리의 말을 끌고 다니며 하루 이동 거리가 200㎞에 달할 때도 있었다.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빠른 속도였다. 러시아와 유럽은 전광석화와 같은 몽골군의 기습에 혼비백산했다.

고대로부터 대규모 부대가 움직일 때는 그 뒤를 따라가는 보급부대가 있어야 했지만, 몽골군은 보급부대를 끌고 다닐 필요가 없어 행군 속도가 빠르고 기동력 있는 작전이 가능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몽골군은 보급부대 없이 장병 스스로 자기 먹을 걸 안장 밑에 갖고 다니며 식사를 해결했다. 그 안장 밑 음식이 바로 말젖 분말과 육포가루였다. 마르코 폴로의 기록에 의하면 몽골군은 4~5㎏ 정도의 말젖 분말을 휴대하고 다니다가 아침 무렵에 500g 정도를 가죽자루에 넣고 물을 부은 다음, 저녁 때 불려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투 중에는 육포가루를 물에 타 먹었다. 특히 전쟁 중에 불을 피워 조리를 할 필요도 없어 부대가 적에게 쉽게 노출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몽골은 전 유라시아를 통일했기 때문에 기존의 실크로드 이외에 초원길이 더 뚫렸다. 그들은 네 개의 중요한 동서 교통로, 곧 ‘천산북로, 천산남로, 서역남로, 초원길’로 아시아와 유럽을 이었다. 그리고 통행로 요소요소마다 마구간과 숙소를 겸한 역참을 세웠다. 이는 동서무역을 활성화하기 위한 무역진흥 정책의 일환이었다.

스톡홀름은행이 은화 부족에 대처하기 위해  1661년 발행한 어음. ⓒphoto 위키피디아
스톡홀름은행이 은화 부족에 대처하기 위해 1661년 발행한 어음. ⓒphoto 위키피디아

서양은 이해 못한 원나라의 지폐

원(元)나라 초기만 해도 은과 비단이 주요 화폐였다. 교초 지폐는 제대로 유통되지 않았다. 금나라에서 관료로 일했던 야율초재는 칭기즈칸의 눈에 들어 원나라에서도 재무담당 관료로 일했다. 그는 금나라에서 사용하던 지폐를 활용할 것을 건의해 2대 황제 오고타이(태종) 때 교초를 발행했다.

원나라 때 시행한 역참제로 안전하게 열린 실크로드는 동서무역의 비약적인 활성화를 가져왔다. ‘금 항아리를 든 여성이 제국의 끝부터 끝까지 걸어가도 아무런 일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원나라는 각 지역의 도시와 항구 그리고 나루터와 관문을 통과할 때마다 내는 통행세나 관세를 없애고 모든 물품의 세금은 마지막 판매지에서 한 번만 지불토록 했다. 그 결과 상업과 무역이 활성화되었다.

육로뿐 아니라 해상교역도 활발했다. 천주 항구에만 1만5000척의 선박이 해상수송에 종사하고 있었다. 교역에서 거둔 세금과 수익은 거대한 제국을 경영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먼 거리를 은화와 동전 등을 갖고 다닌다는 것은 위험할 뿐 아니라 무거웠다.

본격적인 지폐 시대가 열린 것은 5대 황제 세조 쿠빌라이가 중상주의 정책을 취하면서 제국 전역의 교역 속도를 높이고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지폐의 사용을 급격하게 확대시키면서부터이다. 그는 은과 비단에 기반한 냥(兩) 단위 교초(지원통행보초)를 발행했다. 지원통행보초는 은 1냥을 교초 10관으로 정해 유통시킨 태환지폐였다. 원나라 교초는 동판으로 인쇄해 황제의 옥새를 날인해 발행되었다. ‘위조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문구도 새겨 넣었다. 덕분에 대량의 주조비용이 절약되면서 상거래가 활발해졌다. 쿠빌라이 초기엔 금나라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지폐와 은의 철저한 교환비율을 지켰다. 은을 확보한 만큼만 지폐를 발행했다. 원나라는 지폐 인쇄를 위해 수도 연경(燕京·베이징)에 조폐창을 두었다.

이로써 은본위 제도의 이슬람권과 몽골이 공통된 통화 기반을 갖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등 유라시아 지역이 모두 은을 기반으로 삼는 화폐경제 체제 안에 통합되었다. 이로써 교초는 고려부터 시리아까지 몽골의 영향권에 있는 모든 지역에서 통용됐다.

원나라는 아예 지폐만 유통시키기 위해 모든 금은과 동전을 몰수하고 이를 지폐로 바꿔주었다. 지폐 받는 것을 거부하면 사형을 당했다. 이전 송나라 때 지폐를 사용하긴 했어도 이처럼 광범위한 지역에서 지폐(교초)만 통용된 것은 원나라 때가 처음이다. 당시 이곳을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원나라의 지폐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아 ‘동방견문록’에서 지폐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래도 유럽인들은 아무 가치도 없는 종이가 돈 구실을 한다는 걸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원나라는 남송과의 전쟁과 대규모 토목공사 등 거액의 재정지출이 필요하면 무거운 세금징수로도 모자라 지폐를 마구 발행했다. 1274~1281년 원은 남송을 병합하고 고려의 2차 일본 침공으로 고려에 엄청난 원나라 지폐가 유입된다. 과도한 팽창정책으로 인해 원나라가 빚더미에 앉게 되고 은을 준비금으로 예치하지 않은 지폐가 남발되자 사람들은 은을 지폐와 교환하지 않았다. 이제 교초는 은으로 교환할 수 없는 명목상의 화폐, 곧 명목화폐로 전락했다. 게다가 위조지폐도 등장했다. 그로 인해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해 화폐체계가 붕괴되면서 통화시장이 마비되었다.

시장경제가 무너지자 원시적 물물교환 시대로 되돌아갔다. 그리스와 로마제국이 밟던 전철을 몽골제국도 피해가지 못했다. 이후 농민봉기와 주원장의 발흥으로 1368년 몽골군은 몽골고원으로 쫓겨나 원의 지폐는 휴지가 된다. 이렇듯 초인플레이션은 거대한 제국도 쉽게 무너뜨렸다.

홍익희 세종대 대우교수·‘월가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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