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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제
[2660호] 2021.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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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가]나이론으로 여성 해방시킨 코오롱그룹 창업주 이원만

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 근현대편 저자  2021-06-02 오후 4:55:49


   오운 이원만
   
   1904년 경북 영일군 우각리에서 태어남
   1920년 이위문과 결혼
   1922년 경북 영일군 산림기수보
   1935년 아사히공예주식회사 설립
   1941년 일본대학 중퇴
   1957년 한국나이롱주식회사 설립
   1960년 참의원 당선
   1963년 한국수출산업공단 창립위원회 위원장, 제6대 국회의원 당선
   1976년 코오롱그룹 회장 취임
   1994년 서울대병원에서 별세
   

   코오롱그룹 창업주인 오운(五雲) 이원만(李源万)은 국민의 의류생활에 변혁을 일으킨 한국 섬유산업의 주역이다. 나일론으로 사업을 시작한 코오롱은 사업 영역을 여러 분야로 넓혀왔다. 지주회사인 코오롱을 중심으로 화학, 섬유, 자동차 소재, 전자 재료, 건설, 환경, 바이오, IT 등에서 전문화된 사업을 영위하며 내실 있는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오운은 4·19혁명 이후 초대 참의원에 이어 7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인이기도 하다. 5·16군사정변 때는 구로공단 건설 등 구체적인 경제개발 방안을 제시하여 ‘한강의 기적’을 도운 경제교사 역을 맡기도 했다.
   
   오운은 1904년 9월 7일 경북 영일군 우각리에서 500석의 부농인 이석정과 이사봉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퇴계 이황의 스승이었던 회재 이언적의 15대손으로, 아호 오운은 ‘오색 구름이 바다를 건너가는 것을 보았다’는 모친의 태몽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오운의 부친은 신식 교육을 하는 사립학교가 동네에 들어서자 지체 없이 오운을 입학시켰다. 독선생을 통해 ‘자치통감’과 ‘경서’ 등 한학의 기초를 배운 오운은 덕분에 정치와 역사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오운이 16살이 되던 해에 부친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솔방울에서 깨달음 얻어 일본으로 떠나다
   
   이듬해인 1920년 오운은 이위문을 아내로 맞았다. 모친은 아들이 농사짓던 땅을 물려받아 편히 지내기를 원했지만 오운은 모친을 설득해 근처에 있는 보통학교에 5학년으로 편입했다. 그곳에서 한문에 이어 수학을 공부했다.
   
   19살 때 오운은 산림을 관리하는 산림기수보로 취직했다. 영일군의 각 면을 돌며 나무가 잘 자라도록 관리하는 것 외에 수십 년 된 나무를 마구 베는 사람들을 단속하는 게 일이었다. 또 정해진 금액의 조합비를 내지 않는 사람들이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하는 일도 했다. 오운은 돈이 없어서 조합비를 내지 못한 조선 사람들이 몰래 나무를 베다가 도망치는 것을 보면 기분이 언짢았다. 그래서 조합비를 못 내는 조선 사람들에게 간벌 업무를 맡기기로 했다.
   
   “나무의 옆으로 벌어진 가장 큰 가지의 아랫부분까지만 베어내십시오. 그것을 땔감으로 내다 팔면 조합비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생활에 무리가 없겠지요?”
   
   그러나 오운은 생활이 지루하기만 했다.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집 주변 비학산에 올랐는데 발아래로 솔방울이 떼굴떼굴 굴러왔다. 그는 솔방울을 잡으며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10년을 산에서 일하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솔방울 씨는 때가 되면 사방팔방으로 날아가게 마련인데 씨가 소나무 밑에 떨어지면 살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사내대장부가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만 받고 안락하게 지내면 크게 될 수 없다. 고향을 떠나 타향에 가야 포부를 펼칠 수 있다. 만주든 일본이든 새로운 세상을 찾아가야 한다. 말 못 하는 소나무도 떠나는데, 나라고 못 떠날까?”
   
   오운은 마음을 굳히고 산을 내려와 식구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고, 어머니를 비롯한 식구들은 그를 세상으로 내보내주기로 했다. 그렇게 29살에 한국을 떠난 오운은 조선 사람들이 많은 일본 오사카로 갔다. 그러나 타국에서 구할 수 있는 직업이란 일본인들이 꺼리는 허드렛일뿐이었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무거운 신문을 어깨에 메고 배달하는 것도 그런 일 중 하나였다. 보급소에서 일하는 배달원은 몇몇의 조선 사람들과 간사이대학교에 다니는 가난한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신문배달원으로 돈을 벌면서 학교에 다녔다.
   
   당시 오운은 일본말은 잘 못했지만 한자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오운은 신문 배달일도 잘했다. 신문보급소의 첫째 목표는 판매 부수를 늘리는 것이었는데, 배달을 나가면 골목에서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배달하고 남은 신문은 남겨뒀다가 얼굴이 익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장이 그를 불렀다.
   
   
▲ 1963년 나이롱원사공장 준공식 장면. photo 코오롱그룹

   신문 표어 공모에 당선돼 목돈을 쥐다
   
   “너한테 좋은 일이 하나 생겼다. 아사히신문과 마이니치신문이 공동으로 전국에 신문 부수 확장 표어를 공모하고 있다. 너는 머리가 좋고 한문 지식도 있으니 한번 도전해봐.”
   
   그는 소장의 말대로 응모해 보기로 하고 추운 방에 벌렁 누워서 자신이 사람들에게 했던 일을 떠올려 보았다. ‘친절과 노력만 있으면 판매 부수가 높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친절과 노력? 그래 그거야.’
   
   그는 벌떡 일어나 바로 붓을 들었다. ‘친절과 노력은 확장의 어머니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오운의 표어가 1등으로 당선된 것이다. 당선금도 300원이나 되었다. 당시 대학을 나온 사람들의 월급이 50원도 안 됐으니 엄청난 돈이었다. 그는 바로 사표를 던졌다. 애초 그가 신문 보급소에서 일한 것은 간사이대학교에 입학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하느라 공부를 할 수 없었는데 이제 목돈을 쥐었으니 당분간 고생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목돈을 다 쓰고 난 후 다시 취업전선에 나서 해안의 뗏목 운반 노동자들을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인의 감독에 반발하는 일본 노동자들의 항의로 닷새 만에 사직했다. 또다시 천신만고 끝에 프레스공장 직공으로 취직했지만 이곳에서도 공장 직원들에게 스모(일본 씨름)를 가르치러 온 선수와 시비가 붙었다. 고향에서 씨름꾼으로 수상한 경력이 있던 오운은 두 번 시합을 벌여 상대 선수를 모두 엎어쳐서 완승했다. 그후 공장에서 일하던 일본인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하지만 오운은 월급쟁이가 아닌 자영업의 길로 나서기로 결심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공장 직원들의 복장이었다. 그들은 머리띠를 두르고 일해 머리에는 언제나 하얀 쇳가루가 수북이 쌓이곤 했다. 그는 ‘저럴 바에는 모자를 쓰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전등의 빛을 바로 받으면서 일해 시력도 나빠지니 챙이 있는 모자를 쓰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모자를 만드는 천에 공장 이름이나 광고 문구를 직접 인쇄하면 일거양득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운은 천 인쇄 발명특허를 가진 업자를 만나러 도쿄에 갔다. 통사정을 해서 성공불로 특허 사용료를 주기로 하고 사업에 착수해 1935년 5월 오사카에 ‘아사히공예주식회사’를 열었다. 단가를 낮추기 위해 염색공장에 가서 자투리 천조각을 헐값에 사다 썼는데 다행히 작업모가 히트를 쳤다. 불티나게 팔려 하루 4만개를 만들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어느새 작업모가 모든 공장의 필수품이 되었고 공장 직원은 1000명을 훌쩍 넘었다.
   
   
▲ 1962년 나이롱원사공장 기공식장에서 연설 중인 이원만 창업주. photo 코오롱그룹

   첫 사업 작업모가 대박을 치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 오운은 회사 이름을 ‘아사히피복’으로 바꾸고 고국에서 동생 원천과 아들 동찬을 불러들였다. 이후 새로운 상품 개발에 나서 여성용 모자를 만들고, 자동차 공장의 직공이 입는 작업복 등판에 마크를 넣어 주는 일도 시작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벌어지자 아사히피복도 군수공장으로 지정되었다. 전투모도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3000명이 넘는 공장 직원이 종일 작업에 매달렸다. 미군의 공습이 심해지자 오운은 시멘트를 부어 만든 거대한 지하동굴 안에 재봉틀과 옷감 등의 물자와 현금을 차곡차곡 숨겨두었다.
   
   그러던 어느날 큰 공습이 발생해 공장들이 모두 불바다가 되었다. 그런데 지하에 묻어둔 물자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는 일제가 패망하자 그 물자를 모두 팔아 보험금 50만원까지 합쳐 거금 180만원을 손에 쥐었다. 그는 일본의 공장시설 운영은 동생에게 맡긴 후 귀국했다.
   
   오운은 귀국 후 대구의 경북기업주식회사를 인수했지만 1948년 5·10 총선거가 실시되자 회사 운영은 아들에게 맡기고 총선거 출마를 결심한다. 하지만 낙선의 고배를 마셨고 이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생이 일본의 재산을 정리해 마련한 100만원을 밑천 삼아 다시 경제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재일 경제동우회를 만들어 부회장에 취임했고, 6·25전쟁을 맞아서는 일본 정부에서 실을 배급받아 옷을 만들어 판 돈으로 알루미늄 식기와 의류를 장만하여 고국에 구호품으로 보냈다. 재일동포 신용조합을 만들어 사업자금을 융자하는 은행 구실도 하게 했다.
   
   오운은 장차 한·일 간 무역활성화를 예견하고 1951년 ‘삼경물산’을 세웠다. 회사 이름은 일본 재벌 미쓰이(三井)의 앞 글자와 고향인 경상북도에서 따왔다. 첫 사업은 의류생활의 변혁을 가져온 나일론의 도입이었다. 질기고 튼튼한 나일론 양말은 여성에게 자유를 주었다. 나일론 덕분에 여성들은 남편과 자식을 위해 바느질하던 시간과 에너지를 아껴 다른 곳에 쓰게 되었다.
   
   
▲ 1996년 1월 29일 코오롱그룹 회장 이취임식에서 이동찬 선대회장(왼쪽)이 이웅열 명예회장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photo 코오롱그룹

   1957년 나일론사 생산에 나서다
   
   오운은 자신의 사업이 번창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국가의 발전에도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당시 섬유제품 원료인 스트레치 나일론사 수입으로 외화 유출이 심하다는 사실에 주목한 그는 스트레치 나일론사 생산을 담당할 한국나이롱주식회사(코오롱의 전신)를 1957년 창설했다. 1950년대 말 회사는 날로 번창했다. 여공 120명을 뽑는데 16 대 1의 경쟁률을 보일 정도였다. 사람들은 “며느리를 보려면 한국나이롱주식회사로 가라” “나이롱 여대로 가봐라”는 농담까지 했다.
   
   하지만 오운은 1960년 4·19혁명 후 참의원 선거가 실시되자 다시 정치의 꿈을 피우기 시작했다. 민주당 공천으로 경북지구에 출마했는데 이번에는 쉽게 당선됐다. 그는 신문배달원 시절 표어 공모에 당선되었던 기지를 발휘하여 선거 구호로 자신의 이름을 부각시켰다. “원만하다. 이원만! 마음 놓고 찍어주자!”
   
   이후 활발한 의정활동에 나선 오운은 농협이 농민의 협동조합으로 거듭나도록 힘썼다. 또 적극적인 해외 차관 도입에 나서야 국가 산업이 발전할 것이라는 지론도 폈다. 밀수를 막는 데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수입 정책을 세우라는 의견도 제시했고, 연료정책과 관련해서도 나무를 베지 말고 프로판가스 등을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오운은 1961년 5·16군사정변이 터지자 연금 상태에 들어갔지만 군사최고회의에 불려가 특유의 수출입국론을 편 덕분에 박정희 의장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일본 사람들은 인적 자원밖에 없어도 머리를 써서 돈을 벌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은 일본 사람들보다 머리가 좋았으면 좋았지 나쁘지 않습니다. 우리도 인적 자원을 활용해서 외화를 얼마든지 벌어들일 수 있습니다. 제 눈에는 우리나라 자연이 다 돈으로 보입니다. 모래 한 알, 조개 껍데기 하나도 돈이 아닌 게 없어요. 우리나라 공중에 달러가 둥둥 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꽃 위에 돈이 앉으려고 꿀벌처럼 빙빙 돌고 있단 말입니다. 꿀벌이 앉을 곳을 찾을 때는 우선 바가지라도 엎어놓고 꿀벌이 앉도록 해야 합니다.”(‘이원만처럼’ FKI미디어)
   
   
▲ 서울 성북동 자택에서 열린 이웅열 코오롱 회장의 장남 규호군 돌잔치에서 직계 4대(代)가 모여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이원만 창업주, 이 창업주 부인 이위문 여사. 뒷줄 왼쪽부터 이 회장 부인 서창희씨, 이 회장, 이동찬 명예회장, 규호군, 이 명예회장 부인 신덕진 여사. photo 코오롱그룹

   박정희 의장을 사로잡은 수출입국론
   
   군사최고위원회에서 수출입국론을 편 다음 날 오운은 박정희 의장의 특별 초청을 받아 중앙청으로 갔다. 이곳에서 그는 다시 수출산업공업단지를 조성할 것을 건의했다. 결국 1963년 ‘수출 1번지’로 구로동 수출산업공업단지가 발족하자 창립위원장에 취임한다.
   
   이해 8월 한국나이롱주식회사 준공식에서 오운은 다음과 같은 열변을 토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남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나 나도 남에게 도움을 주어야겠다고 항상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동포에게 의복을 주자고 결심했습니다. 싸고 질긴 의복을 동포들에게 입히고, 양말 뒤꿈치를 꿰매는 일부터 자유롭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나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나일론 원사를 생산했습니다.”
   
   그가 생산에 나선 후 처음에는 양말, 메리야스, 직물 등에 쓰이던 나일론은 차츰 농촌용 면포, 어망용, 타이어 코드용으로 더 많이 쓰이게 됐다. 또 전국에서 수많은 여성이 몰려든 덕분에 구로공단은 1970년대 후반 한국 전체 수출의 10% 이상을 감당할 만큼 전성기를 누렸다.
   
   오운은 1971년 한국폴리에스테르 구미 공장도 완공시켜 한국 섬유산업의 핵심 축을 만들어냈다. 1977년 오운은 아들 이동찬에게 회장 자리를 물려준 후 일선에서 물러났다. 은퇴 후에도 코오롱을 응원하던 오운은 1994년 2월 14일 서울대병원에서 별세했고, 경북 김천시 봉산면 금릉공원묘원에 안장됐다.<본 글은 '이원만처럼(박시온 저, FKI미디어 발행)에서 일부 발췌해 작성했습니다>
   
   

   오운 이원만의 가계
   
   오운은 이위문과 사이에 2남4녀를 두었다. 장남 동찬(작고)씨에 이어 장녀 봉필(88)씨는 임승엽(작고)씨와, 차녀 애란(79)씨는 노영태(79)씨와 결혼하였다. 또 3녀 미자(77)씨는 박성기(82)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남 동보(72)씨에 이어 4녀 미향(67)씨는 허영인(72) SPC그룹회장과 결혼했다.
   
   오운의 장남 동찬씨는 신덕진(작고)씨와의 사이에 1남5녀를 두었다. 아들 웅열(65)씨는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으로, 서병석 동남갈포공업회장의 장녀 서창희(61)씨와 결혼했다. 동찬씨의 장녀 경숙(75)씨는 이효상 전국회의장의 3남 이문조(작고·영남대 교수 역임)씨와, 차녀 상희(72)씨는 고석진(작고)씨와 결혼하였다. 또 3녀 혜숙(69)씨는 이학철 고려해운 창업주 장남 이동혁(74·고려해운 회장 역임)씨와, 4녀 은주(67)씨는 신병현 전 부총리의 장남 신영철(71·의사)씨와 결혼했다.
   
   오운의 손자 웅열씨는 서창희씨와 사이에 1남2녀를 두었다. 아들 규호(37)씨는 코오롱글로벌 부사장이며, 소윤(34)·소민(32) 자매는 해외유학 중이다.
   
   오운의 섬유산업을 이끌어온 장남 동찬씨는 1982년부터 10여년간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을 맡으며 노사 안정화에 기여했다. 오운에 이어 아들 이동찬, 손자 웅열씨가 3대에 걸쳐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하는 드문 기록도 세웠다.
   

   

   내가 본 오운 이원만
   나라도 잘되고 나도 잘되는 ‘상지상’ 사업 평생 추구
   

나공묵 코오롱 상임고문

1961년 코오롱그룹에 입사해 50여년을 곁에서 지켜본 이원만 회장은 정말 큰 그릇이었다. 시원시원하며 호방한 성격에 뛰어난 유머감각을 지녔다. 주위에는 늘 사람이 끊이질 않았고, 사업상 중요한 결단을 내릴 때에는 특유의 동물적 감각으로 결단력을 보여주었다.
   이 회장은 생전에 사업을 크게 네 가지로 구분했다. 바로 ‘상지상(上之上)’ ‘상지하(上之下)’ ‘하지상(下之上)’ ‘하지하(下之下)’다. 이 중 제일 좋은 사업은 나라도 잘되고 자기도 잘되는 사업, 즉 ‘상지상’이다. 그다음은 나라는 잘되는데 자기는 이익이 없는 사업으로 ‘상지하’라고 볼 수 있다. 그다음은 ‘하지상’으로 나라를 망치고 자기만 잘되는 사업이다. 제일 나쁜 사업으로 꼽히는 ‘하지하’는 나라도 망치고 자기도 망하는 밀수 같은 것이다.
   이 상지상이라는 단어에 이원만 회장의 뜻이 함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회장은 “제대로 된 기업가라면 상지상의 기업을 해야 할 것”이라고 늘 강조했다. 나라도 잘되고 자신도 잘되기 위해 진정 최선을 다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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