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세계화폐를 주장했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
1944년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세계화폐를 주장했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

1944년 브레턴우즈 회의 때 세계화폐를 주장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유명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다. 무역전쟁과 환율전쟁으로 인해 세계대전이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 1월에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케인스가 영국 대표단으로 참가해 독일에 과도한 배상금을 물려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케인스의 주장은 젊은 경제학자의 치기로 여겨져 묵살되었다. 그는 회의에 참가한 각국 정치인들이 이기적인 자국 정치논리를 앞세워 경제를 무시하는 무지한 행태에 충격을 받고 분노했다.

그는 독일에 물린 혹독한 배상금이 전무후무한 인플레이션을 발생시킬 것이며, 이는 독일 국민들을 빈곤으로 내몰아 ‘극단적 혁명’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해 전제주의 정권의 등장과 새로운 전쟁을 예감했다. 케인스는 독일 경제 조직을 완전히 초토화하는 내용을 담은 평화조약 초안을 수정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케인스가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뒤 분노에 차서 2개월 만에 쓴 책이 ‘평화의 경제적 결과’이다. 그는 이 책에서 연합국 지도자들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정치가 아니라 금융과 경제라는 사실을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이해했더라면… 아직 시간이 있을 때 흐름을 이로운 쪽으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케인스가 생각하는 평화조약의 정신은 ‘관용’으로, 독일에 대한 배상금은 100억달러를 넘지 말아야 하고, 미국이 유럽 부흥을 돕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 책은 출간 6개월 만에 12개 언어로 번역되어 10만권이나 팔렸음에도, 케인스의 제안은 묵살되었고 그의 불길한 예상은 그대로 현실화되었다.

결국 그의 경고대로 독일에 대한 거액의 전쟁배상금은 화를 불렀다. 독일은 배상금을 갚기 위해 수출을 늘리는 과정에서 엄청난 화폐를 발행했다. 이러한 화폐발행량 증가는 결국 초인플레이션을 불러와 사회가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다. 이 틈을 타고 히틀러와 나치가 등장했고 이는 2차 대전을 불러왔다.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은 인플레이션이었다. 2차 대전이라는 참화는 케인스의 선견지명이 거부된 결과였다.

독일의 초인플레이션은 정부의 화폐발행량 증가와 은행들의 과도한 신용창출의 결과물이었다. 독일 정부는 과도한 전쟁배상금 지급과 경기진작을 위해 수출을 늘려야 했다. 수출을 늘리기 위해서는 마르크화 평가절하로 수출상품 가격경쟁력을 높이는 게 유리해 결국 화폐발행량 증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독일 초인플레이션의 진정한 막후 조종자는 거대한 신용창출을 일으킨 금융자본세력들과 그들에 의해 움직여진 민간 중앙은행이었다.

금융투기세력의 만행

은행들의 과도한 신용창출이 유동성을 급속도로 늘려 초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1921년 1월에 0.3마르크 하던 신문 한 부 값이 1922년 11월에는 7000만마르크가 됐으니 2억배 오른 것이다. 시민들은 생활비를 아껴 평생 저축한 돈이 휴지조각이 되는 어처구니없는 참담함을 겪었다. 시민들은 항의의 표시로 화폐를 길거리에 버리거나 불쏘시개로 썼다.

시민들은 두 눈 멀쩡히 뜨고 화폐발행량을 터무니없이 늘린 정부와 금융세력에 의해 무자비하게 수탈당한 것이다. 특히 부동산 없이 현금만 보유했던 빈곤계층 서민들이 발가벗겨졌다. 부자들은 부동산, 토지, 주식, 귀금속 등으로 자신의 재산을 포트폴리오 해놓아 어느 정도 인플레이션의 피해를 피해갈 수 있었지만 저소득층일수록 피해가 컸다. 금융투기세력이 화폐가치 폭락 과정에서 벌어들인 거대한 이익은 바로 국민들이 몇십 년 동안 힘들게 저축해 얻은 부였다.

인플레이션이 가속화할 기미를 보이자 여기에 마르크화 금융투기세력들이 가세했다. 그들은 막대한 대출을 일으켜 부동산과 기업들을 헐값에 사들이고 돈값이 휴지조각이 됐을 때 대출을 갚았다. 1923년에는 이틀마다 물가가 2배씩 폭등했다. 이러한 방법을 연속적으로 사용해 독일 최고의 거부가 된 사례가 휴고 스티네스였다. 그는 역사상 인플레이션을 가장 잘 활용(?)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대출로 1535개의 기업과 그에 딸린 2888개의 공장을 사들였는데 그 가운데 신문사도 60개나 있었다.

그는 언론조차 입맛대로 조종하며 인플레이션을 부추기기까지 했다. 그는 자신 소유의 신문을 통해, 인플레이션율이 1만%에 이르던 1922년에도 “유통되는 통화가 부족하다. 산업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통화량이 더 늘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경제학자들도 동원했다. 유럽 최고의 작가였던 슈테판 츠바이크에 의하면 휴고 스티네스의 재산은 독일 국부의 4분의1이었다고 한다. 1923년 타임지는 그를 ‘독일의 새로운 황제’라고 칭했다. 이러한 행태로 인해 파렴치한 투기꾼들과 이를 조장한 유대인 금융가들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적개심과 증오는 상상을 초월했다.

초인플레이션이 부른 나치 전제 정권

케인스의 예견대로, 이 틈을 파고들어 대중을 선동해 집권한 사람이 히틀러다. 그가 이끄는 나치의 지지율은 1928년 총선에선 2.6%에 불과했으나 2년 후엔 37.4%의 득표율로 원내 1당이 되어 히틀러가 총리에 올랐다. 1934년 대통령이 서거하자 히틀러는 자신이 총리와 대통령을 겸하는 ‘총통’이 되겠다고 국민투표에 붙였다. 그는 무려 88.1%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최고권력자가 된다. 이어 홀로코스트와 2차 대전이라는 세계 최대의 비극이 일어난다. 정치를 앞세우고 경제와 금융을 무시한 결과였다.

그 뒤 헝가리에서는 1946년 역사상 최대의 초인플레이션이 일어났는데 0이 29개나 붙는 인플레이션율은 읽기조차 어렵다. 이러한 일은 과거에 국한된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필자가 1990년대 초 브라질에서 근무할 때도 초인플레이션은 일어났으며, 러시아도 1992년 2600%의 초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 옐친 정부 8년 동안 러시아 인플레이션은 60만8000%에 달했다. 2007년 나이지리아에서 벌어진 월 796억%에 달하는 인플레이션을 비롯해 2009년에는 짐바브웨가 무려 100조달러 지폐를 발행하기도 했다. 지금도 베네수엘라는 초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나라의 사람들은 봉급을 받자마자 뛰어나가 카트 가득 물건을 사기에 바쁘다. 필자도 브라질 근무 때 그 대열에 선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조금만 늦으면 지폐가 휴지조각이 되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초인플레이션은 개발도상국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라 선진국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화폐적 현상’이다. 제로금리와 양적완화 정책으로 화폐발행량이 최대로 늘어난 요즘의 현실이 위태로운 이유이다.

케인스의 화폐관은 명료했다. 특정국가에 의해 임의로 발행량이 증가하거나 축소되는 일이 없는, 곧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이 없는 세계화폐가 있어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인플레이션은 부당하고 디플레이션은 비효율적이다. 독일의 경우처럼 극단적 인플레이션을 제외하면,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 중에 디플레이션이 더 안 좋다. 빈곤한 세계에서 임대인을 실망시키는 것보다 실업을 유발하는 것이 더 안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 중 하나를 꼭 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두 가지가 모두 안 좋고, 모두 피해야 한다.”

케인스가 디플레이션이 더 안 좋다고 한 데는 이유가 있다. 다음 달에 물가가 더 싸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사람들이 소비를 미루어 경기침체에 빠지기 때문이다. 소비가 줄어들면, 기업이 생산을 줄이고, 그러면 결국 실업이 유발된다는 이야기이다.

1920년대 초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독일에서 가치가 하락한 지폐 더미를 불사르기 위해 모아놓은 장면.
1920년대 초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독일에서 가치가 하락한 지폐 더미를 불사르기 위해 모아놓은 장면.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구조

그럼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은 왜 일어날까? 초인플레이션이란 물가상승이 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상태로 월 50% 이상의 인플레이션율을 뜻한다.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만연하면 사람들은 돈이 들어오는 즉시 재화로 바꾸려 든다. 이렇게 되면 통화의 유통속도가 갈수록 빨라져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으로는 제어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시중 유동성은 갈수록 증폭되어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것이다.

케인스는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이 일어나지 않는 세계화폐가 개발되어야 한다고 믿고 스스로 수년 전부터 그런 화폐의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패권국가가 극단적인 무역수지 적자를 볼 경우, 무역 분쟁은 물론 환율전쟁을 일으킬 우려가 있고 또한 이는 세계경제를 불경기에 빠트릴 염려가 있어 이를 ‘예방’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마침내 그는 세계화폐 ‘방코르(Bancor)’를 고안해 냈다. 방코르는 금을 비롯해 30개 상품의 가격을 기초로 가치가 산정되며 각국은 자국 화폐를 일정한 고정환율로 방코르와 교환할 수 있게 했다.

케인스는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그의 학문적 연구를 토대로 달러 체제에 대항하는 세계화폐 ‘방코르’와 이를 청산해줄 ‘국제청산동맹’을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세계 각국이 무역에서 각 나라 통화를 사용하지 말고, 이 세계화폐를 공통으로 사용하자는 주장이었다.

케인스는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방코르의 발행량이 거래되는 상품과 서비스의 양에 비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제안은 각 나라의 과거 3년간 무역액의 75%를 기준으로 방코르를 미리 각국의 보유자금으로 할당하고, 각 나라는 수출과 수입의 차액을 이 세계화폐를 사용해 조정하자는 것이었다. 곧 방코르는 금을 사용하지 않고 무역결제를 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화폐였다.

방코르는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는 없지만 세계 중앙은행들끼리 결제할 수 있는 화폐로 각국 화폐의 가치는 방코르와의 상대 환율로 표시된다. 케인스가 무역전쟁과 환율전쟁 예방에 필요한 세계화폐를 고안해 낸 것이다.

여기에 케인스는 자신의 천재적인 면을 볼 수 있는 환율조정시스템을 더했다. 케인스는 무역수지 적자국의 경우 적자액만큼의 방코르 초과인출을 계상할 수 있게 하되 각국의 초과인출 상한액은 무역규모에 비례해 설정하도록 고안했다. 각국의 연간 무역수지 적자액이 사전 설정된 방코르 초과인출 상한액의 50%에 달하면 그 나라 화폐는 평가절하를 실시하는 동시에 적자액의 10%를 벌금으로 내게 했다. 벌금제도는 무역흑자 국가에도 적용했다. 벌금을 피하려면 각국이 자연스럽게 사전에 환율을 조정해야 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케인스가 우려했던 것은 ‘금과 태환됨으로써 달러의 신용을 유지한다’는 제도가 미국의 금 보유량이 고갈되면 붕괴될 수밖에 없는 체제라는 점이었다. 만약 이런 사태가 벌어지면 세계경제 역시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걱정한 것이다.

케인스의 국제청산동맹 구상

케인스가 세계화폐를 주장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이유는 무역전쟁과 환율전쟁으로 3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케인스의 생각은 세계화폐는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도록 고안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특정국가의 위기가 다른 국가로 전이되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달러가 기축통화일 경우 미국 내에서 유동성 위기가 일어나면 경제 위기는 전 세계적으로 전이되지만, 세계화폐를 활용할 경우 경제 위기의 전이는 제한적 수준에 그친다는 게 케인스의 생각이었다.

케인스는 국제청산동맹의 자본금을 260억달러로 하자는 제안도 했다. 미국 1년 GDP(국내총생산)보다도 많은 금액이었다. 하지만 케인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거부되었다. 달러를 기축통화로 만들어 패권을 잡으려 했던 미국이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방코르와 국제청산동맹의 꿈은 무산되었지만 절충이 이루어져 85억달러 규모의 국제통화기금(IMF)이 설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케인스의 맞상대로 떠올랐던 인물이 해리 화이트다.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 부부의 막내로 태어난 화이트는 집안이 가난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1차 세계대전 때 군에 자원입대했다. 전쟁이 끝나자 화이트는 참전용사 지원프로그램 덕에 컬럼비아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잠시 교수생활을 한 뒤 재무부에 취직했다. 당시 재무부 장관이었던 헨리 모겐소가 그의 능력을 알아봤다. 유대인끼리 통하는 면도 많았을 것이다. 화이트는 모겐소 장관 보좌관을 거쳐 승승장구해 차관보에 오른 뒤 브레턴우즈 회의에 미국 대표로 참석했다. 화이트는 케인스에 밀리지 않았다. 화이트의 적극적인 공세는 미국이라는 힘과 유대금융자본의 파워를 배경으로 압도적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참가국들도 2차 대전의 후유증으로 미국의 도움이 절실할 때였다.

결국 회의는 여러 나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뜻대로 마무리되었다. 미국은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금환본위제도를 실시키로 했다. 금 1온스를 35달러로 고정하고, 그 외에 다른 나라 통화는 달러에 고정하되 1%의 범위 내에서 조정할 수 있는 재량을 부여했다. 이로써 달러 패권 시대의 문이 열렸다.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월가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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