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주 허만정

1897년 11월 24일 경남 진주시 지수면 승내리에서 태어남

1919년 상하이임시정부를 지원한 백산상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함

1925년 진주일신여자고보(현 진주여고) 설립

1946년 3남 준구를 대동하고 LG에 출자, 동업자가 됨

1952년 2월 26일 별세

올해 창립 17주년을 맞은 GS그룹은 재계 8위의 기업군으로 급성장했다. 반세기를 넘는 LG와의 동반자 관계를 접고 2004년 7월 GS홀딩스 설립, 이듬해 3월 새로운 기업이미지 선포 등 GS그룹의 성공적인 연착륙을 두루 확인시킨 후 성장 가도를 달려왔다. GS그룹은 현재 지주회사인 ㈜GS와 GS에너지, GS칼텍스, GS리테일, GS건설 등 주요 자회사와 계열사를 포함해 79개 기업을 거느리고 있다.

GS그룹의 효시인 효주(曉洲) 허만정(許萬正)은 1897년 11월 24일 경남 진주시 지수면 승내리에서 지신정(止愼亭) 허준(許駿)과 함안 조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허준은 300석지기의 중농이었다. 허준이 그만한 부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굶주림을 참아가며 바느질해서 재산을 한 푼 두 푼 늘려나간 어머니의 노력 덕분이었다. 허준은 늘 어머니의 고생을 떠올리며 자신의 옷이 남루해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농토에 나갈 때에도 맨발로 절반쯤 걸어가서야 신을 신었고, 돌아올 때도 신발을 신고 오다가 절반쯤에서 다시 신을 벗어 들고 맨발로 집까지 걸어올 정도로 물건을 아꼈다.

그러나 허준은 집에 손님이 오면 솥다리를 걸어 놓고 음식을 잘 차려서 대접했다. 손님이 실컷 먹고 돌아가면 남은 음식을 가리키며 “이 음식은 저녁때 내가 먹겠다”고 말했다. 그만큼 근검절약했다는 일화다. 이리하여 허준은 2만석의 대농이 되었고, 매일 이른 아침 밥을 지어놓고 찾아오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밥을 먹일 만큼 인심이 후했다. 농사짓던 유림 허준은 42세에 과거에 응시하여 진사에 급제하고 통정대부인 정3품 당상관에 올랐다. 이후 비서원 승지를 역임하였다. 1894년 조선 팔도에 큰 기근이 들자 허준은 창고에 쌓아둔 수백 섬의 곡식을 풀어 나눠 주었다. 기근이 어느 정도 수습되자 마을 사람들이 허준의 공덕비를 세웠다. 그러자 허준은 “저들이 비록 덕을 기리는 것이라 하나 나는 명예를 구하는 것이 아니니 사람들이 이토록 정황을 모른단 말인가”라고 말하며 마을 사람들이 만든 공덕비를 땅속에 묻어 버렸다.

그의 아들 효주는 1919년 서울에서 3·1만세운동을 경험하고 난 뒤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그는 부친에게 건의하여 거액을 희사받고 동지 수십 명을 규합하여 이듬해 진주일신고등보통학교 설립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일제 총독부의 방해로 남자 고보 설립에 실패하자 다시 여자 고보 설립을 추진하여 1925년 진주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진주여고의 전신)를 개교하였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가 이 진주여고 출신이다.

그는 또 일본 도쿄를 방문하여 유학생회에 자금을 기탁하였고, 백산상회 발기인으로 상하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냈다. 백산상회는 표면상으로는 쌀과 옷감, 생선 등을 판매하는 점포였지만, 실상은 상하이임정의 독립자금을 대던 자금조달 본부였다. 백산상회에는 모두 32명의 주주가 참여하였는데 경주 최부잣집의 최준이 2000주, 설립자인 백산 안희재가 2000주 등을 갖고 있었다. 효주는 1500주를 내어 창립멤버가 되었다. 또한 효주는 백정들의 인권을 향상시키기 위한 형평사운동을 지원하였으며, 1932년 남해 충렬사 중건에도 참여하였다.

1  2005년 3월 31일 GS그룹의 출범을 선포하는 허창수 초대 회장. <br></div>2  진주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한 허만정 흉상. <br>3  서울 강남구 논현로에 위치한 GS타워 전경. ⓒphoto GS그룹
1 2005년 3월 31일 GS그룹의 출범을 선포하는 허창수 초대 회장.
2 진주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한 허만정 흉상.
3 서울 강남구 논현로에 위치한 GS타워 전경. ⓒphoto GS그룹

‘원조’ 벤처캐피털

GS그룹은 효주의 3남 남촌(南村) 허준구를 통해 잉태되었다. 남촌은 1923년 5월 9일 경남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에서 부친 효주와 모친 초계 정씨 사이에서 8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호 남촌은 택호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향 승산리 중에서도 남쪽에 있던 구씨 집안과 혼인하여 ‘남촌’이라는 택호로 불리던 것을 후에 호로 삼았으니, 그 속에는 소박함을 추구하는 남촌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남촌이 태어난 승산(勝山) 마을은 김해 허씨가의 집성촌이었다. 이 마을에는 능성 구씨 집안도 대대로 뿌리를 내리며 터를 잡았다. 김해 허씨가 승산리 윗동네에, 능성 구씨가 아랫동네인 상동에 자리 잡아 200년을 살아왔다. 이렇게 이어져온 구씨와 허씨의 관계를 남촌이 ‘인척’에서 ‘동업’ 사이로 급진전시켰다.

1945년 광복 후 연암 구인회가 사업 근거지였던 진주를 떠나 부산에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할 때였다. 효주는 ‘돈이 가는 길을 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장사에 밝았던 연암의 사업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귀공자 풍모의 일본 간토중학교(5년제) 출신 3남 남촌을 데리고 가서 연암에게 두 가지 청을 했다.

“내가 사돈의 역량을 익히 알고 있는 터라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일이니 청을 들어주소. 내 아들 준구를 맡기고 갈 터이니 밑에 두고 일을 가르쳐주소. 사돈이 하는 사업에 내가 출자도 좀 할 작정이오.”

연암은 효주가 거액의 사업자금을 내놓으며 아들의 경영수업을 부탁하자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1946년 남촌의 나이 24세 때의 일이었다. 광복을 기리는 ‘벤처캐피털’이었던 셈인데, 허씨의 투자는 57년 만에 18조원이 넘는 자산으로 돌아왔으니 ‘대박’이 터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부 수립 후 농지개혁이 본격적으로 실시되면서 효주는 연암에게 동업자금을 내고 난 나머지 1만석에 가까운 토지를 강제환수당하고 말았다. 그에 상응하는 대가로 지가증권을 받았으나 여러 차례의 국변 속에 소용없게 되었다. 효주는 자기 소유의 땅을 정부에 내놓는 대신 스스로 직영할 수 있는 약 300석지기 땅만을 소유한 중농으로 다시 몰락한 것이다.

중농이 된 이후 그는 가정 내에서 한 푼도 헛되이 쓰지 않는 투철한 근검절약 정신을 지켜왔다. 그는 부인이 비누를 쓰다가 남겨진 손톱만 한 조각을 가져와야 새 비누를 내주었다. 또 부산으로 유학 보낸 자식들이 방학 때 귀가하면 6개월 동안 보내준 용돈의 사용처를 모조리 기록하라고 백지를 내주었다. 그리고 자식들이 용돈을 헤프게 썼다고 생각되면 왜 그런 데에 돈을 썼느냐고 다그쳤다. 자식들에게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근검절약하는 습관을 기를 수 있도록 교육한 것이다.

효주는 구씨와 허씨 가문의 동업을 위해 내놓은 사업자금에 대해서도 출자내역을 꼼꼼히 기록하여 누가 펼쳐보아도 알 수 있게끔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이런 꼼꼼함과 세심함은 후대에 자연스럽게 이어져 오늘날 GS그룹의 CEO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효주는 1952년 2월 26일 부산 동대신동 고영순내과에서 기관지 천식으로 별세했다.

LG와의 동업 파트너로 나선 남촌 허준구는 반도상사(현 LX인터내셔널), 금성사(현 LG전자) 상무를 거쳐 1962년 금성사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이어 1968년 반도상사 사장을 시작으로 금성전선(현 LS전선) 사장과 회장을 지내며 LG그룹의 버팀목이 됐다. 구인회 회장은 1968년 그룹 체제로 출범하며 남촌에게 기획조정실장을 맡길 정도로 무한 신임을 했다. 이듬해 락희화학이 민간기업 최초로 기업공개를 실시한 것도 남촌의 ‘숨은 공로’로 알려져 있다.

2002년 7월 29일 남촌이 별세하자 구자경 명예회장, 구본무 회장 등 구씨 일가는 ‘5일장’ 내내 ‘사돈’이자 ‘동지’였던 남촌의 빈소를 지켰다.

남촌은 구위숙(93·구철회 LG고문 장녀)씨와 사이에 5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고려대 동문이기도 하다. 남촌의 장남 창수(73)씨는 2004년 7월 GS 출범과 함께 허씨 가문의 추대를 받아 GS그룹 대표로 선임됐다. 허 회장은 LG그룹과의 공동경영 시절 계열사를 두루 거치며 풍부한 실무경험을 쌓아왔다. 그는 현장 중심의 경영과 이사회의 투명성을 늘 강조한다. 경영진의 판단이 현장을 벗어나도 안 되며 이에 기반을 둔 경영의 판단 역시 투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주요 계열사들의 연구, 생산, 판매시설 및 건설 현장 등을 자주 찾아다닌다.

허 회장은 개인 재산을 털어 사회적 책임도 실천해 왔다. 2006년 사재를 출연해 남촌재단을 설립, 소외계층 환자를 위한 의료사업과 저소득자녀 가전교육, 장학사업 등을 벌이고 있다. 2011년 경제계 원로들의 추대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맡아 지금까지 재계를 대표하고 있다.

남촌의 차남 정수(71)씨는 GS네오텍 회장직을 맡고 있으며, 3남 진수(68)씨는 GS칼텍스 의장, 4남 명수(66)씨는 GS건설 부회장을 역임했다.

남촌의 5남 태수(64)씨는 허창수 초대회장의 뒤를 이어 현재 GS그룹 회장직을 맡고 있다. 허태수 회장은 연초 “디지털 역량 강화와 친환경 경영으로 신산업 발굴에 매진할 것”이라면서, 사업 포트폴리오 재구성으로 미래 경쟁력을 강화하겠다고 다짐했다.

여수시 국가산업단지에 위치한 GS칼텍스 여수공장 전경.
여수시 국가산업단지에 위치한 GS칼텍스 여수공장 전경.

자손들 LG·삼성 동업자로

효주의 자손들은 LG그룹뿐 아니라 삼성그룹과도 동업관계를 맺어왔다. 삼양통상 창업회장인 효주의 장남 정구(작고)씨가 바로 삼성그룹 공동창업자이기도 하다. 허정구와 삼성그룹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은 한 동네에 살면서 친구처럼 지냈다. 그런 인연이 발전하여 1952년 호암이 제일제당을 설립하면서 당대의 대지주였던 허만정가의 장남 허정구를 자신의 창업동지이자 대주주로서 제일제당의 경영에 참여시킨 것이다. 이후 제일제당(현 CJ) 전무, 삼성물산 사장을 지내다 1957년 자신이 설립한 삼양통상을 운영하기 위해 1961년 호암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독립했다.

핸드백, 신발, 카시트용 피혁 등을 만드는 삼양통상은 야구 글러브 등 스포츠용품 업체이기도 하다. 수입담배, 골프용품, 윤활유 판매 등을 맡고 있는 삼양인터내셔널과 남서울CC를 보유하고 있는 경원건설 등의 계열사가 있다.

허정구 회장은 대한체육회장, 프로골프협회장, 아시아태평양아마골프회장 등을 역임하며 체육훈장 기린장을 받았고, 영국왕립골프협회의 첫 한국인 멤버이자 대한골프협회장, 초대 한국프로골프협회장을 지냈다. 1954년 출범한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가 2003년부터 ‘허정구배’로 이름을 바꿔 ‘한국 골프의 대부’ 허정구 회장의 뜻을 기리고 있다. 그의 장남 남각(83·미 시카고대학원 졸업)씨는 삼양통상 회장을 맡고 있으며, 그 아들 준홍(46)씨는 삼양통상 대표로 근무하고 있다. 허정구 회장의 차남 동수(78·미 위스콘신대 화공학 박사)씨는 GS칼텍스 명예회장이며, 그의 장남인 세홍(52)씨가 GS칼텍스 대표이사 사장을 맡고 있다.

허정구 회장의 3남 광수(75·미 스탠퍼드대 대학원 졸업)씨는 삼양인터내셔널 회장으로, 삼양통상과 나이키의 합작사였던 한국나이키 대표이사를 맡기도 했다. 그의 아들 서홍(44)씨는 지주사인 ㈜GS의 전무로 근무하고 있다.

허광수 회장은 아시아·태평양 골프연맹 부회장, 영국 로열앤드에인션트 골프클럽 정회원으로 골프와 인연이 깊으며, 고려대 아이스하키 대표선수를 지내기도 했다.

효주의 차남 학구(작고)씨는 정화금속 창업주이며, 4남 신구(작고)씨는 GS리테일 명예회장을 지냈다. 그의 장남 경수(64)씨는 코스모그룹 회장, 차남 연수(60)씨는 GS리테일 부회장이다.

효주의 5남 완구(작고)씨는 승산 회장을 역임했으며, 6남 승효(77)씨는 알토 회장, 7남 승표(75)씨는 피플웍스 회장, 8남 승조(71)씨는 GS리테일 고문 겸 일주학술문화재단 이사장이다.

내가 본 GS그룹과 허씨 가문

‘和의 정신’이 키운 재계의 대들보

서경석 GS그룹 고문

‘화(和)’는 화목하고 온화한 의미로 서로 뜻이 맞아 사이 좋은 상태가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GS그룹의 허씨 문중은 바로 이 ‘화’의 정신을 가지고 400년 이상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화합해왔다. ‘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번영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허씨 가문은 우리나라 최대 기업인 삼성그룹의 창업에 장손인 허정구 회장이 참여하여 일조를 했고, 또한 글로벌 기업인 LG그룹의 창업에도 3남인 허준구 회장이 창업 동지로 참여함으로써 LG그룹을 성장시키는 발판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LG그룹과 동업자로 오랜 세월을 동행하였으나 어떤 잡음도 일으키지 않고 ‘아름다운 분리, 독립’을 모두가 감탄할 정도로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다. 그것은 바로 허씨 문중에 400년간 도도하게 흘러내려온 ‘화’의 철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예기(禮記)’에 나오는 ‘가르치고 배우면서 더불어 성장한다’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GS그룹을 이끄는 김해 허씨 가문은 사업을 추진함에 있어 손위와 손아래의 차별 없이 개개인의 의견이 충분히 개진되는 열린 문화도 키워나갔다. 이 역시 ‘화’의 정신으로 번영한 셈이다. ‘화’의 정신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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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 근현대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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