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창립 17주년을 맞은 GS그룹은 재계 8위의 기업군으로 급성장했다. 반세기를 넘는 LG와의 동반자 관계를 접고 2004년 7월 GS홀딩스 설립, 이듬해 3월 새로운 기업이미지 선포 등 GS그룹의 성공적인 연착륙을 두루 확인시킨 후 성장 가도를 달려왔다. GS그룹은 현재 지주회사인 ㈜GS와 GS에너지, GS칼텍스, GS리테일, GS건설 등 주요 자회사와 계열사를 포함해 79개 기업을 거느리고 있다.
GS그룹의 효시인 효주(曉洲) 허만정(許萬正)은 1897년 11월 24일 경남 진주시 지수면 승내리에서 지신정(止愼亭) 허준(許駿)과 함안 조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허준은 300석지기의 중농이었다. 허준이 그만한 부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굶주림을 참아가며 바느질해서 재산을 한 푼 두 푼 늘려나간 어머니의 노력 덕분이었다. 허준은 늘 어머니의 고생을 떠올리며 자신의 옷이 남루해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농토에 나갈 때에도 맨발로 절반쯤 걸어가서야 신을 신었고, 돌아올 때도 신발을 신고 오다가 절반쯤에서 다시 신을 벗어 들고 맨발로 집까지 걸어올 정도로 물건을 아꼈다.
그러나 허준은 집에 손님이 오면 솥다리를 걸어 놓고 음식을 잘 차려서 대접했다. 손님이 실컷 먹고 돌아가면 남은 음식을 가리키며 “이 음식은 저녁때 내가 먹겠다”고 말했다. 그만큼 근검절약했다는 일화다. 이리하여 허준은 2만석의 대농이 되었고, 매일 이른 아침 밥을 지어놓고 찾아오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밥을 먹일 만큼 인심이 후했다. 농사짓던 유림 허준은 42세에 과거에 응시하여 진사에 급제하고 통정대부인 정3품 당상관에 올랐다. 이후 비서원 승지를 역임하였다. 1894년 조선 팔도에 큰 기근이 들자 허준은 창고에 쌓아둔 수백 섬의 곡식을 풀어 나눠 주었다. 기근이 어느 정도 수습되자 마을 사람들이 허준의 공덕비를 세웠다. 그러자 허준은 “저들이 비록 덕을 기리는 것이라 하나 나는 명예를 구하는 것이 아니니 사람들이 이토록 정황을 모른단 말인가”라고 말하며 마을 사람들이 만든 공덕비를 땅속에 묻어 버렸다.
그의 아들 효주는 1919년 서울에서 3·1만세운동을 경험하고 난 뒤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그는 부친에게 건의하여 거액을 희사받고 동지 수십 명을 규합하여 이듬해 진주일신고등보통학교 설립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일제 총독부의 방해로 남자 고보 설립에 실패하자 다시 여자 고보 설립을 추진하여 1925년 진주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진주여고의 전신)를 개교하였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가 이 진주여고 출신이다.
그는 또 일본 도쿄를 방문하여 유학생회에 자금을 기탁하였고, 백산상회 발기인으로 상하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냈다. 백산상회는 표면상으로는 쌀과 옷감, 생선 등을 판매하는 점포였지만, 실상은 상하이임정의 독립자금을 대던 자금조달 본부였다. 백산상회에는 모두 32명의 주주가 참여하였는데 경주 최부잣집의 최준이 2000주, 설립자인 백산 안희재가 2000주 등을 갖고 있었다. 효주는 1500주를 내어 창립멤버가 되었다. 또한 효주는 백정들의 인권을 향상시키기 위한 형평사운동을 지원하였으며, 1932년 남해 충렬사 중건에도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