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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8호] 2021.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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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혁명의 서막]빅브라더에 맞선 사이퍼 펑크운동, 블록체인 역사를 열다

홍익희  세종대 대우교수·‘월가이야기’ 저자  2021-07-29 오전 10:00:27

▲ 유대인 암호학자인 데이비드 차움. 사이퍼펑크운동을 촉발하며 블록체인 개발의 길을 열었다. photo Bitcoinist.com
1960년대 중반 들어 미국은 베트남전쟁과 중동전쟁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전쟁의 계속된 실패와 강제징집으로 불안한 젊은이들이 희망을 잃고 실의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징집을 거부하며 반전운동을 벌였다. 시위가 점점 격해져 징집영장 불태우기, 전쟁규탄 농성까지 벌어지자 미국은 벌집 쑤신 듯 소란스러워졌다. 더 나아가 기존 사회질서를 부정하고,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자며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젊은이들도 출현했다. 도덕과 이성보다는 자연스러운 감성, 정신적 가치에 무게를 두며, 인간성을 중시하고, 물질문명을 부정하며 즐거움을 추구하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반체제, 반문화 운동인 ‘히피’이다.
   
   
   히피의 분파 ‘사이퍼펑크’ 운동
   
   그 뒤 시간이 흘러 히피는 사실상 와해되어갔으나 히피의 혁신적 분파로 볼 수 있는 사이퍼펑크운동이 일어났다. 이전의 반체제 히피운동은 사회적 이유에서 비롯되었지만 사이퍼펑크운동은 개인의 자유에 초점을 맞추고 정부로부터 개인의 사생활, 곧 ‘프라이버시 보호’를 극도로 중요시했다. 이 운동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자.
   
   미국은 1953년 이란을 시작으로 2001년 아프가니스탄, 2003년 이라크까지 15차례나 반미 정권을 실각시켰다. 이 가운데 9차례는 직접 군대를 동원해 무력을 사용했고, 나머지 6차례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쿠데타를 조장하거나 반군을 지원하여 개입했다. 냉전시대에는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미 CIA가 암암리에 움직였다.
   
   CIA는 1953년 이란을 정조준했다. 쿠데타를 지원해 무하마드 모사데크 총리를 실각시키고 친미 성향의 팔레비 왕을 복귀시켰다. 이듬해에는 과테말라가 목표였다. CIA가 배후조종한 쿠데타군에 의해 과테말라의 민족주의자 대통령 하코보 아르벤스가 축출되었다. 1960년에는 아프리카 콩고 차례였다. 소련의 지원을 받던 콩고의 파트리스 루뭄바 초대 총리가 미국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로 암살됐다.
   
   
   반미 정권 감시하던 CIA와 암호 기술
   
   특히 미국은 자국의 뒷마당인 중남미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발붙일 수 없도록 반미 지도자들을 철저히 제거했다. 1954년에 과테말라 대통령을 쫓아낸 후 1973년에는 칠레의 사회주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가 CIA가 지원하는 쿠데타군에 맞서 싸우다 자결했다. 미국은 CIA 개입으로도 해결되지 않으면, 무력침공도 주저하지 않았다. 1961년 쿠바 침공은 실패했지만 이후 경제제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쿠바식 사회주의를 따라 하던 후안 보슈 도미니카공화국 대통령은 1965년 미국 침공에 의해 실각했다. 그 뒤 18년 후 좌파 지도자가 총리로 등장하자 미국은 다시 침공해 정권을 무너뜨렸다. 1989년에는 파나마를 침공해 노리에가 장군을 마약밀매 혐의로 붙잡아 미국 법정에 세웠다. 이러한 과정들 속에서 CIA는 반미 지도자들의 전화 도청과 편지, 이메일 무단검열을 통해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동정을 파악했다.
   
   암호화 기술은 원래 정부와 군의 독점물이었다. 1975년 미국 정부기관 국립표준기술원이 새로운 암호체계의 연구용역을 IBM에 맡겨 만든 암호체계 DES(Data Encrytion Standard)가 공개되었다. 이것이 민간이 처음 접한 최초의 고급 암호화 기술이었다. 당시 미국 정부 주도로 만들어진 새로운 암호체계 DES는 발표 당시부터 의혹이 뒤따랐다. IBM의 원안대로 공개되지 않고 마지막에 정부기관이 일부를 수정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의혹이 불거졌다. 이 암호체계에는 암호화를 우회하는 뒷문(백도어)이 설치되어 정부기관이 쉽게 내용을 볼 수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결국 이 알고리즘은 나중에 보안이 보강된 암호체계로 대체된다.
   
   과거 미국 정부는 전화와 우편물을 모두 감시하기 위해 특정 전화번호의 송수신을 모두 기록하는 ‘펜 레지스터(Pen Register)’라는 기기를 운영했다. 정부기관이 요청하면 우편배달부가 특정인의 우편 내역을 모두 기록해 제공하는 ‘메일 커버(Mail Cover)’도 합법이었다. 이후 인터넷이 발전하자 미국 정부의 전자감시 활동에 의한 개인의 프라이버시 침해 사례는 늘어났다.
   
   
   미국 정부가 운영하던 ‘펜 레지스터’
   
   일례로 1993년 클린턴 행정부 시절, 미국 국가안전보장국(NSA)은 백도어 코드가 심어진 클리퍼 칩을 개발했다. 클리퍼 칩은 암호화 알고리즘을 담은 집적회로(IC)인데, 미국 NSA는 각 통신사에 이 칩을 전화기 등 모든 통신장비에 설치하도록 권했다. 이 칩이 설치되면 정부가 국민의 통화 내용을 감청할 수 있게 된다. 명분은 테러방지 등을 위한 국가안보 제고였다. 실리콘밸리 기업들과 시민단체들은 정부의 이런 구상에 격렬히 반대했다. 결국 이 계획은 칩 자체의 결함과 헌법에 반하는 위헌성 때문에 1996년 폐기되었다. 당시 클리퍼 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NSA는 무차별 도·감청을 하다 2013년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로 크게 곤욕을 치렀다.
   
   1970년대 미국 경제는 암울했다. 1971년 닉슨쇼크로 달러와 금과의 고리가 떨어져 나가자 금값은 온스당 35달러에서 120달러로 폭등했고 달러가치가 급락했다. 달러가치 하락은 수입물가 인상으로 이어졌다. 더구나 미국은 1960년대 중반부터 베트남전쟁 참전 등 무리한 팽창정책으로 재정적자도 두 배로 늘어나 달러 발행이 많아졌다. 이로 인해 발생한 인플레이션은 만성화되었다. 1972~1973년 미국의 인플레이션은 3.4%에서 9.6%로 3배나 폭등한 후 1974년에는 11%로 뛰어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 이 기간 주가는 43%나 폭락했다.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근로자들의 임금인상을 통제했다. 하지만 같은 기간 부동산 등 실물자산은 크게 상승했다.
   
   게다가 휘청거리는 경제에 1, 2차 오일쇼크는 치명타였다. 1973년 1차 오일쇼크로 배럴당 3달러였던 유가는 단숨에 4배로 치솟더니 1978~1980년 2차 오일쇼크를 거치면서 24달러까지 8배나 올랐다. 이로 인해 세 차례나 경기침체를 맞으며 그 와중에 물가가 뛰는 전형적인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져들었다. 1979년 인플레이션율은 13.3%에 달했다. 연준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20% 이상으로 올렸다. 그 통에 기업 도산이 늘어나 실업률은 9%까지 치솟았다. 이러한 총체적 난국에서도 물가인상과 임금동결 그리고 실업의 고통은 서민들의 몫이었고, 부호들은 자신의 금융자산이나 인플레이션을 활용해 대출을 받아 폭락한 주식을 헐값에 매집하고, 부동산 등 실물자산을 사들여 부를 늘려갔다.
   
   많은 사람이 스태그플레이션의 원인을 오일쇼크에서 찾았지만 경제학자들의 주장은 달랐다. 하이에크는 원인을 그간 케인스 이론에 바탕을 둔 정부의 재정확대와 방만한 통화정책에 있다고 보았다. 밀턴 프리드먼 역시 과도한 통화완화 정책이 거대한 인플레이션을 촉발했다고 평했다. 실제로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미국 통화증가율은 1970~1980년에 매년 11%씩 증가했다. 이 기간 동안 땀흘려 일해 돈을 버는 근로소득 증가율은 임금동결과 최소한의 임금인상으로 미미한 반면, 돈이 돈을 불리는 금융자산 증가율은 연 15% 내외로 급속하게 늘었다.
   
   
▲ 미국 정부가 전화와 우편물을 감시하기 위해 특정 전화번호의 송수신을 모두 기록한 ‘펜 레지스터’. photo 위키피디아

   천재 암호학자 데이비드 차움
   
   이런 상황에서 한 유대인 암호학자의 깊은 고뇌로부터 가상자산(암호화폐)이 잉태됐다. 전산학자이자 암호학자이며, 컴퓨터공학 박사이자 경영학 박사인 데이비드 차움이 등장하기 전까진 실용적인 전자화폐는 개발되지 않았다. 1955년생인 차움은 천재였다. 이미 고등학교 때 인근 대학(UCLA)에 가서 강의를 들었다. 이후 UCLA에 입학한 차움은 방만하게 운영되는 현행 통화금융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특히 유대 세력이 주도하는 미국의 통화금융 정책은 미국과 세계 경제를 위한다기보다 그들의 이익을 위해 복무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방만한 통화 정책의 결과물인 인플레이션의 고통은 서민들의 몫인 반면에 그들과 그들의 추종자들, 곧 부호들은 주식과 부동산, 금융 투기로 엄청난 부를 늘려가는 현상을 목도했다. 이러한 부조리와 빈부격차의 확대는 기득세력의 통화금융 시스템이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한 본질적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는 CIA에 의한 감시와 전화 도청으로 1973년 칠레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걸 알고는 쇼크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그는 개인 프라이버시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감시와 검열, 도청으로부터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일이 앞으로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차움은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서는 민간인들 스스로가 암호학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컴퓨터공학과 전산학을 공부하던 그는 이때부터 암호학 공부에 매진한다. 그 무렵 정부와 거대기관에 의한 개인 프라이버시 침해에 환멸을 느꼈던 사람들에게 정부의 암호화 기술 개방은 큰 의미가 있었다. 이를 활용해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데이비드 차움이었다.
   
   차움은 자기의 전공인 컴퓨터공학에 암호학을 접목했다. 그는 버클리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1979년 24살 때 암호학에 있어 중요한 신개념 중 하나를 개발했다. 암호통신에서 평문을 암호문으로, 암호문을 평문으로 바꾸는 과정에 필요한 기술이 암호 알고리즘인데 이 알고리즘은 공개되어 있다. 대신 알고리즘을 만들거나 풀 때 필요한 비밀정보가 ‘키(Key)’다. 양측이 안전하게 통신하기 위해서는 이 ‘비밀 키’를 공유하는 것이 핵심이다. 차움은 비밀 키 공유의 전신인 ‘부분 키’로 키를 분할하는 메커니즘을 개발했다.
   
   차움은 1981년 26살에 UC버클리에서 컴퓨터공학 박사와 경영학 박사를 취득함과 동시에 뉴욕대 경영대학원과 UC샌타바버라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금융자본주의의 통화 남발로 소득불평등과 빈부격차 확대가 가져올 미래에 대해 고민했다. 또 컴퓨터가 대중화되지 않았던 그때부터 ‘인터넷’의 미래에 대해서도 걱정했다. 그는 20~30년 후를 내다보며 인터넷과 전자상거래 발달로 발생할 사회문제, 곧 정부와 거대기업과 기관들이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추적하는 상황이 되면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다고 보았다.
   
   
   차움이 조직한 ‘국제암호연구회’
   
   차움은 이러한 병폐를 막을 암호화 기술 개발을 위해서는 암호학자들이 뭉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암호학자들을 모아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함께 연구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이를 실행에 옮겨 암호학 정보를 공유하고, 정부 규제에 공동 대응하고, 암호학 연구를 심도 있게 협업 연구하기 위해 ‘국제암호연구학회’를 조직해 이끌었다. 그는 유대인답게 이들과 함께 어울려 토론하며 협동 연구를 즐겼다. 차움은 그 뒤 연구에 매진해, 사이퍼펑크운동이 시작되기 전 이미 17건의 특허를 냈다. 그는 연구 활동 못지않게 조직 구성에도 정력적이었다. 차움은 바다 건너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수학연구소에도 암호연구그룹을 만들었다.
   
   차움은 우선 프라이버시가 침해당하지 않으려면 익명으로 서신을 주고받을 수 있는 통신이 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암호학을 컴퓨터공학에 적용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차움은 1981년 ‘추적 불가 전자메일, 주소와 디지털 익명성’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익명 통신’ 연구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당시 그가 발표한 논문에서 나오는 개념들은 다양한 프라이버시 보호 기술의 기반이 되어 현재까지도 주요 암호화폐들에 활용되고 있다. 이후 암호학자들은 익명 통신으로 서로 정보를 교환했다. 또 차움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종류의 익명 인증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차움은 추적 불가능한 통신만큼이나 중요한 게 개인 계좌 보호라고 생각했다. 곧 개인 계좌의 거래 내용이 추적당하지 않아야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지켜진다고 보았다. 그는 인터넷으로 정보가 전달되듯이 가치도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추적 불가능한 제한된 수량의 디지털화폐를 만든다면 현행 부조리한 통화금융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들을 바탕으로 차움은 1982년 인터넷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디지털화폐’ 개념을 창안했다. 당시 아무도 이에 대해 생각지 못할 때였다. 세계 최초로 추적 불가능한 가상자산 개념이 탄생한 것이다.
   
   차움은 1982년 한 신문에 ‘익명성 디지털화폐’ 아이디어를 실었다. 그는 세계 최초의 가상자산 ‘이캐시’를 제안하며 ‘은닉서명(Blind Signature)’이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곧 거래당사자의 신분과 메시지 내용을 노출시키지 않고 결제 사실을 검증하는 ‘은닉서명’이라는 방식을 통한 익명성 디지털화폐 프로그램을 제안한 것이다. ‘은닉서명’은 웹 보안에 쓰이는 알고리즘을 확장한 것으로 거래당사자 정보를 암호화해 추적하지 못하게 하면서도 거래의 완결성을 확보한 기술이다. 이캐시 백서는 같은 해에 오픈소스로 작성되어 개방했기 때문에 비트코인 개발에도 이 개념이 적용되었다. 차움은 이를 디지털화폐뿐 아니라 전자투표 등 여러 분야에 적용하여 사용자의 익명성과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가 제시한 ‘랜덤 샘플 전자투표’는 향후 직접민주주의 발전에 유용하게 쓰일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가 개발한 전자서명 기술과 암호학 관련 개념들은 암호화폐의 근간을 이루는 기술로 발전했다.
   
   차움은 유대인 암호학자들과의 협업을 즐겼다. 원래 유대인들은 혼자 공부하거나 연구하는 것보다 동료들과 어울려 질문하고 토론하면서 공부하고 연구하는 걸 더 즐긴다. 이는 유대인들 특유의 독특한 종교 교육인 탈무드 공부법으로부터 기인했다. 탈무드 공부는 늘 친구와 함께 하도록 되어 있다.
   
   
   ‘신분 없는 보안: 빅브라더를 이기는 방법’
   
   차움은 그가 구상하고 있는 디지털화폐 ‘이캐시’가 상용화하려면 먼저 디지털화폐 입출금 기기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1988년 유대인 과학자들과 함께 은닉서명을 통한 ‘오프라인 전자현금 시스템’을 개발했다. 알고리즘 게임이론 권위자인 유대인 컴퓨터과학자 아모스 피아트와 이스라엘 바이츠만(와이즈만)연구소 교수 모니 나오르와 공동연구를 통해 만든 이 시스템은 나중에 차움이 암스테르담에 설립한 회사(Digicash)를 통해 1995년부터 1998년까지 미국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마크트웨인은행에서 소액 지불시스템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차움이 1985년에 발표한 ‘신분 없는 보안: 빅브라더를 이기는 방법’ 논문은 사이퍼펑크운동을 촉발시켰다. 이후 미국에는 전화 도청과 편지, 이메일 무단검열 등 개인 프라이버시 침해에 대해 극력 반발하는 세력이 생겨났다. 암호학자들이 주도하는 사이퍼펑크운동가들이었다. 사이퍼펑크운동은 1990년대 전후 인터넷 대중화와 함께 이루어졌다. 주 활동 지역은 IT혁명 근거지인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이었다. ‘사이퍼펑크(cypherpunk)’는 암호(cipher)에 저항을 상징하는 펑크(punk)를 붙여 만든 합성어이다. 기밀문서 폭로 전문미디어 ‘위키리크스(Wikileaks)’ 편집장 줄리안 어산지는 그의 저서 ‘사이퍼펑크’에서 “사이퍼펑크란 대규모 감시와 검열에 맞서 자유를 지키기 위한 방안으로 강력한 암호기술을 활용하는 사람을 말한다”고 정의했다.
   
   유대인 암호학자들이 주축이 된 블록체인과 가상자산 개발 역사는 사이퍼펑크운동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사이퍼펑크들은 정보당국의 검열을 피해 주로 ‘크립토그래피 메일링 리스트’를 통해 서로 소통하고 활동했다. 사토시 나카모토가 비트코인 개념을 공개한 방식도 이 메일링 리스트를 통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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