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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제
[2669호] 2021.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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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가]한국 섬유산업의 역사, 부방그룹 창업주 이원갑

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 근현대편 저자  2021-08-03 오전 9:50:27


   묵민 이원갑
   
   1914년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서 태어남
   1926년 양동보통학교 졸업
   1931년 중앙고보 졸업
   1949년 부산방직공사 인수
   1964년 부산방직공업으로 개칭
   1976년 부산 상공회의소 부회장
   1989년 7월 13일 별세
   

   묵민(黙民) 이원갑(李源甲)은 부방그룹 창업주로 1914년 2월 20일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서 부친 이석면과 모친 조현고 사이의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묵민이란 아호는 생전에 절친했던 이동욱 동아일보 주필이 지어주었다고 한다.
   
   일제의 귀속재산인 섬유회사 부산방직에서 출발한 부방그룹은 사양산업의 그늘에서 벗어나 전기밥솥 쿠첸을 만드는 전기기자재 산업과 선박평형수(船舶平衡水)를 다루는 첨단 환경산업으로 환골탈태했다. 특히 선박평형수 기업인 테크로스는 2015년 부산공장을 준공하고, 2019년 LG전자로부터 관련 환경서비스를 인수하면서, 세계 최대의 선박평형수 제조시설을 갖춘 세계점유율(17%) 1위의 강소기업으로 부상하였다. 선박평형수는 배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배 밑에 담는 물로, 해운업계에서는 비용절감을 위해 오염수로 채우고 이를 바다에 버려 커다란 오염원이 되어왔으나 근래에는 국제해사기구가 청정수로 선박평형수를 쓰도록 엄격히 관리하면서 첨단 환경산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묵민이 회재(晦齋)의 14대손으로 태어난 양동리는 유교식 양반마을을 대표하는 곳으로, 1992년 영국의 찰스 황태자가 다녀가 세계적 명소로 부각되었고, 이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하였다. 이곳은 조선조 5현의 한 분인 회재 이언적(李彦迪)의 출생지이며, 그의 외숙인 우재(愚齋)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회재는 여주(麗州) 이씨이고, 우재는 월성 손씨이다. 우재가 출생한 월성 손씨 대종가 서백당(西白堂)에서 외손인 회재가 태어났으며, 두 학자를 키워낸 마을로도 유명하지만 조선조 500년 국반(國班)의 위신을 지켜온 마을답게 마을 안에는 16개에 달하는 보물 또는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건물이 위치하여 운치를 더하고 있다. 특히 오늘날에도 월성 손씨 대종가와 여주 이씨 대종가에는 양반 대가의 품위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어, 1982년 방한한 세계 굴지의 인류학 석학 레비스트로스는 서백당에서 2박을 하면서 칠첩반상가의 정식식사를 대접받았고 유교적 생활의 일단을 엿보기도 하였다.
   
   
   인촌 김성수를 멘토로
   
   묵민은 1926년 양동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 중앙고보로 진학한다. 최두선 교장(국무총리 역임) 시절 담임선생님은 변영태씨(외무부 장관 역임), 당시 교우로는 윤택중 전 문교부 장관, 김재열씨(김병로 전 대법원장 차남, 김종인 전 국민의힘 대표 선친) 등이 꼽힌다. 묵민의 장남 이동건(李東建) 부방그룹 회장의 말이다.
   
   “중앙고보 시절 인촌 김성수 선생의 사랑을 듬뿍 받으셨다고 해요. 저도 어머니 심부름으로 계동의 인촌 선생 거처를 찾아 우리 집에서 담근 김치며 된장을 이아주 사모님께 갖다드려 귀염을 받기도 했지요. 그런 영향 때문인지 저도 인촌 선생님처럼 살려고 힘써왔습니다. 그분의 공선사후(公先私後), 신의일관(信義一貫) 정신을 제 인생의 지침으로 삼아왔지요. 인생살이에서 난관에 봉착할 때면 저는 주저 없이 인촌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돌아보면 좋은 방안이 떠오르고 늘 든든한 등불이 됩니다. 인촌 선생님이 아호를 그분의 고향에서 따오신 대로 저도 제가 태어난 동네 이름대로 양촌(良村)으로 지었습니다.”
   
   묵민은 일본대학 법과를 중퇴하고 귀국하여 금융기관에 몸을 담았다. 광복 이후에는 동해철공, 경주흥업, 조선제마방 등을 경영하였고, 이런 경영 실적을 인정받아 1953년 귀속사업체인 제마방적을 불하받았다. 제마방적은 원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세운 기업이었다. 일본 도쿄에 본점을 둔 제국제마(帝國製麻) 부산제포공장이 그것이며, 1934년에 일본 자본에 의해 설립되었다.
   
   당시의 위치는 부산진구 가야구(현 가야 유림아파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기업들은 광복 직후 귀속사업체로 관리되다가 한국인에게 불하되었다. 대체로 관리인들이 불하를 받던 당시 상황에 비춰 볼 때 묵민은 불하를 받기 전 제국제마의 관리인으로 있었던 것 같다.
   
   제국제마를 불하받은 묵민은 1949년 회사 이름을 부산방직공사로 바꿨다. 이어 1953년에 자본금 5억환(당시 화폐단위)으로 법인체를 설립하여 ㈜부산방직공사로 개칭하였다.
   
   광복 직후 귀속사업체로 있다가 불하된 기업의 경우 부침이 매우 심하였다. 중도에 없어진 기업도 많았으나 부산방직공사는 성공적으로 기업가치를 유지하고 성장하였다. 사장인 묵민과 종업원들이 합심하여 열심히 노력한 덕분이었다. 제국제마는 일본인이 설립했지만 근로자들 중에는 한국인이 많았다. 이들은 부산방직공사로 된 뒤에도 그대로 머물면서 일을 하고 기술을 발전시켰다.
   
   
   노사 하나로 회사를 살리다
   
   귀속사업체들이 경영인과 종업원들 사이의 불화로 경영난을 겪었던 사례가 비일비재하였던 상황에서 부산방직공사는 노사가 일체를 이루어 회사를 살려나갔다. 이 회사가 다른 귀속사업체들과는 달리 회사설립일을 불하받은 날로부터 설정하지 않고, 원래 일본인이 세웠던 연월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하겠다.
   
   부산의 귀속 섬유업체로서 전국적인 시설 규모를 자랑했던 조선방직과 조선견직 등도 오래 버티지 못하는 상황에서 부산방직공사가 이처럼 꿋꿋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저변에는 설립자인 묵민의 경영철학이 비팀목이 되었다. 묵민은 ‘신뢰와 투명경영’의 철학을 가지고 경영하였다. 단 한 번도 가공비용이나 인건비를 미룬 적이 없었다. 묵민이 사장으로 있는 동안 단 한 차례의 물품지급 지불연장이나 노사분규도 없었다. 회사에서는 담당자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소신껏 일하게 하였다.
   
   이러한 투철한 경영은 숱한 화제를 낳으면서 사회적 신뢰를 쌓아갔다. 정도를 걷는 경영이 외부에 널리 알려지면서 은행과 거래처들도 ‘부산방직공사는 절대로 부도가 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심지어 부산방직공사에 소속된 회사 관계자의 지장을 찍은 어음이 재래시장과 사채시장에서 지불수단으로 돌아다니면서 다른 기업들이 발행한 어음보다 인기가 높을 정도로 부산 지역에서 신용을 확보하였다.
   
   묵민은 선비정신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근면과 검소가 그의 생활신조였는데, 이러한 정신은 경영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묵민은 기업 규모가 너무 크면 좋은 경영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기업이 너무 커지면 한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알맞은 경영을 펼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양이 아닌 질 위주의 경영을 도모하였다. 묵민은 항상 무리하게 기업을 키우려 하지 말고 한 우물을 파면서 잘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처럼 무리하지 않는 경영방식 때문에 부산방직공업의 외형은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크게 성장하지 않았다. 창립 50주년이었던 1994년에도 종업원 420명에 매출 300억원 규모였는데 이후 종업원 규모는 오히려 더 작아졌다.
   
   
▲ 1 1961년 연세대학교 졸업식장에서 선친 고(故) 이원갑 회장과 이동건 회장.
2 1967년 6월 25일 이동건 회장과 정영자 여사 결혼식에서 선친과 함께.
3 1994년 5월 25일 부산방직공업의 창립 60주년 및 공장 신축 이전 기념식.
4 2009년 1월 21일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국제로타리협의회에서 빌 게이츠 의장(왼쪽)이 2억5500만달러를 소아마비 박멸 기부금으로 기부한다고 선언하기에 앞서 이동건 회장이 빌 게이츠 등 국제로타리 지도자들과 함께 담소를 하고 있다. photo 부방그룹

   미국 유학간 아들에 SOS!
   
   그러나 생산시설과 연구개발 투자는 과감했다. 꾸준히 시설을 현대화하고 제품을 개발하였다. 8·15광복과 6·25전쟁을 전후해서는 홍콩, 마카오 등지에서 밀수되던 파일 오바지(털코트)를 개발하여 외화 절약에 기여하였다. 캐시미어 앙고라 특수지, 특수모 이중지 등 고부가가치 제품을 잇달아 개발하였다. 1962년에는 모직물 가공설비를 확충하여 방모직물 일관 작업을 시작하였다. 기술개발과 시설개체를 꾸준히 한 뒤 1964년에는 부산방직공업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회사 확장으로 부채가 늘어났다. 묵민은 미국에 유학 가서 막 자리 잡으려던 장남 양촌 이동건에게 급거 귀국을 명한다. 귀국해 수습에 나선 양촌은 부친을 포함한 4인이 회사 지분을 25%씩 분점하고 있는 암담한 사실을 확인했다. 양촌은 단계적으로 빚을 갚아가기로 하고 여러 해에 걸쳐 한 명 한 명 지분을 정리해 빚더미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유학에서 돌아온 후 15년간 미국행을 하지 않고 노심초사한 결과였다.
   
   묵민은 기술개발의 성과로 1975년에 국제양모사무국 울마크 사용권을 획득하였다. 1984년에는 부산방직공업 마산공장(방모기 5대)을 설립하였다. 아울러 묵민은 1976년 부산상공회의소 부회장에 선출되었으며, 방모협동조합 이사도 맡았다. 그러면서 2세 승계와 본사 이전을 준비하였다. 1981년 묵민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회장에 취임하고 경영은 장남인 이동건 사장에게 맡겼다. 이때 부산방직공업 계열 기업으로는 삼신상사와 국제전열 등이 있었다. 묵민은 1984년 조세의 날 기념식에서 석탑산업훈장을 받았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도 사하구로 본사 이전을 독려하면서 아들의 경영을 지켜보던 묵민은 1989년 7월 13일 별세, 경주시 강동면 안계리 선영에 안장됐다.
   
   묵민은 정임순(작고)씨와 사이에 남매를 두었다. 장남 동건(83·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씨는 정영자(76·이화여대 생활미술과 졸업)씨와의 사이에 2남2녀를 두었다. 양촌의 장남 대희(50·미 클라크대 경영학과 졸업)씨는 전 부방 부회장으로 고주희(46)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남 중희(47·미 컬럼비아대 MBA)씨는 부방 전략기획담당 사장으로 이의진(42)씨와 결혼하였다.
   
   양촌의 장녀 희원(53·조지워싱턴대 박물관학 석사)씨는 스위스그랜드호텔 사장 이윤기(54·이우영 스위스그랜드호텔 회장 아들)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녀 희정(52·미 컬럼비아대 음악교육학 박사)씨는 허세홍(52·허동수 GS칼텍스 명예회장의 아들) GS칼텍스 사장과 결혼했다.
   
   “선친께서는 용두사미로 끝내는 것을 아주 싫어하셨지요. 특히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늘 강조하셨어요. 당신께서 성격이 급하시니까 ‘나를 닮지 말고 유하게 살라’고 하셨어요. 제 중학 시절에만 해도 TV는 없었고, 제 친구가 제니스라디오를 훔쳐갔어요. 선친께서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발설하지 않았지요. 나중에 대학 때 그 친구가 잘못을 사과하더군요.”(장남 이동건 회장)
   
   묵민은 자신이 부회장을 맡았던 부산상공회의소 사무국 직원들을 위해 뜻있는 일을 하라는 유지를 남기고 작고했다. 그 뜻을 받들어 유가족들은 당시 장례식을 치르면서 모은 부의금 5000만원을 부산상공회의소에 기탁하였다. 상당한 기금이 조성됐지만 당시에는 구체적인 기금 운영방안을 찾지 못하다가, 묵민의 손녀인 희정씨가 1999년에 2300만원을 추가 기탁하면서 묵민장학회가 설립되었다. 이후 아들인 이동건 회장이 2002년에 2350만원을 추가 기탁하는 등 보완 노력을 통해 2010년에는 2억4000여만원의 기금이 적립되었다.
   
   1993년 부방은 사하구 신평 공장을 신축 완공하고 본사를 사하로 이전하였다. 묵민의 오랜 노력이 마침내 사하에서 결실을 본 것이다. 부방은 1995년에 코스닥에 등록하였으며, 장외시장 종목 중 주당 순이익이 가장 좋은 종목으로 꼽히기도 하였다.
   
   부방은 모직물 직조업을 주요 업종으로 하여 순모와 캐시미어, 알파카, 앙고라, 모헤어, 카멜 등의 특수 모직물 및 기타 소모, 방모 직물을 생산하고 있다. ‘비비 퀀텍스’는 오랜 전통의 상표이다. 1996년부터는 의류 사업부를 신설하여 고품질 의류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의류 부문은 방글라데시 등 현지 임가공을 통해 남성복과 여성복, 니트, 다운재킷 등을 생산하여 국내 판매 및 일본 수출을 병행하고 있다.
   
   
   작지만 알차게
   
   섬유산업은 전성기를 지나 사양산업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 그런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부방은 모직물 제조의 한길을 걸어오면서 중소기업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다른 것을 욕심내지 않고 작지만 알차게 일을 해야 한다는 묵민의 경영 철학 때문일 것이다. 부산에서 설립된 가장 오래된 기업의 하나로서 부방은 앞으로 100년 기업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한길을 걸어야 한다는 묵민의 철학은 많은 부산 기업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선친의 이런 창업정신을 우리 후예들은 굳건히 이어갈 것입니다. 따라서 시대 추세에 맞는 업종 선택을 하면서도 창업 당시의 향토기업으로서의 모습은 100년 기업으로 남겨질 것입니다.”(이동건 회장)
   
   부방가는 이러한 기업경영 정신을 기업봉사로 이끌어가고 있다. 묵민이 로타리클럽 부산·경남지역 총재를 지낸 데 이어, 아들 양촌은 국제로타리클럽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이어 손자 대희씨까지 3대가 로타리클럽 회장직을 맡는 진기록을 남기고 있다.
   

   내가 본 부방가
   3대가 국제로타리 활동, 노블레스오블리주의 본보기
   

유장희 경제학자·전 동반성장위원장

주간조선에서 ‘한국의 명가’의 이번 순서로 이동건 회장 가문을 선정했다고 해서 나는 쾌재를 불렀다.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이만큼 반듯하고 모범적인 집안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일찍이 광복 후 해방공간에 선대 이원갑 회장께서 낙후된 한국의 섬유산업을 과감히 일으키시고 이를 수출산업으로까지 키웠으며, 나아가 우리나라 각종 의류산업에 원단을 제공하는 산업의 기초를 다지신 분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사업을 온전히 이어받아 잘 육성하였으며 방직산업을 기반으로 하여 가전산업, 환경산업 등으로 회사를 발전시킨 2대 이동건 회장, 그 뒤를 이어 열심히 기업을 발전시키고 있는 3대 이대희 부회장·이중희 사장 등이 기업계에서 타의 모범이 되는 집안이라고 생각한다.
   
   이 집안의 업적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이동건 회장이 미국 시카고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로타리 회장을 역임했다는 점이다. 110년의 역사와 전 세계 120만명이 넘는 회원을 거느리고 있는 이 기구는 세계평화, 복지, 보건, 재난구호, 청소년 교육, 환경보전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야에서 눈부신 업적을 남긴 순수 민간 봉사단체이다.
   
   이 세계적 기구를 이끄는 수장에 우리나라 사람이 뽑혔다는 것은 여간 대단한 일이 아니다. 2006년 국제로타리 회장지명위원회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이동건 한국 전 3650지구 총재를 전 세계 회장으로 선임한 것이다. 이 회장은 3년 동안 미국 시카고 본부에 주재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제3세계권 국가의 어린이들을 위해 수많은 교육기관을 세워주고 그들의 건강도 지켜주는 데 눈부신 봉사를 하였다.
   
   이동건 회장은 우리나라가 국격을 부쩍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지금도 후배 로타리인들이 로타리 설립 때의 초심을 잃지 않고 적극 매진하도록, 국내외에 걸쳐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 기업인으로서 당연히 이윤추구가 목적이겠으나 초아(超我)의 봉사를 통해 인류애를 구현하겠다는 이동건 회장 가문이야말로 노블레스오블리주를 실천에 옮긴 좋은 본보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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