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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경제
[2672호] 2021.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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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가]화학섬유 시대 연 DI동일그룹 창업주 서정익

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 근현대편 저자  2021-08-26 오전 8:00:32


   정헌 서정익
   
   1910년 4월 22일 경기도 인천시 청학동에서 태어남
   1927년 배재고보 졸업
   1932년 일본 나고야고등공업학교 방직학과 졸업
   1933년 동양방적 입사
   1955년 동일방직 창업, 대표이사 사장
   1962년 대한방직협회이사장
   1968년 대한화섬 회장
   1973년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별세
   

   정헌(靜軒) 서정익(徐廷翼)은 DI동일그룹 창업주로 한국 최초의 ‘섬유 전문 엔지니어’로 평가받는다. 합섬기술을 개발 정착시킨 이른바 섬유입국(纖維立國)의 주역 중 한 명이다. 그의 아호는 그가 평소 인생의 스승으로 섬겨온 3·1독립운동의 민족지도자인 위창 오세창 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올해로 창립 66년을 맞는 DI동일은 ‘100년 기업’을 지향하면서 사업 다각화를 이뤄나가고 있다. 면방 소재 산업의 수직 계열화를 이룩한 복합섬유업체에서 최근에는 전기차에 필수품인 2차전지 소재 알루미늄을 비롯하여 태양광 유리섬유, 환경 엔지니어링(반도체 배기가스) 등 첨단산업 분야에도 진출했다. 정헌 서정익은 1910년 4월 22일 경기도 인천시 청학동에서 부친 서병훈과 모친 초계 정씨 사이에 2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고조부 서천보는 순조 때 선공감 감역을 지낸 인물. 인천시사에는 정헌을 포함해 조부 서상빈과 부친 서병훈 3대가 ‘인천을 빛낸 인물 100인’으로 실려 있다.
   
   
   부친 뜻 어기고 나고야공대 입학
   
   조부 서상빈은 1889년 개항 초기에 한국 최초의 상인단체이자 상공회의소 전신인 인천신상협회(仁川紳商協會)를 설립해 외국 상인들의 발호 속에서 민족상인을 보호하고 육성하는 애국운동에 앞장섰다. 또 국민의 자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신학문과 영어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해 제녕(濟寧)학교를 설립하여 후진 육성에 전념하기도 했다.
   
   정헌의 부친 서병훈은 동아일보 제2대 인천지국장을 지내면서 일본인 기업주들에게 착취당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동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언론을 통한 배일사상 고취에 힘썼다.
   
   정헌은 1927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집안 어른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얼마 후 나고야고등공업학교(현 나고야공대)에 입학했음을 어른들에게 알렸다. 그의 부친은 투철한 배일사상 때문에 아들의 도일(渡日) 자체를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더욱이 법문학계도 아닌 이공계, 그것도 방직학과란 전공이 못마땅하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귀국을 종용하다가 마침내 용인하게 되었는데, 부친이 누그러진 데는 배일운동 동지 곽상훈(건국 후 국회의장 역임)씨의 설득이 먹혔다고 한다. 곽씨는 자신도 경성고공(서울대 공대 전신)을 중퇴한 미완성 공학도로서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면 많은 과학도, 공학도, 산업인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정헌은 당시 집안 형편이 비교적 유복했으나 신문과 우유배달 등으로 일본에서 고학 생활을 했다.
   
   
   미 군정이 발탁한 섬유 엔지니어
   
   정헌은 1932년 나고야고공을 졸업하자 바로 귀향하여 이듬해 인천에 건설 중이던 도오요방적(동양방적) 창설사원으로 입사한다. 당시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한 정규사원으로 생활은 안정되었으나 언제나 승진만은 일본인 사원과 차별대우를 받아야 했다. 당시의 인천공장장 하야가와는 정헌의 빼어난 자질과 성실성을 인정하면서도 공평한 승진 기회가 주어지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고 미안함을 피력해왔다.
   
   정헌은 1940년 서울여상을 졸업한 이영숙(서울여상 총동창회장 역임)과 결혼했고 1942년 북지개발공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 회사는 중국 베이징에 본사를 두고 산서성 일대에 26개 경공업 공장을 운영하던 일본의 국책회사였다. 신혼 초기 부인과 첫돌 난 장녀를 안고 붕정만리 중국 대륙 오지까지 가기로 용단을 내린 것은 인천공장장을 사임하고 북지개발공사의 중역으로 부임해간 하야가와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서였다. 북지개발공사에서는 산서성 태안에 있는 산서산업의 기사 겸 공작창 차장, 붕대공장 공장장 등을 역임하다가 광복을 맞이했다.
   
   정헌이 수많은 귀환동포 속에 끼여 선편으로 인천에 온 것은 1946년 1월이었다. 방직기술인이 드문 때여서 미 군정 당국은 이미 도오요방적 사원명부에서 정헌의 신상을 파악하고 귀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여독을 풀 겨를도 없이 곧바로 인천공장의 차장으로 복직, 그해 6월 공장장, 12월에 공장장 겸 이사로 승진하였다.
   
   1947년 정헌은 서울대 공대 섬유공학과에서 방직학 강의를 하기도 했다. 당시 방직학과 전임교수가 사임하여 정헌이 그 후임자로 초빙되었는데 열강으로 인기를 끌었다. 보통 1시간 강의를 위해 10시간의 공부를 할 정도였다. 그가 동양방적공사에 재직할 때였으니 진지한 학구적 면모를 보여준 셈이다. 정헌은 1949년 동양방적공사 이사장에 취임했는데 이즈음 그의 인간적인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공사 이사장 시절 비서가 어쩌다 점심값이나 사적 교제비를 회사 판공비에서 지출하면 벼락을 내렸다. 그의 집을 손질하려고 회사의 목공이나 미장공을 보내도 “공비로 채용한 종업원을 사용으로 쓰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야단을 치기 일쑤였다. 그 바람에 사장댁을 섣불리 손질해줄 수도 없었다.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공사를 깨끗이 구별하지 않고는 오히려 불쾌감을 갖는 성미였다.
   
   공장장 시절 가족들과 함께 인천에 거주하면서 회사 승용차로 서울 본사에 왕래하곤 했는데, 간혹 서울 친가에 다니러 가는 부인이 편승을 원하면 “회사의 공용이지 가족이 타는 차가 아니다”라면서 굳이 부인을 기차로 가게 하였다.
   
   
   임원·사원 무상으로 주식 나눠줘
   
   어려운 일에 부딪히면 침식을 잊고 몰두하는 것도 그의 타고난 성미였다. 북지개발공사 근무 시 붕대공장에서 붕대를 재단기 없이 일일이 가위로 자르는 비능률적인 작업을 보고 몇 달 동안 밤잠을 잊고 씨름하더니 붕대재단기를 고안해낸 것이 그가 일에 몰두하는 성미를 잘 보여준다. 이것으로 북지개발공사에서 큰 상을 타기도 하였다.
   
   정헌은 기술인답게 기계를 몹시 좋아하여 해외출장 때도 가족들의 선물 따위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방직이나 가공기계를 구경하고 다니는 것이 큰 낙이었다. 그러다가 탐나는 것이 있으면 어떻게든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렸다. 그러면서도 그가 물욕을 부리는 것은 평생 본 적이 없다는 것이 주변의 말이다. 많은 수입으로 호화롭게 살기보다 적은 수입으로 검소하게 살겠다는 것이 청년 시절부터 그의 생활신조였다. 그는 주식을 독점하는 것도 있을 수 없다고 여겼다. 대주주가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그의 경영관이었는데 실제 그렇게 실천했다.
   
   그는 배재고보 때부터 어학공부를 즐겨 평생 새카맣게 때묻은 영어사전을 항상 옆에 두고 원서를 들여다보는 학구파 기업인이었다. “제가 대학 입시를 앞두고 섬유학과에 가겠다고 하면 선친께서 흡족해하시리라고 생각했으나 기왕이면 기계과가 어떻겠느냐고 하셔서 당황하기도 했지요. 그 때문에 음악을 좋아했던 동생이 대신 기계과에 가서 저는 지금도 동생에게 미안해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기계를 좋아하신 엔지니어였지요.”(장남 서민석 DI동일그룹 회장)
   
   정헌은 1949년 상공부로부터 국유관리기업체인 동양방적공사 이사장으로 임명됐다. 이어 1955년 동일방직㈜을 설립, 사장으로 취임하고 동양방적공사를 불하받았다. 회사 설립 후인 1958년 불하자금 조달책으로 삼성물산을 주주로 영입하여(애초 삼성물산의 요구는 51% 지분이었으나, 38.75%와 임원 2명이 참여하는 선에서 결정) 자금을 조달하였으나 삼성물산은 결국 이듬해 철수한다.
   
   이어 정헌은 동일방직 안양공장에 모든 정열을 쏟아붇는다. 인천공장은 일본의 적산을 불하받은 것이지만 안양공장은 정헌이 염원하고 구상하던 방적부터 가공사까지 일관생산을 완성한 필생의 작품이며 자부심이었기 때문이다.
   
   회사 운영에 어려움도 있었지만 직원들의 애사심으로 이를 돌파해나갔다. 1956년 동일방직 창립 이듬해 사원들은 자의로 월급 일부(임원 20%, 사원 6%) 사양운동을 1년간 벌이기도 했다. 당시 박봉에 시달리던 상황에서 회사의 권유도 아니고 자의로 벌인 이 캠페인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종업원들이 사장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로 봐야 한다.
   
   정헌은 사원들의 애사심에 적극 보답한다. 동일방직 설립 후 그가 보유한 주식이 92.3%였는데 임원진에 32.5%, 유공사원 34명에 9.85%를 무상으로 나눠주고 본인은 32.5%만 가졌다. 그는 “주식은 내 것이 아니라 그간 고락을 함께한 사람들의 몫”이라고 강조하곤 했다.
   
   정헌은 한국 섬유업계를 대표하는 엔지니어 출신답게 새 시대에 맞는 면방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다. 솔선해서 직물 가공공장인 동인천공장을 설립했고, 가공사의 일관생산을 위하여 안양공장을 건설하였다.
   
   나아가 현대 섬유의 대종을 담당할 대한화섬이란 화섬원료 메이커의 설립을 앞장서서 지휘하여 면방업계가 선의의 경쟁과 합작으로 같이 살아가는 표본을 제시하였다.
   
   
1 1997년 열린 대한방직협회 50주년 기념행사.
2 라코스테 부산 광복점
3 1952년 동양방적(현 DI동일 인천공장)을 시찰하고 격려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왼쪽).
4 1955년 8월 5일 창립주주총회에서의 서정익 사장. photo DI동일그룹

   화섬시대 막을 연 선각자
   
   그는 우리나라 화섬시대의 막을 연 선각자이기도 했다. 당시 새로 등장한 폴리에스테르는 강도, 내마모성, 탄력성, 열고정성, 촉감 등에서 다른 화학섬유보다 훨씬 뛰어날 뿐 아니라 수요 증가율도 비할 바가 아니어서 선진국에서는 이미 의류용은 물론 산업용으로도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급증하는 수요량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는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을 일찍부터 예견한 정헌은 화섬의 국내 생산, 개발에 전력했지만 동일방직 단독으로는 힘겨운 사업이라는 것을 항상 강조했다. 한국 섬유공업계의 공동과제라는 점을 업계에 일깨운 것이다.
   
   이 무렵 대한방직협회 제9대 이사장으로 선임된 정헌은 동분서주한 끝에 대한화섬을 설립하여 초대 사장으로 선임되었다. 그 사이 중앙염색가공회사도 설립하여 의류 염색 분야에도 기술향상과 양산화를 꾀했다. 1969년에는 재봉사 가공공장을 건설한 후 가공시스템을 도입하여 재봉사 일관생산 체제를 갖추기도 했다. 이는 수출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당시 재봉사 양산 체제가 이뤄지지 않았다면 후일 대우그룹의 의류제조 수출이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란 평가도 나오고 있다.
   
   “재봉사의 국내 판매 전개와 더불어 1971년부터 업무를 개시한 홍콩사무소를 중심으로 재봉사 판매를 시작한 동일방직은 우리나라보다 앞선 홍콩 시장에 재봉사와 심지를 선보이기 시작하였다. 소량 주문으로 만족할 만한 실적이 없었던 동남아 시장도 1973년을 맞이하여 홍콩과 싱가포르 등지에서 면재봉사 중심의 거래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1973년 48만7000달러, 1974년 110만달러, 1975년 105만달러의 수출 실적을 올리게 되었으며, 동수출품의 매출이익률도 1973년의 경우 50% 이상을 나타내어 유망 수출품으로 등장하였다.”(‘동일방직사사’)
   
   정헌은 과도한 업무 탓에 건강이 항상 위태로웠다. 1968년 고혈압으로 인한 일과성 뇌허혈성 뇌졸중을 일으켰으나 다행히 적기의 치료로 안정을 되찾기도 했다. 당시 발병도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1963년 설립한 대한화섬이 6년이라는 공장 건설 지연 사태를 빚었고, 품질 불량, 투자자의 기피로 인한 증자의 부진, 이에 따른 경영권의 이양 등 신경 쓸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거기다 안양공장의 건설까지 겹쳐 그는 늘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헌은 1973년 5월 25일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64세를 일기로 별세하여 경기도 용인묘원에 안장되었다.
   
   정헌은 경방 김용완 회장, 일신방직 김형남 회장, 대농 박용학 회장 등 업계에서 교유하는 인물들이 많았다. 경제부총리를 지낸 장기영 한국일보 사장, 범양사 이성범 회장, 배재고보 동창인 세브란스병원 조동수 박사 등이 친구였다.
   

   내가 본 정헌 서정익
   일 즐기는 낙지자(樂之者)… 사람 끌어들이는 카리스마 지녀
   

이범경 전 동일레나운 사장

정헌 사장님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낙지자(樂之者)라고 할 수 있다. 일을 즐기는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자기가 하는 일을 즐기는 사람이란 삼매(三昧)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니, 좋아하는 사람보다 더 높은 경지이다.
   
   정헌 사장님에 대한 첫인상은 과묵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접근하기 어려운 면이 있기는 했지만 사업을 추진하는 면에서나 사람을 끌어들이는 카리스마를 지닌 점에서는 전형적인 기업가 자질을 보였다.
   
   사장님은 1973년 초 기획부장으로 있던 필자를 부르더니 중앙염색에 가보자는 지시를 내린 적이 있었다. 차 조수석에 앉으려고 하니까 뒷자리에 앉으라고 권했고 뒷자리에 앉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줬다. 비서로 있을 때의 실수와 재봉사 부도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일본 유배 조치를 당하면서 항상 사장님께 죄송한 생각을 갖고 있던 차에 돌연한 수행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수행이었지만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사장님은 알고 계셨던 것이다.
   
   사장님께서는 1970년대 초 미국이나 일본의 면방업이 이미 사양길에 들어선 것도, 1980년대 말이면 한국 면방업 또한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도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장님은 우리의 나아갈 방향도 구상하고 있었을 터이기 때문에 부재가 더욱 아쉬움으로 남는다.
   

   

   정헌의 가계
   
   정헌은 이영숙(작고)씨와의 사이에 3남4녀를 두었다. 장남 서민석(78·미시간대학원 졸업·산업경영학 석사)씨는 DI동방 회장으로 여경주(74·이화여대 의류직물학과 졸업·대한적십자 여성봉사특별자문위원장 역임)씨와 결혼하였으며, 중남미국가인 벨리즈 명예총영사, 대한방직협회장 등을 역임했다. 장인 여석기 교수(작고·도쿄제대 입학·서울대 영문학과 졸업)는 고려대 대학원장, 한국영어영문학회 회장, 국제교류진흥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정헌의 차남은 대석(76·미 퍼듀대 공학박사)씨, 삼남은 준석(72·미시간대 MBA)씨다.
   
   정헌의 장녀 금원(86·세브란스병원 소아과)씨는 김광덕(세브란스병원 외과)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녀 융자(80·이화여대 가정과 졸업)씨는 조정완(서울대 전자공학과 졸업) 과학원 교수와 결혼하였다. 정헌의 3녀 혜석(70)씨는 이화여대 불문과를 졸업하였으며, 4녀 은석(67)씨는 조지워싱턴대 상업디자인 석사이다.
   
   정헌의 장손 태원(47·보스턴칼리지 경영학과 졸업)씨는 DI동일 대표이사 사장이다.
   
   정헌의 부인 이영숙 여사는 남편의 인재 육성 뜻을 이루기 위해 사재를 출연, 1979년 정헌재단을 설립하였다. 정헌재단은 중·고·대학생 2900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였으며, 대학교수 등에게 연구용역비도 지급하고 있다. 또 1980년부터 매년 정헌섬유산업상을 시상하고 있다. 2003년에는 정헌메세나를 창립해 유럽에서 활동 중인 한인 및 프랑스인 화가를 선정하여 창작활동 및 개인전을 지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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