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암 이종덕

1915년 9월 14일 경기도 고양군 송포면 덕이리에서 태어남

1936년 서울 미나도금고상회 입사

1945년 해동공업사 설립

1954년 해덕철강상사 설립

1960년 부산철관공업(현 세아제강지주) 설립

1969년 기업공개, 국내 최초 사원지주제 도입

1971년 회장 취임

2000년 12월 11일 서울 삼성병원에서 별세

해암(海巖) 이종덕(李鍾德)은 한국 강관산업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는 ‘초석기업’들을 설립함으로써 민간인 신분으로 한국의 기간산업을 다져왔다. 그가 창업한 세아그룹은 자동차, 에너지, 기계, 조선, 건설 등 여러 산업 분야에서 긴요하게 쓰이는 철강 소재를 생산하는 철강 전문 업체이다. 세아그룹은 2018년 세아제강이 투자(세아제강지주)와 제조(세아제강) 부문으로 분할되면서 특수강 사업을 중심으로 하는 세아홀딩스와, 강관 사업이 주요 비즈니스인 세아제강지주의 두 개 지주사로 재편되었다. ‘세아’라는 사명에는 철강 생산으로 ‘세상을 아름답게’라는 뜻이 담겨 있다.

해암 이종덕은 1915년 9월 14일 경기도 고양군 송포면 덕이리에서 부친 이해욱과 모친 순흥 안씨 사이의 3남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해암의 부친은 과묵하면서도 유가의 규율과 가풍을 존중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토지수탈정책에 밀려 농사에 의욕을 잃고 말았다. 결국 농사며 집안일은 모두 어머니 차지가 되었다. 해암의 어머니는 키가 크고 힘이 장사였다. 성격도 화통해 여장부로 불렸다. 모친으로부터 건강 체질을 물려받은 해암은 성격이 활달하고 한번 결심하면 밀고 나가는 추진력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할 수 있다’는 강인한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여 하루 두 끼만 먹는 형편이었다. 형과 동생은 정규교육을 받았지만 그는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돕는 착한 아들이었다. 열심히 일해 종잣돈을 만들겠다는 마음을 품고 18세 때 박월선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농촌에서는 꿈을 펼칠 수 없어 상경하여 식료품 상회를 열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상품을 구입하고 낮에는 배달을 다녀야 하는 고된 서울생활이 2년쯤 될 무렵 금고회사에 다니는 형이 찾아와 함께 일하자고 권했다.

1936년 해암은 미나도금고상회에 입사해 신당동에 있는 공장에서 견습공으로 일을 시작했다. 매사에 근면하고 열심히 일하는 그를 알아본 사장은 얼마 후 공장장으로 발탁했다. 그 사이 해암은 종잣돈을 마련하기 위해 무악재고개에 살면서 신당동 공장까지 먼 길을 걸어다녔다. 외식을 하지 않고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다.

1945년 광복을 맞자 그를 신임해온 일본인 사장은 일본으로 떠나며 그에게 공장을 맡겼다. 그러나 해방기의 혼란을 틈탄 모리배들의 농간에 속아 귀속재산을 빼앗겼다. 해암은 철강 재료를 수입해 팔기로 하고 형과 함께 서울 을지로 2가에 해동공업사를 설립했다. 당시 한국에서 철강재를 처음으로 수입한 덕에 철강재는 들여오기가 무섭게 팔려나갔다.

현장 경영을 중시했던 해암. ⓒphoto 세아그룹
현장 경영을 중시했던 해암. ⓒphoto 세아그룹

철강재 수입으로 대박

환율변동이 심해 자고 나면 가격이 올랐지만 해동공업사는 적정 이윤만 남기고 팔았다. 어떤 경우에도 상거래는 정직하고 성실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신조였다. 그 덕분에 돈이 쌓이는 것보다 더 큰 신용이 쌓여 갔다. 그렇게 5년 동안을 지켜나가니 많은 수익이 생겼다. 1950년 6·25전쟁이 터져 해동공업사도 부산으로 이전했다. 철강재를 부산으로 옮겨 가던 중 트럭이 전복되어 생명을 잃을 뻔한 사고도 있었다. 부산에서는 국제시장에서 운영했던 점포가 원인 모를 시장의 대화재로 불타 모든 것을 잃기도 하였다.

그러나 해암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재기하여 1954년 부산에 해덕철강상사를 설립, 본격적인 독자경영의 길에 나선다. 형은 상경하여 해동철강상사를 차렸다. 당시 매일 판매되는 대금을 미처 헤아리지 못해 포대에 넣어 은행에 가지고 갈 정도로 사업이 잘됐다. 그러나 해암은 지금까지는 철강 수입 판매가 수익이 좋지만 어떤 사업이든 계속 좋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돈만 있으면 수입해 팔 수 있으니 갈수록 경쟁도 치열해질 것으로 여겼다.

이즈음 1960년대 초 한 공군장교가 찾아왔다. 그는 서울대 상대 출신으로 공군 참모총장을 보좌하는 엘리트였다. 해암의 과묵한 듯하면서도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자세에다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두툼하고 솥뚜껑만 했던 손이 특히 그의 눈에 들어왔다. ‘경영 일선에서, 생활전선에서 고생하며 몸소 부를 쌓아온 모습은 저런 것이구나!’ 그는 감명을 받았다. 이야기는 이어졌다.

“앞으로 어떤 사업을 하면 좋겠나?”

“정부는 앞으로 산업 쪽을 전폭적으로 지원할 것입니다. 앞으로는 무엇을 하시든 특히 제조업 쪽으로 사업을 전환하셔야 합니다. 정부는 산업시설을 증대시키는 쪽으로 모든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비즈니스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려면 흐름을 잘 타야 합니다.”

“나는 강관사업을 해보려 하네.”

“저도 강관 쪽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자네는 왜 그렇게 생각하나?”

“제선, 제강 쪽은 부담이 큽니다. 우리가 가진 자본으로 충분히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강관사업입니다.”(‘해암 이종덕’·유영수 대한상공회의소 기획)

이런 대화를 나눈 공군장교는 후일 해암의 맏사위가 된 이병준씨다.

부산철관공업 공장 ⓒphoto 세아그룹
부산철관공업 공장 ⓒphoto 세아그룹

그의 말에 따라 해암은 산업보국을 위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절대빈곤을 겪던 시절, 국가가 산업화되어야 한다고 판단한 그는 기간산업의 혈맹인 강관 제조업을 선택하여 상업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한다. 1960년 10월 세아제강의 전신인 부산철관공업이 설립되는 배경이다. 해암은 감만동에 공장을 지으면서 ‘포말기업이 아닌 초석기업을 만든다’는 창업정신도 함께 정초(定礎)하였다. 해암은 부산철관공업 창업 이후 ‘초석기업’을 향한 일념으로 그의 전 생애를 투자하였다. 그는 사업을 하면서 온몸으로 터득한 ‘부지런하자’ ‘책임을 지자’ ‘힘을 모으자’는 것을 사훈으로 내걸었다.

해암은 기본과 원칙을 중시하였다. 무엇보다 기업을 개인의 축재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사업을 하면서 얻은 수익은 전액 자본으로 전입하여 재투자함으로써 사업을 성장시키는 데 혼신을 다했다. 이렇게 부산철관공업은 강관업계의 선두기업으로 부상하고, 국내 최대의 강관 공장인 포항공장을 건설할 수 있었다.

전국상품전시회를 둘러보는 해암(오른쪽)과 이병준 회장. ⓒphoto 세아그룹
전국상품전시회를 둘러보는 해암(오른쪽)과 이병준 회장. ⓒphoto 세아그룹

기본과 원칙에 충실

해암은 한 벌 양복으로 한 철을 보내면서 자장면을 최고의 음식으로 알고 지낼 만큼 검약의 산 표징이었다.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은 자장면 곱빼기가 그의 애정이 담긴 음식 대접이라고 말한다. 외국 출장을 갈 때도 “일등석에 앉으면 비행기가 더 빨리 가느냐?”며 이코노미를 고집하였다. 해암은 회삿돈을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승용차가 없던 시절, 시간 절약을 위해 밤열차를 타고 공장과 건설현장을 찾아다녔다. 또 출장을 다닐 때도 모든 경비를 사비로 충당하였다. 아랫사람이 출장비라고 계산하여 가져오면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야단쳤다.

또한 세아의 모든 공장은 달력 뒷면에서 설계가 시작되었다고 할 정도로 종이 한 장도 아꼈다. 레미콘 작업을 할 때에는 차량 적재함에 남아 있는 마지막 자갈까지 쓸어내렸으며, 현장에 떨어져 있는 볼트 하나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그것이 비싸서가 아니라 작은 것 하나라도 땅에 묻히면 그냥 사라져 버리니 낭비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이제 기름값만큼 일을 못 한다”며 승용차를 놔두고 지하철을 이용하곤 하였다. 그러면서도 신기술, 신설비 등 꼭 필요하다고 판단한 투자에는 만금을 아끼지 않았다.

부산 우량 국산품 생산업체로 선정되어 수상소감 발표(1966년). ⓒphoto 세아그룹
부산 우량 국산품 생산업체로 선정되어 수상소감 발표(1966년). ⓒphoto 세아그룹

사업에 대한 해암의 이러한 신념은 기업을 ‘무차입 경영’으로 이끌어 IMF 외환위기 때 빛을 발했다. 당시 세아는 다른 기업들의 부러움을 살 만큼 탄탄한 재무구조로 이름이 높았다. 해암은 많은 기업들이 빚을 내어 사업 확장을 도모할 때도 금융기관에 손을 벌리는 것을 자제하였다. 남의 돈을 쓰면 간섭받게 되고 뜻대로 기업을 영위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권력가, 투기자본 등 외부세력으로부터 독립하여 자력으로 사업을 이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또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국수를 먹고는 힘을 쓸 수 없다”며 꼭 밥을 짓도록 구내식당에 당부하는 등 아랫사람에 대한 자상함이 남달랐다. 새벽부터 자전거를 타고 공장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직원들의 등을 두드려주는 것도 일상이었다.

일본 가와사키제철(현 JFE) 방문 모습(1970년대 초). ⓒphoto 세아그룹
일본 가와사키제철(현 JFE) 방문 모습(1970년대 초). ⓒphoto 세아그룹

“부동산 투기는 나쁜 짓”

해암은 땅투기에 대해서도 선을 그었다. 당장 쓸 목적으로 땅을 사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투기해서 돈을 벌 목적으로 땅을 사들이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그것은 땅이 필요한 사람의 몫을 빼앗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이 바탕에 깔린 돈은 내가 노력해서 번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여겼다. 사세가 커지자 여러 곳에서 건설, 금융업 등에 투자하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외면하였다. 특히 부동산 투자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기업인으로서 해암의 장점은 앞을 보는 직관력에 있었다. 산업화를 예견하고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업종으로 강관제조업을 택한 것도 그러한 면을 보여준다. 또 전국 기업으로 나가기 위해 서울 고척동·개봉동 등의 대한제철 부지를 매입하여 서울공장을 짓는 과정을 보면 철저한 준비와 탁월한 안목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부산에 이어 서울공장 가동으로 강관업계 선두주자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다지게 된다.

서울공장 증설에 박차를 가하던 1972년 해암은 또 한 차례 사운을 걸고 승부수를 던진다. 포항철강공업단지에 20만8200㎡(약 6만3000평)의 부지를 매입하여 신공장 건설에 나선 것이다. 특히 1차 석유파동 붐을 간파하고 강관 수요가 늘어날 것을 예측해 국내 유일의 고품질 강관 생산체제를 확보하는 데 힘썼다. 이렇게 설립된 포항공장은 성장의 도약대가 되어 오늘의 세아를 만드는 결정적 전기를 가져왔다.

혜안을 갖고 준비해온 이러한 생산체제의 뒷받침 속에 1970년대 세계경제를 요동치게 한 두 차례의 석유파동은 기회로 작용하였다. 미지의 땅, 열사의 중동에 수출시장을 개척하는가 하면, API 강관 등을 앞세워 북미시장 수출을 확대하여 수출 비중을 매출의 70%까지 끌어올림으로써 석유파동 위기를 비켜갔다.

해암은 문제의 핵심을 쉽게 찾는 직관력을 지녔다. 해암을 최측근에서 보좌했던 세아스틸 아메리카의 이병준 회장은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도 그 핵심을 간단명료하게 정하여 지침을 내리는 심플리파이어였다”고 회상한다.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는 해암의 특출했던 또 다른 면은 비상한 기억력과 수리능력이다. 서울공장, 포항공장 등 전국에 산재한 공장은 직접 그의 손에서 설계되고 만들어졌다.

서울공장을 건설할 때의 일이다. 해암은 대구의 태평파이프를 인수한 후, 이를 증설 중인 서울공장 설비로 활용하기 위해 넉 달간이나 전기가 끊긴 어두운 공장에서 기계 해체 작업을 진두지휘하였다. 볼트 하나라도 분실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각종 기계류를 화물차에 실어 보내면서 운송기사에게 “이 차에 뭘 얼마나 싣고 가는지 아느냐?”고 물어 기사가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면 차에 실은 기계와 부품, 수량을 낱낱이 적어 넘겨주었다. 서울에 도착한 후 직원이 목록과 수량을 확인하면 종이에 적힌 것과 일치했다고 한다. 보좌하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장부의 숫자까지 모두 외우는 비상한 기억력을 지녔다.

해암은 유난히 뭔가 짓는 일을 좋아하였다. 건설이 특기라고 할 만큼 도형과 계산능력이 뛰어나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하였다. 특히 평생의 업적인 포항공장은 설계에서 완공까지 구석구석 그의 손때가 묻지 않은 곳이 없다. 경비 절약을 위해 포항 제1공장을 서울공장 건설 경험을 바탕으로 강관으로 지은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하룻밤이면 그의 손에서 공장 설계도면이 뚝딱 나왔다. 원부자재는 물론 건설에 필요한 시멘트, 벽돌까지 정확하게 소요량을 계산해냈다. 계산기도 없던 시절에 손으로 어떻게 그런 계산이 가능했는지 사람들은 놀라워할 뿐이었다.

해암의 주머니에는 늘 줄자가 들어 있었다. 해덕강업 안산공장을 건설할 때 복중 더위에 임원을 대동하고 현지에 나가 가장 먼저 꺼내든 것이 줄자였다. 그리고는 어김없이 달력 이면에 공장 배치도를 그렸다. 1980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도 해암은 별세 전까지 현장을 살피는 것을 즐겼다.

해암에게는 ‘세금을 잘 내야 한다’는 확고한 경영철학도 있었다. 바로 이 같은 경영철학이 있었기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많은 기업과 기업인들이 부정축재 비리 등으로 몰려 중도 탈락하는 비운을 맞는 와중에도 해암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는 또 고용안정을 이루는 것을 기업인의 책무라고 생각하였다. 석유파동으로 경영 압박을 받을 때, 일감이 없어 종업원들이 공장 부지에 돋아난 잡초를 뽑고 있을 때에도 감원을 하지 않았다.

해암은 뜻한 대로 세아를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고 2000년 12월 11일 서울 강남 삼성병원에서 별세하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선영에 안장되었다.

해암의 가계

해암은 박월선씨와 사이에 2남4녀를 두었다. 장남 운형(서울대 건축공학과 졸업·미시간대 MBA)씨는 해암의 뒤를 이어 세아그룹 회장으로 재직하다가 2013년 남미 출장 중 사고사를 당했다. 철과 같은 마음으로, 그러나 늘 베푸는 인생으로 살아온 그를 많은 사람들이 애도하였다. 특히 그가 생전에 이사장직을 맡았던 국립오페라단은 파격적으로 추모공연을 하여 화제가 되었다. 당시 공연 팸플릿에는 국립오페라단 임직원 명의로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추모글이 실렸다.

운형씨는 부인 박의숙(75·이화여대 불문과 졸업·연세대 MBA·세아홀딩스 부회장·세아네트웍스 회장)씨와 사이에 1남3녀를 두었다. 장남 태성(43·세아홀딩스 전무·세아베스틸 전무)씨는 애경그룹 총괄부회장의 장녀 문선(36·애경그룹 과장)씨와 결혼하였다. 운형씨의 장녀는 은성(48)씨, 차녀는 호성(47)씨이며, 3녀 지성(46)씨는 오승현(47)씨와 결혼하였다.

해암의 차남 순형(72·한양대 경영학과 졸업)씨는 운형씨의 뒤를 이어 세아그룹 회장으로 취임했다. 이순형 회장은 “LNG 프로젝트 관련 수주, 스마트공장과 기술 혁신을 통한 유연성 제고를 확대하며, 친환경차 및 해상 풍력발전 소재 시장 개척에 적극 힘쓰겠다”고 비전을 밝히고 있다.

순형씨는 김혜영(67)씨와 결혼하여 주성(43·세아제강 전무), 주현(41)씨 남매를 두었다. 주성씨는 민규선(43)씨와 결혼하였으며, 주현씨는 오문석(41)씨와 결혼하였다.

해암의 장녀 복형(83)씨는 이병준(84)씨와 결혼하여 이휘령(60·세아제강 대표이사 사장), 이채령(56)씨 남매를 두었다. 휘령씨는 손성은(59)씨와 결혼하였으며, 채령씨는 클라우 에팬버거씨와 결혼하였다. 해암의 차녀 미형(81)씨는 김연상(84·서울대 공대 기계과 졸업·세아 ENT 고문)씨와 결혼하여 형제를 두었다. 장남 김병직(51)씨는 임수연(50)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남 병욱(49)씨는 조은진(48)씨와 결혼하였다. 해암의 3녀 수형(76)씨는 변진박(76)씨와 결혼하여 아들 세인(48)씨와 현희(50)·인희(43)씨 자매를 두었다. 해암의 4녀 보형(71)씨는 장종현(73·인하브파트너스 회장)씨와 결혼하여 인혁(39)·지원(42)씨 남매를 두었으며, 지원씨는 전훈씨와 결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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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 근현대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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