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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6호] 2021.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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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혁명의 서막]‘독이 든 사과’ 근원인플레이션지수의 탄생

홍익희  세종대 대우교수·‘월가이야기’ 저자 

▲ 달러의 금태환 정지를 선언한 ‘닉슨쇼크’로 달러는 단순한 신용화폐로 전락했고 급격한 통화발행과 인플레이션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비트코인 추종자들은 기존의 패권적 통화금융 시스템으로는 인플레이션을 영원히 막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photo 셔터스톡
비트코인을 만든 사토시 나카모토는 기존의 패권적 통화금융 시스템으로는 인플레이션을 영원히 막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기존 통화금융 세력이 기득 체제에 복무한다고 보았다. ‘복무(服務)’한다는 의미는 기득권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임무에 힘쓴다는 뜻이다. 곧 통화금융 세력의 임무는 통화시장을 안정시켜 국민경제, 특히 서민경제를 활성화하는 것이 아니라 고인플레이션이나 금융위기의 위험이 있을지라도 통치 세력과 통화금융 세력의 이익에 부합하는 쪽으로 일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화폐론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경제학자들도 우려하는 사안이다. 존 케인스는 1944년 브레턴우즈회의에서 일국의 패권적 통화는 무역전쟁을 불러와 환율 전쟁과 패권 전쟁으로 비화하며 이는 세계대전을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가 세계화폐 ‘방코르’를 제안한 이유다. 케인스와 같은 시대에 활약했던 슘페터는 자본주의는 경제 면에서 성공하지만 사회와 정치 면에 변화를 가져와 자본주의는 장기적으로 새로운 사회주의 질서로 옮겨갈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금융자본주의가 기본소득 등 사회주의를 가미한 포용적 자본주의로 변화하는 걸 말하는 듯하다. 하이에크도 1976년 ‘화폐의 탈국가화’에서 중앙은행은 정치적 제약으로 인해 높은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므로 화폐 공급은 민간 발행 주체들의 경쟁을 통해 시장에서 자유롭게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밀턴 프리드먼은 1980년에 “인플레이션은 알코올중독과 정확하게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효과가 좋아 보인다. 정부의 통화량 증가 정책은 누구나 더 많이 지출할 분위기를 만든다. 그러나 곧 나쁜 효과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가 합세한다.”
   
   
   “인플레이션은 알코올중독과 같다”
   
   사토시 나카모토는 금융위기 와중인 2009년 1월 3일 비트코인 제네시스 코인(창세기 코인)에 글로벌 금융위기를 상징하는 문구(영국 더타임스 1면 헤드라인)를 넣어 비트코인 발행 목적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 그래서 비트코인은 애초부터 발행 수량을 2100만개로 한정해 인플레이션을 원천 차단한 것이다. 사토시 나카모토는 왜 그렇게 인플레이션 억제를 중요하게 생각했을까? 그 연원을 살펴보자.
   
   금본위제하에서는 화폐 발행이 제한되어 인플레이션이 쉽게 일어날 수 없었다. 문제는 1971년 8월 닉슨쇼크로 인해 달러가 금과의 고리가 떨어져나간 이후 발생했다. 이때부터 화폐 발행에 통치 세력의 정치 논리와 통화금융 세력의 진영 논리가 교묘히 경제 논리로 둔갑해 기득 세력의 이익을 위해 복무했다.
   
   1969년 제37대 미국 대통령이 된 리처드 닉슨은 부통령 시절 자신의 경기부양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던 윌리엄 마틴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의 교체를 원했으나 대통령이 연준 의장을 해임할 권한은 없었다. 때문에 마틴의 임기가 끝나는 1970년 2월까지 기다려 자신의 보좌관 아서 번스 경제학 박사를 후임 연준 의장으로 임명했다. 닉슨은 번스에게 자신이 재선에 출마할 때 완화적 통화정책을 펼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그를 임명하던 날에도 “신임 의장이 ‘독립적으로’ 대통령의 의견은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기를 희망한다”고 공개적으로 압박했다. 그 무렵 경제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소비자물가지수가 1965년 1%에서 1980년 3월 13.6%까지 올랐다.
   
   
▲ 1971년 8월 15일 TV로 방영된 ‘평화의 도전’이라는 특별담화문에서 달러의 금태환 정지를 발표하는 닉슨 대통령.

   닉슨이 조종한 번스 연준 의장
   
   번스는 1971년 6월 22일 닉슨 대통령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는 편지에서 물가상승이 연준의 통화정책 때문이 아니라 ‘급격하게 달라진 경제구조’ 때문이라는 사실을 대통령이 알아주길 원했다. 번스는 정부 차원에서 ‘임금’과 ‘물가’를 동결하는 정책을 6개월 정도 펼쳐야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연준 의장이 인플레이션을 긴축으로 잡을 생각은 하지 않고 공권력을 도입해 인위적인 통제로 물가상승을 억제하려 한 작태가 가관이었다. 연준은 돈을 푸는 통화완화 정책을 쓸 테니 물가는 정부가 힘으로 억누르라는 얘기였다. 하여튼 연준이 인플레이션이라는 공을 대통령에게 떠넘긴 것이다.
   
   이런 시점에 터진 게 1971년 8월 15일 닉슨쇼크였다. 금환본위제하에서 달러 발행이 도를 넘어섰다고 판단한 서독의 브레턴우즈체제 탈퇴에 이어 스위스, 스페인, 프랑스가 달러를 금과 바꾸어가자 미국 금 보유고는 많이 줄어들었다. 이어 믿었던 동맹국 영국마저 대규모 달러의 금 교환을 요구하자 미국 정부에 비상이 걸렸다.
   
   1971년 8월 13일 닉슨은 측근 참모 16명을 데리고 군사기지이자 대통령 별장이 있는 캠프데이비드 밀실회의실로 들어갔다. 존 코널리 재무장관, 조지 슐츠 백악관 예산관리국장, 아서 번스 연준 의장 등이 참석한 회의는 일요일인 15일까지 사흘간 이어졌다. 그만큼 사안이 중대했다. 15일 밤 TV에 등장한 닉슨이 “더 이상 달러를 금으로 바꿔줄 수 없다”는 금태환 정지 선언을 발표했다. 동시에 닉슨은 모든 수입품에 10%의 관세를 물리는 보호무역 조치와 90일간 임금과 물가를 동결하는 인플레이션 대책도 함께 발표했다. 이른바 ‘닉슨쇼크’였다.
   
   닉슨은 ‘평화의 도전’이란 제목의 특별담화문에서 “최근 몇 주 동안 투기꾼들은 미국 달러에 대한 전면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한 국가의 통화의 힘은 그 국가경제의 힘에 기반하고 있으며 미국 경제는 세계에서 가장 강합니다. 따라서 저는 재무장관에게 투기꾼으로부터 달러를 방어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코널리 장관에게 통화 안정과 미국의 이익을 위해 달러의 금 교환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도록 지시했습니다”라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이후 일시적 중단이 영구적 중단이 되었다. 이로써 달러는 전적으로 미국의 신용에 기초한 ‘신용화폐(Fiat Money)’가 되었다.
   
   닉슨쇼크로 국제 외환시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무엇보다 달러가 기축통화의 위상을 상실했다. 미국 경제는 이 조치가 한동안 잘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임금과 물가동결 관련 규제가 늘어나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가격 통제의 피해를 보기 싫었던 기업은 공급을 줄였고, 이는 나중에 물가상승 속도를 더 부추겼다.
   
   경제가 침체될수록 미국 정부는 더 적극적으로 적자 예산을 편성해 재정 정책을 강화했다. 정부의 대량 국채 발행으로 인플레이션이 심화되어가는데도 연준은 정부 눈치를 보느라 적극적인 긴축정책을 펼칠 수 없었다. 실제 통화증가율이 13.4%에 달했던 1971년 말 번스 의장은 당연히 긴축을 위해 기준금리를 올려야 하는데도 되레 기준금리를 내렸다. 닉슨의 재선 운동을 돕기 위해 의도적으로 악수를 둔 것이다.
   
   번스는 재선을 앞둔 닉슨 대통령으로부터 금리인하 압박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1972년 재선에 도전한 닉슨 대통령이 아서 번스 연준 의장에게 대선에서 이겨야겠으니 금리인상은 꿈도 꾸지 말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쟁 참전과 복지 확대로 돈이 많이 풀려 심각한 인플레이션에 직면하고 있었다. 금리를 올려 돈줄을 조여야 했지만 닉슨이 막은 것이다. 연준의 독립성은 없었다. 연준 스스로도 독립성을 지키려는 의지가 없었다.
   
   
   닉슨쇼크로 신용화폐 전락한 달러
   
   닉슨쇼크 이후 미국은 1971년과 1973년에 각각 8.6%, 10.0%의 평가절하를 감행했다. 세계 각국은 달러에 대한 고정환율제를 포기했고, 달러의 평가절하는 수입물가 상승을 불러와 물가를 자극했다. 연준은 닉슨이 재선에 성공한 1973년이 되어서야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긴축정책을 황급히 펼쳤다. 하지만 통화정책의 적절한 시기를 놓친 연준은 1973년 1월 6.0%였던 정책금리를 그해 8월 11.0%까지 7개월이라는 단기간에 급격하게 올렸다. 급가속이나 급브레이크는 문제를 일으키는 법이다. 결국 급격한 긴축의 부작용은 경기침체를 불러왔다. 인플레이션과 동시에 경기침체가 겹치면서 미국 경제는 1973년 말 스태그플레이션에 진입했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일쇼크가 들이닥쳤다. 1973년 10월 6일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간의 4차 중동전쟁(욤키푸르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따라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들은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나라들을 제재하기 위해 석유 무기화를 천명하며 원유가격을 올렸다. 10월 16일 페르시아만 연안 6개국이 원유 공시가격을 배럴당 3.01달러에서 5.12달러로 70% 인상했다. 다음 날 10월 17일에는 아랍 석유수출국기구가 원유 생산의 단계적 감축을 결정했다. 또한 아랍 석유수출국기구 국가는 10월 20일 이후 이스라엘이 점령지에서 철수할 때까지 이스라엘 지지국에 대한 경제제재(석유 금수)를 잇따라 결정했다. 또한 12월 23일에는 석유수출국기구에 가입한 페르시아만 연안의 산유국 6개국이 1974년 1월부터 원유 가격을 5.12달러에서 11.65달러로 인상했다. 3개월 사이에 석유 가격이 배럴당 3.01달러에서 11.65달러로 387% 급등한 것이다. 이때부터 세계경제는 가라앉기 시작했다.
   
   당시 닉슨 대통령과 번스 의장의 책상에는 직통전화기가 놓여 있었다. 그들이 서로 통화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 보좌관이 대통령의 뜻을 전달했다. 보좌관은 번스 의장이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을 이제 그만하고 정부의 경기부양에 협조해줄 것을 대통령이 원한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번스는 연준의 독립성을 뒤로한 채 대통령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그는 오일쇼크로 치솟는 물가 속에서도 긴축을 택하지 않고 대통령이 원하는 통화팽창 정책을 시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명분이 필요했다. 곧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긴축 정책을 실시해야 할 판에 팽창 정책을 택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물가지수가 필요했다. 이래서 태어난 게 ‘근원인플레이션지수’이다. ‘핵심물가지수(Core Inflation)’라고도 한다. 번스는 인플레이션 상승률이 미미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1973년 오일쇼크로 유가가 4배 뛰었을 때, 번스는 “이는 통화정책과 관련이 없기 때문에, 연준은 석유와 에너지 관련 상품, 곧 난방유나 전기료 등의 물가를 소비자물가지수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통화량과 무관하게 움직이는 물가상승 때문에 통화정책이 간섭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당시 연준의 연구원들, 대부분 경제학박사인 이들은 이에 항의했다. 에너지 관련 상품들이 소비자물가지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1% 이상인데, 그같이 중요한 물가 요소를 무시하는 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번스는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그는 연준 내 반대 의견을 가진 위원들과 연구원들에게 불이익을 줬다.
   
   
▲ 닉슨이 임명한 아서 번스 연준 의장. 닉슨의 보좌관 출신인 그는 연준의 독립성을 결정적으로 훼손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번스, 소비자물가지수 조작
   
   유가가 폭등하자 같은 해 식음료 물가도 치솟았다. 번스는 이번에도 식음료를 물가지표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에는 연준 연구원들이 마치 군인처럼 번스의 의견에 복종했다. 이로써 소비자물가지수에서 무려 25% 비중을 차지하는 식음료 아이템을 제외했다. 번스는 그가 창안해 낸 근원인플레이션지수에 흐뭇해했다. 이렇게 해서 기존의 소비자물가지수에서 석유류와 식음료를 제외시켰다. 일시적 외부 충격으로 인한 물가상승은 장기적인 통화 계획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데 변동성이 커 안정성이 결여된다는 게 제외 이유였다.
   
   불행하게도 번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후 수년 동안 그는 주기적으로 기이한 논리를 펼쳤다. 이동주택이나 중고차, 아이들 장난감, 심지어 여성의 장신구 가격도 일시적이고 이례적이어서 물가지표에 적합하지 않다고 했다. 그는 주택소유 비용을 물가에 포함하는 것에도 이의를 제기했다. 이는 소비자물가지수에서 16% 비중을 차지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번스가 원하는 것들을 제외했을 때, 소비자물가지수에서 남은 요소는 과거 대비 35%에 불과했다. 이렇게 해서라도 그는 인플레이션을 부정하려 했다. 그렇게 물가상승 요소를 줄이고 줄였는데도 물가는 두 자릿수로 상승했다. 1975년에 이르러서야 번스는 마침내 ‘미국이 인플레이션 문제를 겪고 있다’는 데 동의했다. 훗날 밝혀진 닉슨 대통령의 도청 테이프에 따르면 번스는 대통령에게 “대통령의 명성과 지위를 높이기 위해 나의 권한 내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다”고 말했다. 사실상 연준의 독립성을 포기한 것이었다. 예일대 로치 교수는 지난 5월 “당시 ‘일시적인 물가요소’라며 무시한 게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었다며, 오늘날에도 50년 전 상황이 재현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레이건 대통령 때인 1980년대 초에 2차 오일쇼크로 물가상승률이 연 10%에 육박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집값이 물가를 부풀린다며 이를 지수에서 빼고 대신 ‘자가 임대비’를 넣게 했다. ‘자가 임대비’란 현재 자신의 집을 임대해 주었을 때 받을 수 있는 예상 임대료를 의미한다. 집값을 지수에서 제외한 것은 주택은 소비품목이 아니라 자본재라는 이유였다. 집을 사거나 주택개량 지출은 소비가 아니라 투자란 의미다. 그 뒤 아버지 조지 부시 대통령 시절에는 전통 상품의 비중을 줄이고, 서비스와 금융 부문의 가중치를 높여 물가상승률을 낮췄다. 역대 정권이 모두 어떡해서라도 실제보다 낮은 인플레이션을 국민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다.
   
   
   의식주 중 ‘의’만 남은 근원인플레이션지수
   
   그들은 유동성이 늘어나면 가격이 오르게 마련인 자산과 상품가격을 소비자물가지수에서 제외함으로써 통화 발행에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모두 지수에서 빼버렸다. 곧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의, 식, 주와 연료’ 중에서 농산물과 연료, 주택 가격을 빼버림으로써 ‘식과 주, 연료’가 제외되고 ‘의’만 남았다. 이후 연준은 근원인플레이션지수를 통화정책의 지표로 삼았다. 곧 근원인플레이션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달러를 무제한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백악관과의 대립을 회피한 번스 의장은 1970년대 물가안정에 실패했다. 이 시기는 연준 역사상 가장 무능한 통화 정책을 펼친 시기로 기록됐다. 결과는 비참했다. 인플레이션이 두 자릿수로 치솟았다. 번스는 1979년 퇴임하면서 정치적 압박 때문에 필요할 때 금리를 인상하지 못했다고 변명했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임명된 폴 볼커 연준 의장은 1980년 13.6%까지 오른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21%까지 올려야 했다. 수많은 기업이 고금리를 감당 못 해 파산하고 트랙터를 앞세운 농민들이 연준 앞에서 거센 시위를 했다. 폴 볼커는 살해 위협 때문에 권총을 차고 다녀야 했다. 볼커 의장은 초고금리 정책으로 인플레이션과 싸운 9년의 재임기간 동안 두 번의 경기침체를 유발하면서 정부, 의회와 대립각을 세웠다. 통화정책의 실기가 얼마나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후 근원인플레이션 한도 내에서 무제한 발행되는 달러는 금융자본주의의 여러 문제점을 야기시켰다. 닉슨쇼크 이전인 1970년만 하더라도 세계 GDP(국민총생산) 대비 금융자산 비중은 50%에 불과했다. 이러한 자본집적도가 1980년에 109%, 1993년에 200%, 금융위기 직전 선진국은 400%를 넘어섰다. GDP가 연 3~4% 성장할 때 금융자산은 연 15% 내외의 증가세를 보였다. 근로소득 증가는 산술급수적으로 성장하였으나 자본소득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그 결과가 소득불평등의 증대와 부의 편중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금융자산의 급속한 증가는 통화에 대한 불신을 불렀다. 그 뒤 통화 남발을 근본적으로 원천 봉쇄하게끔 설계된 비트코인이 글로벌 금융위기 와중인 2009년 초에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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