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미국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이뤄진 ‘플라자합의’에 서명한 각국 재무장관들. 왼쪽부터 게하르트 스톨텐버그 서독 장관, 피에르 베레고부아 프랑스 장관, 제임스 베이커 미국 장관, 나이절 로슨 영국 장관, 노보루 다케시타 일본 장관. ⓒphoto 위키피디아
1985년 미국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이뤄진 ‘플라자합의’에 서명한 각국 재무장관들. 왼쪽부터 게하르트 스톨텐버그 서독 장관, 피에르 베레고부아 프랑스 장관, 제임스 베이커 미국 장관, 나이절 로슨 영국 장관, 노보루 다케시타 일본 장관. ⓒphoto 위키피디아

1980년대 들어 미국은 여러모로 힘들었다. 1970년대 기나긴 인플레이션과의 사투가 진행되면서 들이닥친 스테그플레이션에서 탈출해야 했다. 미국이 선택한 카드는 그간의 ‘케인스주의’를 버리는 것이었다. 대신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시장의 효율에 맡기자는 신자유주의를 도입했다. 동시에 레이건 대통령은 소비 증대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부자 감세정책을 들고나왔다.

폴 볼커가 1980년대 들어 초강력 긴축으로 가까스로 인플레이션을 잡았을 때, 미국은 쌍둥이 적자, 곧 막대한 무역적자와 재정적자에 빠져들었다. 미국은 먼저 무역적자를 해결하기로 했다. 무역적자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수출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고 있는 일본과 서독을 상대로 미국 제조업의 품질경쟁력을 높여 맞선다는 것은 이미 물 건너간 일이었다. 미국은 우격다짐으로 상대국들의 통화가치를 상승시켜 가격경쟁력으로 승부를 보고자 했다. 그래서 미국이 선택한 카드가 1985년의 플라자합의였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미·일 간 반도체 분쟁

2차 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핵심전략은 일본으로 하여금 미국의 동아시아 ‘대리인’ 구실을 하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1950년에 터진 한국전쟁 덕분에 일본은 산업 경쟁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미국은 일본이 한국전쟁에 필요한 보급품과 군수품을 생산해 조달하도록 했다. 이로 인해 일본 경제는 전쟁특수 호황을 맞았다. 게다가 미·일상호방위조약에 의해 미국은 일본의 군수산업에 엄청난 투자를 단행했다. 이는 일본의 다른 산업에도 영향을 미쳐 1950년대 일본은 연평균 10%를 웃도는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제조업 강국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일본은 1955년부터 1973년까지 연평균 GDP 성장률이 9.3%에 달해 미국과 유럽의 성장률을 압도하고 세계 최고의 성장률을 보였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일본이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심지어 미국조차 몰랐다. 일본은 카메라, 오디오, TV 등을 앞세워 놀라운 속도로 세계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일본은 1968년 서독을 제치고 세계 경제대국 2위 자리에 올랐다.

1970년대 오일쇼크가 터지자 일본 경제는 오히려 호황을 맞았다. 일본 자동차가 다른 나라 자동차보다 연비가 뛰어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수출이 가파르게 성장했다. 1980년대 일본은 세계 최강의 반도체 강국이 된다. 일본이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최대 생산국이 되면서 미국의 반도체 산업은 비상이 걸렸다.

인텔을 위시한 미국 반도체 업체들은 일본의 반도체 업체들이 정부 보조금으로 성장해 미국 시장에 덤핑을 치는 불공정 경쟁을 하고 있다고 미국 정부에 호소하며 일본 반도체 산업 정책의 불공정성을 조사해달라고 요구했다. 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은 NEC, 히타치, 미쓰비시, 도시바 등 7개 일본 기업을 덤핑혐의로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 제소했는데 이후 인텔, AMD, 내셔널세미컨덕터 등 미국 반도체 기업들의 일본 기업들을 대상으로 한 덤핑 관련 제소가 이어졌다. 이 와중에 인텔은 일본과의 경쟁력에서 밀리는 D램을 포기하고 비메모리 쪽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그러자 미국 정부는 자국 반도체 기업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을 본격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했다.

1인당 국민소득 미국을 앞지르다

1980년대 중반 들어 미국의 경제패권 자체가 일본의 경제력 때문에 위협받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의 자동차와 전자제품을 비롯한 일본 상품 전체가 세계적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면서 미국 상품을 시장에서 몰아내기 시작했다. 일본 상품의 세계시장 점유율이 파죽지세로 커지면서 10%를 넘어섰다. 일본의 무역흑자 역시 대규모로 늘어났다. 제조업 강국 일본은 철강, 자동차뿐 아니라 당시 첨단산업인 반도체에 이르기까지 미국보다 훨씬 나은 경쟁력을 보였다. 1985년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1만5000달러 정도였는데, 일본은 1만8000달러를 넘어서 1인당 국민소득이 미국을 앞질렀다.

일본의 국민소득이 올라가자 일본 정부는 저축을 장려했고, 이것은 높은 투자증가율로 이어졌다. 상품 수출 못지않게 일본의 자본 수출이 활발해졌다. 일본 은행들은 자산규모와 시장가치 면에서 세계 정상을 휩쓸었다. 1980년대 중후반 세계 10대 기업을 살펴보면, 일본 통신사 NTT가 1위를 차지했고 이어 일본 은행 5개, 일본 증권회사 1개, 도쿄전력이 포함돼 있었다. 10위 안에 무려 8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반면 미국은 IBM(2위), 엑슨(4위) 단 2개의 기업만 있을 뿐이었다. 이를 세계 50대 기업으로 확대해도 3분의2가 일본 기업들이었다. 미국이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무렵 한국의 국내총생산은 2023억달러로, NTT 시가총액의 70% 수준에 불과했다. 올림픽을 개최하는 국가의 GDP가 일본 한 개 기업의 시가총액보다도 못하다는 점에서 당시 일본의 경제 규모가 얼마나 엄청났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의 대일본 무역적자가 극심해지고 일본과 서독의 경제력이 강해지자 미국의 무역적자가 급속히 늘어났다. 1985년 미국 무역적자는 GDP의 3%에 육박하는 1336억달러에 달했는데 이 가운데 일본과 서독으로부터의 무역적자가 각각 37.2%와 9.1%였다.

미국은 무역적자가 심해지자 일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특허법을 전면에 내세워 일본 기업들이 미국 기업의 특허를 도용해 세계시장을 제패했다고 공격했다. 미국 기업들이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연이어 소송을 제기했고 이후 일본은 오랜 기간 특허 도용 시비에 휘말리게 된다. 특히 반도체 산업과 전자 산업 분야에서 일본이 호되게 당하게 된다. 미국 정부는 1988년 슈퍼 301조로 불리는 초법적인 무역법을 제정해 일본 기업들을 전방위로 압박했다.

비극의 씨앗 ‘자이테크’, 일석삼조 돈놀이

1971년 5월 타임지 표지. 일본 가전제품 선두주자인 소니의 모리타 아키오 회장을 다뤘다.
1971년 5월 타임지 표지. 일본 가전제품 선두주자인 소니의 모리타 아키오 회장을 다뤘다.

일본 기업의 기세는 내부로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수출보다는 손쉬운 돈벌이의 유혹에 빠진 것이다. 1980년대 초반 일본 기업들은 ‘자이테크(재테크의 일본식 발음)’라는 자산운용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자이테크 수익이 크니 자연히 영업에는 소홀하게 되었다. 자이테크 투기가 본격화된 것은 일본 기업들이 역외시장인 런던 유로본드 시장에 접근하면서부터였다. 역외시장이란 자국의 규제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금융시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표적인 역외시장으로는 유로통화시장과 유로채권시장이 있다.

1981년 일본 대장성은 금융자유화 조치의 하나로 일본 기업들이 유로본드시장에서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발행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신주인수권부사채란 채권을 산 사람이 일정기간 경과 후 일정가격으로 발행회사의 신주를 인수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채권을 말한다. 일본 기업들은 자사 주가가 오를수록 BW 채권 값이 따라 올랐기 때문에 아주 낮은 이자율로 채권을 발행할 수 있었다. 게다가 엔화가치 상승이 지속되는 점을 이용해 달러표시 BW를 발행한 뒤, 통화스와프(swap) 시장에서 엔화표시 채무로 바꾸어 엔화자금을 일본으로 끌어들였다.

‘통화스와프’는 만기에 계약 당시 환율로 원금을 다시 반대 방향으로 매매하는 거래이다. 이에 따라 당시 가치가 떨어지는 달러 대신 가치가 올라가는 엔화를 조달해 만기시점에 환차익까지 덤으로 얻었다. 그리고 통화스와프는 통화의 교환 외에 금리의 교환도 수반되어 양국 간의 금리 차이를 계산했기 때문에 일본 기업들은 자금조달 과정에서 마이너스 이자를 지급했다. 곧 돈은 돈대로 빌리면서 오히려 이자를 받았다. 더 나아가 조달한 자금을 주식시장에 투자하거나 연 8%를 보장하는 증권사 투금계정에 집어넣어 막대한 차익을 남겼다. 돈을 빌리면서 되레 이자까지 받고 또 빌린 돈을 예치하고 이자를 받으니 꿩 먹고 알 먹는 셈이었다. 더구나 만기 때 엔화를 달러로 바꾸어 갚으니 환차익까지 남았다. 일석삼조였다.

게다가 당시 미국은 두 자릿수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19%대의 고금리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는 일본 우대금리 6%보다 3배나 높았다. 일본 투자자 입장에서는 미국 채권에 투자하면 일본에서보다 3배 이상 높은 투자수익률을 올릴 수 있었다. 이로써 일본 기업가들 사이에선 돈 놓고 돈 먹는 일명 ‘자이테크’ 열풍이 분 것이다.

이렇게 재테크로 번 돈은 다시 일본 주식시장과 부동산에 투자되어 활황 장세를 이루었다. 그러자 자산 가격이 치솟기 시작했다. 버블이 시작된 것이다. 일본 기업들은 수출로 번 돈을 기업에 재투자하지 않고 주식시장과 부동산에 투자했다. 마침내 일본 주식시장 시가총액이 1987년 미국을 앞섰다. 땅값 역시 마찬가지였다. 버블이 한창일 당시 도쿄 땅을 팔면 미국 땅 전체를 살 수 있었다. 1988년이 되자 세계 10위권 은행은 모두 일본 차지가 되었다. 버블의 한가운데 있을 때는 누구도 위기를 감지하지 못했다. 일본의 장기불황은 이렇게 형성된 거품이 붕괴되면서 시작됐다.

본격적인 일본 견제, 1985년 플라자합의

1980년대 들어 미국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여러 계획을 모색했다. 미국은 그간 자유무역주의를 줄곧 주장해왔으나 경기침체와 물가상승이 동시에 발생하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지자 자국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자유롭지만 공정하기도 한 무역’을 강조했다. 곧 보호무역주의를 택한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1983년부터 시작된 일본 반도체에 대한 본격적인 규제였다. 미 정부는 일본이 자국 반도체 기업에 보조금 수억달러를 줬다며, 반덤핑혐의로 조사에 나섰다. 동시에 미국 기업들은 특허 침해를 빌미로 일본 기업들을 공격했다. 당시 일본은 세계 최대 메모리반도체 생산국이었으나 이로써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 이병철은 도쿄에서 반도체 사업 시작을 선포한다.

1980년대 미국은 경기진작과 군사비 지출 확대 등으로 재정지출이 증가해 재정적자에 시달렸다. 이렇게 재정적자와 무역적자가 같이 늘어나는 것을 ‘쌍둥이 적자’라 한다. 미국은 이를 줄일 방안을 찾아야 했다. 그들은 손쉬운 방법, 곧 환율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우격다짐을 과시한다. 1985년 9월 22일, 미국 재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는 뉴욕 플라자호텔로 선진 4개국 재무장관을 은밀히 소집했다. 베이커는 일본에 엔화가 너무 저평가되어 미국의 무역적자가 심화되니 엔화 강세를 유도해 달라고 강력히 요청했다. 미국이 시장원리에 맡겨야 할 외환시장에 각국 정부의 개입을 요청한 것이다.

베이커의 압박에 일본과 서독은 수입 물량조정, 관세 인상과 같은 직접적인 조치로 타격받는 것보다는 환율 조정이 그나마 받아들일 만하다고 판단했다. 특히 일본은 핵우산과 자위대 문제 그리고 과도한 무역흑자로 더 이상 미국과 마찰을 일으킬 수 없는 형편이었다. 결국 각국 재무장관들은 달러 가치, 특히 엔화에 대한 달러 가치를 떨어뜨리기로 합의했다. 이것이 이른바 ‘플라자합의’다. 이 합의로 미국은 엔화와 마르크화를 대폭 평가절상시킴으로써 달러를 평가절하한 셈이 되어 위기를 넘겼다. 달러는 세계 기축통화이기 때문에 스스로 평가절하할 방법이 없다. 곧 상대방 통화를 절상시켜야 달러의 평가절하를 달성할 수 있다.

플라자합의 직후 엔달러 환율 추이

각국 정부가 외환시장 개입에 나선 다섯 달 뒤인 1986년 1월, 1달러당 엔화 환율이 259엔에서 150엔으로 떨어졌다. 엔고는 처음엔 일본의 구매력을 배가시켰다. 단기간에 엔화의 구매력이 40% 오르자 달러 표시 상품가격은 그만큼 하락했다. 일본은 미국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일본중앙은행이 엔고에 따른 경기둔화를 우려해 기준금리를 대폭 내리자 부동산과 증시가 폭등했다. 닛케이지수는 3년 동안 3배, 부동산은 한 해 70%씩 뛰었다. 일본에 투기 광풍이 불었다. 게다가 배럴당 1985년 11월 31.3달러까지 치솟았던 석유 가격이 1986년 3월 10.4달러까지 떨어지면서 세계경제에 훈풍이 불었다. 이렇게 인플레이션 압력이 해소되자 각국은 국제 공조 아래 금리를 내렸다. 미국의 시장금리가 다른 나라들보다 더 빠르게 하락해 달러화는 더 큰 폭으로 떨어졌다. 1987년까지 달러 가치는 엔화 대비 42%, 마르크화 대비 38% 절하되었다. 1988년 1월 엔화는 127엔까지 하락해 2년여 사이에 2배 가까이 올랐다. 이를 현재 상황에 비추어 생각하면 얼마나 큰 변화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일본의 비극은 여기에서 싹텄다. 그동안 일본이 사들인 미국 국채의 실질가치가 반 토막 나 미국은 일본에 대한 부채를 반으로 탕감시킨 효과를 보았다.

1984년까지만 해도 미국은 모토로라, 인텔, 마이크론 등을 앞세워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전이 일어났다. 1985년 일본의 DRAM 생산수율이 미국 최고 수율인 50%보다 훨씬 높은 80%에 도달했다. 이때부터 일본산 반도체 수출이 미국을 앞서기 시작했다. 이후 반도체 공급과잉 현상이 발생하면서, 일본 기업들은 미국 반도체 가격보다 10%나 싼 덤핑 공세를 퍼부었다. 미국은 이를 일본 정부의 보조금 지원 등 불공정 행위의 결과로 보고 일본에 대한 통상압박을 시작했다. 통상압박의 정점은 상무부의 직권조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직권조사란 기업들의 제소 없이도 특정국 수출품의 덤핑 여부 등을 조사해 높은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매우 강력한 무역제재 수단이었다. 결국 일본은 1986년 미국과 ‘미·일 반도체 협정’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일본 반도체에 대해 관세를 100%로 높였다. 게다가 일본은 당시 10% 수준이던 일본 내 미국산 반도체 점유율을 1992년까지 20%로 끌어올려야 했다. 결국 일본은 기존의 반도체 저가 수출을 중단해야 했다. 이로써 일본의 반도체 산업과 전자 산업이 사양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일본 기업들은 D램에서 하나둘씩 손을 떼기 시작했다. 반면에 이는 한국 반도체 기업에는 기회로 작용해 한국 반도체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 최대 D램 생산업체 엘피다(NEC·히타치 합작회사)는 2012년 끝내 파산했다.

1985년 플라자합의 뒤 4차례나 더 환율조정 협의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은 이제 환율 하락 속도가 너무 지나치다고 느껴졌다. 달러화 약세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무역적자 비중은 계속 확대되었다. 달러화 가치 폭락에도 미국의 적자가 개선되지 않자, 달러의 평가절하는 이제 그만하기로 했다. 미국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번에도 무역적자 원인을 외부에서 찾았다. 일본과 서독이 미국 물건을 사주지 않아 무역적자가 늘어나는 것이라 보았다.

확대되는 미·일 갈등, 소련 잠수함 사건

미국은 1987년 2월 파리 루브르에서 선진 6개국(프랑스·서독·일본·캐나다·미국·영국) 재무장관 모임을 주선해 미국의 뜻을 전달했다. “더 이상의 달러가치 하락은 각국의 경제성장을 저해한다”며, 각국이 내수경기를 살려 미국 상품의 수입을 늘려달라는 요지였다. 미국은 금리를 인상하여 달러 약세를 막고, 다른 나라들은 금리를 내려 내수를 부양시켜 미국 상품을 수입하자는 것이 미국이 요청한 루브르합의의 요체였다.

냉전시대 미국은 소련 잠수함의 위치 추적을 위해 소련 기지 근처에 매복해 있다가 잠수함이 발진하면 그 뒤를 따라다니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미국의 수중음향탐지기에 소련 잠수함이 사라졌다. 즉 소련 잠수함이 미국 근해에 침투해도 발견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소련 핵잠수함이 바로 미국 코앞에 와 있다고 생각하니 미국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알고 보니 이는 일본의 고급공작기계가 소련으로 판매되어 일어난 일이었다. 일본의 도시바기계가 ‘코콤(COCOM·대공산권수출통제위원회)’의 규제를 위반해 몇 차례 선박 프로펠러 가공 기계를 소련에 판 것이다. 미·소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냉전시대라 서방국가들은 ‘코콤’이라는 기구를 만들어 군수물자가 ‘적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했는데, 도시바기계가 이를 무시하고 몰래 소련과 거래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1987년 3월 양국 신문에 보도되자 미국은 펄펄 뛰었다. 미·일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나카소네 당시 일본 총리가 공개적으로 사과했고, 도시바기계의 사장은 물론 도시바그룹 회장도 물러났다. 그래도 미국 사회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미국은 제재에 들어가 도시바기계의 대미수출은 4년간 중단됐다. 도시바그룹 전체가 미국 정부와 계약을 할 수 없게 됐다. 이로써 양국 간의 분위기는 냉랭해졌다.

금리를 올려야 할 판에 금리를 내리다

당시 일본 경제는 루브르합의를 받아들일 상황이 아니었다. 경제 활황과 자산 가격 폭등으로 오히려 금리를 올려야 할 판국이었다. 하지만 잠수함 사건이 터지자 미·일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어 미국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게 플라자합의와 더불어 일본 경제에 불행의 단초가 되었다. 이후 일본은 내수부양을 위해 5조엔의 재정투자와 1조엔의 감세를 발표했다. 이미 과열 조짐을 보이던 일본 경제는 그 뒤 폭발적으로 팽창한다. 일본은 올려야 할 기준금리를 오히려 0.5% 내리고 내수부양을 위한 각종 대책을 도입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부동산 경기 부양이었다.

당시 일본 은행들은 부동산 경기가 활황세임에도 주택담보비율(LTV· Loan to Value ratio)을 경쟁적으로 120%까지 올렸다. 이는 10억원짜리 아파트를 대출 끼고 구입하기 위해 은행에 가면 12억원까지 대출해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로써 너도나도 부동산 구입 대열에 끼어들어 1980년대 후반 일본의 부동산 버블이 극에 달했다. 이렇게 일본은 미국이 강제한 두 합의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버블을 만들고, 그 버블이 터지면서 이른바 잃어버린 30년의 늪에 빠지게 된다.

홍익희 세종대 대우교수·‘월가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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