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실련, 금융정의연대,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지난해 11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론스타의 ISDS(투자자-국가분쟁) 협상 제안에 대한 시민사회단체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경실련, 금융정의연대,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지난해 11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론스타의 ISDS(투자자-국가분쟁) 협상 제안에 대한 시민사회단체 입장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IMF 당시 미국이 왜 한국 경제를 IMF 관리체제에 집어넣으려 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IMF와 협상하는 과정에서 풀렸다. 미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 경제를 ‘팍스 아메리카나’로 일컬어지는 미국 주도의 경제 틀에 맞추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한국의 경제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미국은 한국 경제의 체질을 ‘관치에서 미국식 경제체제, 곧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한국 경제의 낡은 틀을 깨부수기 위해서는 IMF를 통한 관리가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협상 끝에 IMF는 550억달러의 패키지 자금을 빌려주는 조건으로 우리 금융산업의 무장해제와 주요 경제정책의 감독권까지 틀어쥐었다.

IMF가 아닌 미국과의 협상

IMF는 출자액에 따라 지분을 갖는다. 따라서 IMF 구조상 실질적인 운영권은 지분이 가장 많은 미국이 줄곧 장악해왔다. 다만 IMF 구상을 처음 제안하였던 영국의 입장이 고려되어 총재만큼은 지금껏 유럽이 맡아왔다. 당시 미셸 캉드쉬 총재가 부지런히 서울을 들락거렸고, 휴버트 나이스 단장이 이끄는 대표단과 한국 정부가 협상을 밀고 당겼다.

그러나 말이 IMF 대표단과 협상이었을 뿐, 실제로는 미국과의 협상이었다. 미 재무차관보 데이비드 립튼이 1997년 11월 30일 극비리에 서울에 들어와 협상을 막후에서 지휘했다. 립튼 차관보는 IMF를 관할하는 재무부 책임자였다. 당시 한국 상황에서는 그가 곧 IMF였다. 협상장은 힐튼호텔 19층이었고, 립튼 차관보는 이 호텔 10층에 여장을 풀었다. 나이스 단장은 부지런히 10층을 들락거리며 차관보의 지시를 받아왔고 협상장에 돌아와서는 이를 그대로 요구했다. 협상은 칼자루를 쥔 그들 의도대로 결정되었다.

관치금융의 종말

그때 그들이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한국은 그간의 일본식 금융시스템, 곧 관치금융을 버리고 미국식 자본주의로 대체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미 합의 이전에 워싱턴에서부터 결정되었던 사항이었다.

당시 미국 재무부는 그 무렵 한국의 금융 관행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치료하기 힘든 중증이라고 여겼다. 로버트 루빈의 자서전 ‘글로벌 경제의 위기와 미국’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견해는 갈수록 한국에서 대대적인 개혁이 외면되는 한 그 어떤 조치로도 시장의 신뢰를 회복할 수 없다는 쪽으로 쏠렸다.… 문제가 되는 한 가지 관행은 ‘관치금융’이었다. 그것을 통해 정부 관리들은 누구에게 융자해줄 것인지 은행들에 지시할 수 있었다. 그 같은 관행은 이른바 ‘정실자본주의’라고 일컬어졌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은행들은 기강이 없었다. 기업에 호의를 베푸는 은행들은 도산하는 일이 없도록 보호받았으며, 사실상 금융에 대한 견제라고는 없는 상태였다. 한국은 경제가 되살아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처해야 했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 관계자들과의 협상이나 데이비드 립튼과의 대좌에서 한국 관리들이 제시한 방안은 미흡했다.”

협상이 끝난 후 200여 항목에 이르는 방대한 이행각서에 김영삼 대통령은 물론 김대중 후보 등 대통령 출마자들까지 서명해야 했다. 550억달러의 패키지 자금 가운데 실제로 갖다 쓴 돈은 195억달러였는데, 그나마 우리 국민들의 금모으기 등으로 이마저 4년 안에 다 갚았다. 그러나 IMF의 후유증은 컸다.

병 주고 약 준 미국

1997년 12월 3일 IMF가 한국에 총 583억달러의 자금을 지원하기로 확정했음에도 국가부도 위험으로 환율이 치솟았다. 12월 5일 IMF로부터 52억달러가 들어왔지만 이 돈은 중앙은행의 창고에 쌓이기도 전에 곧바로 나라 밖으로 빠져나갔다. 한국 정부는 IMF와 협상이 타결되면 외국계 금융기관들의 자금인출 사태가 진정되고 국제사회의 신뢰도 회복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실상은 반대였다. IMF를 출발한 달러는 서울 도착 즉시 빠져나갔다. 해외투자자들은 그동안 한국에 달러가 부족해 대출을 적극적으로 회수하지 못했으나 IMF로부터 달러가 유입되자 기회는 이때라며 서둘러 대출을 회수해갔다. 금융시장의 혼란은 좀처럼 개선될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졌다.

외환시장에 모라토리엄의 위기감이 점증되었다. 12월 10일 서울 외환시장은 개장 37분 만에 거래가 중단되었다. 미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이 하루 상승 제한폭인 1565.90원까지 폭등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달러화를 팔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환율이 연초 800원대에 비해 2배가 된 것이다. 12월 18일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우리나라 외환보유고는 고작 39억달러였다. 12월 23일에는 우리나라로서는 이제 더 이상 어떻게 손써 볼 수 없는 마지막 상황에 몰렸다. 환율이 1960원까지 치솟았다.

이렇게 우리가 국가부도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위기적 상황을 타개해준 것은 그래도 미국이었다. 1997년 12월 19일 백악관에서 클린턴 대통령 주재로 국가안보회의가 열렸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 등이 둘러앉았다. 대통령을 제외한 네 사람이 모두 유대인이었다. 이날 회의의 의제는 한국의 외채 만기연장 문제였다. 우리나라의 운명이 유대인들에 의해 재단되는 순간이었다.

루빈 재무장관은 시장 논리를 들어 한국 채권의 만기연장 문제는 민간 금융기관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한국의 상황을 이끌어온 미국 재무부의 입장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다. 반론이 제기되었다. 코언 국방장관이었다. “한국은 수만 명의 미군이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총을 겨누고 있는 나라다. 한국의 경제위기는 이 같은 상황을 감안해서 풀어가야 한다.” 올브라이트 국무장관도 코언 장관을 거들고 나섰다. 이날 회의의 결과는 한국에 대한 자금지원을 조기에 재개하고, 은행들의 외채 연장을 적극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한국을 옥죄어 왔던 경제 문제가 안보 논리로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세계적 기업 사냥꾼인 칼 아이칸. 2006년 KT&G 지분을 사들여 10개월 만에 40%의 차익을 남기고 되팔았다. ⓒphoto 뉴시스
세계적 기업 사냥꾼인 칼 아이칸. 2006년 KT&G 지분을 사들여 10개월 만에 40%의 차익을 남기고 되팔았다. ⓒphoto 뉴시스

유대인들, 구원투수로 나서다

하지만 한국 외환시장은 아수라장이었다. 12월 23일, 우리나라로서는 이제 더 이상 어떻게 손써 볼 수 없는 마지막 상황에 몰렸다. 이때 구원투수로 나선 사람들이 유대인들이었다. 그린스펀이 자서전 ‘격동의 시기’에서 한국의 외환위기 해결을 위해 자신이 한 역할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서울에 급전을 공급해 한국 경제를 회생시킨 로버트 루빈 당시 미 재무장관은 전 세계 재무장관들의 ‘명예의 전당’에 오를 만하다. 한국 정부는 250억달러의 외환이 있어 끄떡없다고 주장했으나 우리는 곧 한국 정부가 장난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려운 문제는 전 세계 수십 개 대형 은행에 ‘한국 부채를 회수하지 말라’고 설득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전 세계 재무장관, 은행장들의 잠을 일시에 깨우는 기록을 만들었다.”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루빈도 그의 자서전 ‘글로벌 경제의 위기와 미국’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그해 휴가철에 전 세계 재무장관들과 중앙은행장이 잠을 설치게 하는 데 모종의 기록을 수립했다. 하지만 연방 걸어댄 전화는 보람이 있었다. 나는 서머스 차관의 방에서 미국 은행들과 투자은행들에 전화를 걸었다. 뉴욕 연방준비은행장 윌리엄 맥다노는 국제적 상대역들에게 전화했고, 그들은 다시 유럽과 일본의 은행에 비슷한 전화를 했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 IMF와 미국 등 G7 국가들이 자금을 조기에 지원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화가치가 큰 폭으로 반등했다. 이날 미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은 모라토리엄 위기감이 감돌던 12월 23일보다 22.6%가 떨어진 달러당 1498원으로 마감했다. 절체절명의 위기는 이렇게 수습되었다.

하지만 IMF로부터 혹독한 대가를 요구받은 한국 경제는 순식간에 나락으로 추락했다. 외국인에게는 값싼 한국 기업을 사들일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우리나라 최대 기업인 삼성그룹조차 IMF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삼성그룹의 굴삭기가 볼보에, 포크리프트 부문이 클라크에, 화학 부문은 듀퐁과 GE플라스틱에, 석유화학 부문은 아모코에 넘어갔다. 또한 세계경영을 모토로 하던 대우그룹이 공중분해되어 대우자동차가 GM에 넘어갔다. 이 밖에도 두산음료가 코카콜라에, 삼양제지가 프로텍터앤갬블에, 오비맥주가 인터브루에 넘어가는 등 크고 작은 업체가 헐값에 외국인에게 매각되었다.

뿐만 아니다. 당시 외국인 자본은 폭락한 우리나라 상장기업들의 지분을 거저 줍다시피했다. 특히 우량기업과 금융주들을 쓸어담았다. 이때 재미를 본 외국인 헤지펀드는 그 뒤에도 목표물을 정해 대량 공략을 일삼았다. 이러한 외국계 펀드는 주로 유대계로, SK텔레콤을 공격한 타이거펀드, SK㈜를 노렸던 소버린자산운용, 삼성물산을 괴롭힌 헤르메스펀드 등이 있다. 1999년 타이거펀드는 SK텔레콤 지분 7%를 매집한 뒤 적대적 인수합병 위협을 가했다. 하지만 불과 몇 달 뒤 6300억원의 시세차익을 남기고 지분을 SK 계열사에 넘겼다. 또 2003년에는 소버린자산운용이 SK㈜ 지분 15%를 확보해 최대주주에 올라선 이후 기존 경영진 사임을 요구하는 등 분쟁을 벌이더니 결국 1조원의 차익을 남기고 떠났다. 2005년 초 제일은행을 팔아 1조원이 넘는 이익을 챙겼던 뉴브리지캐피털, 한미은행 대주주였던 칼라일펀드 등이 국내에서 돈을 벌어간 대표적 헤지펀드다. 이렇듯 이들 외국계 펀드는 주주총회 개최 요구 등 적극적인 경영참여로 주가를 끌어올린 뒤 대규모 시세차익을 남기고 지분을 정리했다. 그래서 ‘한국은 헤지펀드의 놀이터’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기업사냥꾼 세계에서 영향력이 크기로 소문난 인물은 단연 칼 아이칸이다. 물론 유대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06년 KT&G 지분을 사들여 10개월 만에 40%의 차익을 남기고 되팔았다. 론스타는 우리 외환위기를 틈타 한국자산관리공사와 예금보험공사로부터 5000억원 이상의 부실채권을 사들이면서 진출했다. 2001년 6월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있는 스타타워, 2002년 한빛여신전문, 2003년 4월에 극동건설을 각각 인수한 데 이어, 같은 해 8월에는 외환은행을 인수함으로써 한국에서도 은행업을 시작했다.

론스타는 또 극동건설을 인수한 지 3년도 안 돼 인수자금 대비 3배를 벌었다. 그동안 고배당과 부동산 매각 등으로 최소 3500억원 이상을 현금화했다. 만도기업의 운명도 극동건설과 비슷하다. 고배당과 자산매각 등으로 이미 인수가의 두 배를 안겨주었다. 론스타는 1조3832억원에 외환은행을 사서 3년이 채 안 되어 4조2500억원의 매각차익을 남기고 국민은행에 팔려다 중단된 상태였다. 그 뒤 외환은행은 2012년 2월 배당과 시세차익으로 4조원이 넘는 이익을 챙긴 뒤 하나금융지주에 인수되었다.

16억달러 손실 입힌 JP모건의 장사

IMF 구제금융 이후 외국계 사모펀드가 이렇듯 막대한 수익을 가져간 예는 ‘론스타-외환은행 사례’뿐만이 아니다. 미국계 사모펀드인 뉴브리지캐피털이 1999년에 5000억원을 들여 제일은행을 인수해서 1조1800억원의 매각차익을 얻었다. 제일은행은 현재 스탠더드차타드은행에서 인수하여 SC제일은행이라는 이름으로 새출발했다. 또한 칼라일이 2000년에 4559억원을 들여 한미은행을 인수하여 약 7000억원의 매각차익을 얻고 씨티은행에 팔았다.

JP모건은행은 IMF 외환위기 초기 반 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12건의 채권발행 주간사로 선정되어 모두 40억달러어치 채권을 발행했다. 또 1998년 1월 뉴욕에서 열린 단기외채 210억달러의 만기연장 협상에서 서방채권은행단 대표 역할을 했다. JP모건은 같은 해 4월 국내에서 사상 최대 규모의 ‘파생금융상품 사고’를 쳤다.

JP모건은 1996년 말 동남아 통화가 지나치게 강세를 보이자 거품이 심하다고 보았다. 이를 이용해 동남아채권 연계 신용파생상품을 만들었다. 태국 바트화나 인도네시아 루피아화 가치가 더 올라가면 이를 산 사람이 돈을 벌지만 통화가치가 폭락하면 이를 판 JP모건이 떼돈을 버는 구조였다. 문제는 이를 사줄 만한 멍청이를 찾아야 했다. 이때 걸려든 멍청이가 우리나라 금융사들이었다.

JP모건은 1997년 봄 주택은행·보람은행·SK증권·한국투신·한남투신·제일투신·신세기투신 등 국내 금융기관들에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면서 동남아채권 연계 파생금융상품인 TRS를 사도록 했다. 그리고 겨우 몇 달 뒤 동남아 금융위기가 터져 두 나라 통화가치가 급락했다. 이 때문에 우리 금융사들은 자그마치 16억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한남투신과 신세기투신은 결국 문을 닫았다. 문제 상품의 판매간사를 맡았던 SK증권 또한 자본이 완전 잠식되면서 모그룹인 SK그룹의 자금난마저 야기할 정도로 치명적인 손실을 입었다. 이전까지 잘나가던 보람은행도 1998년 9월 8일 라이벌 하나은행에 합병 당했다.

1997년 들어 외환위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자 국내 주식시장은 폭락세를 보였다. 동시에 외국인의 국내 주식시장 투자제한이 풀렸다. 이때부터 대부분의 우량주식들이 외국인의 손에 넘어갔다. 당시 상황을 보자. 1996년 800대를 웃돌던 주가지수는 IMF 사태가 본격화되던 1997년 연말에 376까지 떨어졌다. 700~800원 수준이던 달러 환율은 1997년 말에는 2000원을 넘볼 정도로 치솟았다. 때문에 이때 들어온 핫머니는 우리 주식을 헐값에 무더기로 쓸어 담았다. 평소 가격의 15% 수준에서 산 셈이다.

경제위기설의 함정

1998년 한 해 동안 외국인의 순매수 상위 5개 종목은 삼성전자·한국전력·삼성전관·엘지전자·삼성화재였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종목들이다. 그리고 외환위기로 폭락한 금융주들을 쓸어 담았다. 2000년 IT 버블이 깨지면서 연초에 1000을 넘겼던 주가지수가 연말에 504까지 떨어졌다. 그리고 지수 600대인 2001년에 7조5000억원어치를 매수했다. 이로써 외국인 지분율이 1999년 처음으로 20%를 넘긴 뒤 2001년 1월 30%대에 진입했다.

외환위기가 치유되어가던 2000년에 국내에서 ‘국가부채와 국부유출 논쟁’으로 경제위기설이 다시 불거졌다. 이는 경기 냉각만 불러온 게 아니라 주식시장에 직격탄을 날렸다. 게다가 2000년은 IT 버블이 깨지면서 무서운 하락이 진행되던 구간이었다. 2000년 연초 1055였던 주가지수는 연말에 504까지 추락했다. 경제위기가 닥칠지도 모른다고 우려한 국내 투자자들이 주식을 내다 팔기에 바빴다. 당시 우리나라 국가부채는 GDP의 22.5%에 불과했다. 일본의 97%, 프랑스 67%, 독일 63%, 미국 57% 등과 비교하면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끼리 난리를 치며 경제를 망가트렸다.

그렇지만 외국인 투자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경제위기설이 터무니없다는 사실을 꿰뚫어봤다. 게다가 IT 거품도 가라앉아 있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우리 주식을 2000년 한 해에만 무려 11조4000억원어치를 사들였다. 이것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에 기록했던 사상 최고 기록인 4조8000억원의 매입을 두 배 이상 넘어선 것이었다.

이렇듯 우리 경제를 사실 이하로 비관적으로 폄하하는 것은 경제심리를 위축시켜 큰 해악을 끼치게 된다. 경제위기설을 함부로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우리 증권시장이 개방된 1992년부터 2004년까지 총합계를 내보면, 외국인 투자가들은 유가증권시장(61조4000억원)과 코스닥시장(6조원)에서 약 67조4000억원 규모를 순매수했다. 이 기간 외국인 지분율은 18%에서 44%로 불어났다.

그 뒤 외국인이 장기 보유한 과실을 본격적으로 수확하기 시작한 것은 2005년부터였다. 이에 따라 국내 증시가 개방된 1992년부터 2008년 9월까지 우리 주식시장에서 외국인 투자가의 누적 순매도액은 9조원을 넘어섰다. 외국인 투자가가 국내 증시에 투자한 자금보다 빼내간 자금이 9조원이나 더 많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코스피 시장에서 외국인이 보유한 주식 잔고액은 2008년 8월 19일 기준 237조7000억원이었다. 시가총액의 30.3%다. 그들이 사들인 금액보다 훨씬 많이 팔았음에도 그들의 시가총액은 단지 13%만 조정되었을 뿐이다. 그들은 투자한 돈보다 더 많이 빼내가고도 우리 상장기업 전체 지분의 30%를 쥐고 있었다. ‘외국인이 국내 주식시장에서 단물을 다 빼먹는다’는 속설이 그다지 과장된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우리나라 은행 주식의 외국인 자본 비중은 60%가 넘는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대기업들의 외국인 주식 비중 역시 50%를 넘고 있다. 그중 태반이 유대계 자본이다. 과연 우리가 우리나라 은행들을 우리 것이라 부를 수 있는가?

외환위기 때 우리는 얻은 것도 있지만 많이 당했다. 하지만 이 속에서 배워야 한다. 지나간, 흘러간 역사가 아니라 현재 숨 쉬고 있는 역사여야 한다. 아팠던 역사는 잊어버리면 안 된다.

홍익희 세종대 대우교수·‘월가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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