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크리스마스 패션쇼’의 장면. 앞줄 왼쪽부터 전주혜 변호사, 곽영미 플로리스트, 강영은 MBC 부국장, 이명순 웨딩드레스 디자이너, 이애리 중부대 교수, 이정순 주얼리 디자이너, 유영미 아나운서.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연극 ‘크리스마스 패션쇼’의 장면. 앞줄 왼쪽부터 전주혜 변호사, 곽영미 플로리스트, 강영은 MBC 부국장, 이명순 웨딩드레스 디자이너, 이애리 중부대 교수, 이정순 주얼리 디자이너, 유영미 아나운서.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관객석의 불이 꺼지고, 무대 위에 조명이 내렸다. 7명 배우의 실루엣이 드러나자 객석에서 잠깐 술렁임이 일었다. 곧 시작할 무대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조명 아래 드러난 얼굴이 익숙해서다. 무대 위 배우는 관객의 엄마, 언니, 친구 또는 동생인 50대 여성들. 지난 7월 4일과 5일, 이틀간 서울 대학로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열린 연극 ‘크리스마스 패션쇼’의 주인공들이다.

연극 ‘크리스마스 패션쇼’는 원래 지난해 11월 무대에 올랐다. 극단 물결 대표이자 연극연출가인 송현옥 세종대 교수가 친구인 전주혜 변호사, 이명순 웨딩드레스 디자이너, 강영은 MBC 부국장, 곽영미 플로리스트, 유영미 아나운서, 이애리 중부대 교수, 이정순 주얼리 디자이너와 함께 힘을 합쳐 만들었다. 이들을 묶은 것은 ‘여성리더스클럽’이라는 이름의 사모임. 각자의 직업을 가진 지 20~30년은 되는 전문직 여성이 모여 친목을 다지던 것이 연극 무대로까지 발전하게 됐다.

이들 대부분은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초반에 사회에 나와 일을 시작했다.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도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30년이 지난 지금에야 여성 두 명 중 한 명이 일을 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22년간 판사로 일하다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전주혜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어디를 가도 언니 대접을 받는 나이가 되고 나니 문득 내가 어떻게 살았었나 곰곰이 생각해보게 됐다”며 “비슷한 경험, 같은 고민을 하던 친구들끼리 둘러앉아 우리 얘기를 그냥 흘려보내기 아쉽다고 말한 게 연극의 시작이 됐다”고 말했다.

‘크리스마스 패션쇼’는 그렇게 살아온 엄마와 언니들에게 바치는 자전적인 연극이다. 현실 세계에서도 늘 그렇듯이 모여 앉아 “크리스마스를 맞아 우리끼리 패션쇼 한번 해볼까?”라는 이명순 디자이너의 제안으로 연극이 시작된다. 워킹 수업을 하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며 자신의 내면 세계에 대해서도 알아가는 과정이 관객석에 있는 여성들에게 한 명 한 명 이야기를 건네는 듯 생동감 있다.

아나운서 출신인 강영은 MBC 기획사업국 부국장은 암 판정을 받고 좌절했던 얘기를 전해줬다. “정밀 검진을 받으러 오라”는 간호사의 연락에도 “일 때문에 바쁜데”라고 망설이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이제는 나를 위해 살고 싶다”고 읊었다. 전주혜 변호사도 마찬가지였다. 엄격하고 공정해야 하는 판사로 20년 넘게 일하다 문득 “내 삶은 어디에 있나”는 질문을 던지게 됐다는 것이다. 3도 중화상을 입을 정도로 심각한 사고를 당하고도 “일해야 한다”고 의사에게 사정했던 이애리 교수나 앞만 바라보고 달려오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나 하나만 사랑했던 남자도 떠나보냈던” 이정순 디자이너 모두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며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연극에 담았다.

송현옥 교수는 일반인이 참여하는 생활 연극이 더욱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가 “피부에 와 닿는 얘기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말 즐기는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고 그냥 말하면 추상적으로 느껴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패션쇼’에서는 이분들이 직접 겪었던 이야기, 실제 있었던 일을 가지고 관객들에게 말을 건네잖아요. 관객과 배우가 쉽게 소통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패션쇼’의 리허설 장면(위)과 피날레 장면(아래).
‘크리스마스 패션쇼’의 리허설 장면(위)과 피날레 장면(아래).

연극을 위해서 배우들은 몇 달 밤을 희생해야 했다. “우리끼리야 한참을 알고 지낸 사이지만,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써야 하는지부터 많이 고민했지요. 김밥으로 저녁을 때우기 일쑤였는데, 그게 연극의 한 장면으로 쓰이기도 했어요.” 송현옥 교수는 일만 해도 바쁜 배우들이 흔쾌히 모여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데 앞장서는 일이 “감동적이기도 하고 신기했다”고 말했다. 전주혜 변호사는 연극을 준비하며 “마치 내 삶을 한데 정리하는 듯했다”고 말했다. “다들 얼마나 바쁘고 힘들어요. 그래도 누구 하나 불평 없이 모여 움직이지 않는 몸 움직이고, 목이 쉴 때까지 연습했지요.” 심지어 연극의 피날레는 이명순 디자이너의 드레스를 입고 패션쇼를 하는 것이었다. “겨우 10미터, 20미터 걷는 게 왜 그리 어려운지. 워킹 연습이 제일 어려웠어요.”

지난해 11월 연극은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올해 6월 다섯 번째로 열리는 공연예술축제 ‘파다프(PADAF·Play And Dance Art Festival)’에 초청작으로 다시 무대에 설 정도였다. 송현옥 교수는 “파다프는 2011년부터 무용과 연극의 융합을 꾀하며 기획된 축제인데, 올해 들어 사진이나 미술 등 다른 장르는 물론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까지 무너뜨리는 커뮤니티 아트(Community Art·공동체 예술)까지 아우르는 융복합예술축제로 변모했다”면서 “일반인들이 무대에 서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점, 쉽게 들을 수 없는 50대 워킹맘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점 등이 좋은 평가를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연극에는 송현옥 교수의 딸인 연극배우 오주원씨를 비롯해 강영은 부국장, 이명순 디자이너, 이애리 교수, 전주혜 변호사의 딸도 무대에 오른다. 이제 한창 사회생활을 시작할 나이가 된 딸들이야말로 엄마들이 연극 무대에 서는 것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는 게 배우들의 설명이다. “연극을 보고 나서 눈물 짓는 딸도 있었고, 비로소 엄마를 이해하게 됐다고 안겨오는 딸도 있었어요. 진짜 소통이 이뤄진 것 같아 보람찼습니다.”

송현옥 교수는 연극 ‘크리스마스 패션쇼’를 더욱 확장시키려고 한다. “기획 단계이기는 하지만 전업주부로 수십 년 살아온 여성들, 평생을 가장으로 짐을 떠안고 살았던 남성들도 무대에 올리려고 준비 중입니다.” 이번 ‘크리스마스 패션쇼’를 통해 연극에 담긴 소통과 이해의 힘을 더욱 믿게 됐다는 얘기다. “제2, 제3의 ‘크리스마스 패션쇼’를 통해 우리 사회가 진솔한 얘기를 듣고 나누는 계기를 마련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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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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