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아메바 컬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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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서피의 시대다. TV를 틀면 채널 여기저기서 요리 프로그램들이 쏟아진다. 형식과 내용물은 달라도, ‘이런저런 것을 넣으면 맛있는 한 그릇의 음식이 만들어집니다’라는 결론에서 벗어나는 것은 없다. 요리만이 아니다. TV 예능 프로그램의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자막은 끊임없이 말풍선이 등장하고, 어디서 웃어야 할지 어디서 울어야 할지 친절히 지시한다. 감상을 위한 레서피인 셈이다. 멘토링이라는 이름으로 펼쳐지는 강연과 강의들 역시 누군가의 인생을 엿보고 베끼려는 욕망이다. 또 다른 형태의 레서피의 나열인 셈이다.

레서피 자체의 존재 이유에 시비를 걸 생각은 없다. 제품엔 친절한 사용설명서가 있어야 하며 여행객에게는 상세한 지도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레서피의 범람이 가져온 상상력의 빈곤이다. 대중매체와 강연을 통해 무차별로 쏟아지는 각종 레서피들은 수용자의 세계를 침범해 그들을 비슷비슷한 또 다른 레서피를 만들어내는 제2의 공급자로 전락시킨다. 거리를 가득 채운 음식점들을 쳐다봐도 계량화된 맛을 제시하는 프렌차이즈 식당들이 대세다. 마찬가지로 같은 용기에 같은 향을 담은 커피 전문점들만이 눈에 띈다. 멀티플렉스라는 이름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대기업 투자 영화의 개봉관 싹쓸이 현상은 이제 화제조차 되지 못한다.

레서피의 범람 속에 모습을 드러낸 힙합 뮤지션이 한 명 있다. 이름은 자이언티. 최근 각종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며 유명세를 한껏 끌어올리고 있는 인물이다. 신(Scene)의 또 다른 힙합 뮤지션 이센스는 자이언티에 대해 이런 트윗을 했다.

“얘가 망하잖아? 한국 음악판 개판된 거라고 여겨도 돼!”

이 과격한 발언에 전적으로 동의하긴 힘들지만, 이센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어렴풋이 짐작 간다.

자이언티의 음악은 독특하다. 힙합이지만, 주류의 힙합과는 다른 질감을 가지고 있다. 힙합은 슬럼가에서 탄생한 음악이다. 격한 리듬과 공격적인 가사를 기본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자이언티의 음악은 고급스러운(!) 어반사운드(Urban) 위에 서정적인 가사를 얹은 이질적인 모양새다. 그의 대표적인 히트곡인 ‘양화대교’의 가사를 들여다보면 이런 식이다. ‘우리 집에는 매일 나 홀로 있었지. 아버지는 택시 드라이버. 어디냐고 여쭤보면 항상 양화대교.’ 물론 자이언티를 알앤비 뮤지션으로 분류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의 음악적 특징이 평이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에 대한 평가엔 또 다른 유의미한 지점이 있다. 거대 제작사를 통해 전달되는 대부분의 상품들은 알앤비소울의 뉘앙스를 슬쩍 가미한 공장 생산의 복제품 댄스음악일 뿐이다. 그런데 자이언티의 알앤비솔(R&B Soul)은 바로 그 대세를 거스른 형태의 것이기 때문이다. 곡마다 리듬과 편곡의 변화가 심하고, 묘하게 발음을 새게 만드는 창법은 기억에 없는 독특한 방식이다. 물론 그의 음악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순수 개성의 창작품이라는 뜻은 아니다.

‘도도해’ 같은 곡의 사운드에선 영국의 기타리스트 로니 조단의 냄새가 나고, ‘키스미(Kiss Me)’에선 알앤비솔 뮤지션 맥스웰이나 존 레전드의 영향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영향의 문제이지, 레서피를 사용한 카피의 범주에 들어있진 않다. 자이언티라는 뮤지션과 그의 음악의 개성을 도드라지게 만드는 방식일 뿐이다. 장르적 유사성 따위의 신조어로 표절을 퉁 치고 지나가는 것과는 다른 것이란 뜻이다.

여러모로 골치 아픈 시대에 어찌보면 한가롭게 느껴질 수도 있는, 어떤 뮤지션의 음악을 소개하는 것엔 이유가 있다. 그의 음악이 들려주는 개인의 취향 때문이다. 인터넷을 통해 세상은 잠시도 쉴 틈 없이 교류하고 연결된다. 이 거대한 네트워크의 시대는 개인의 취향을 실종시켰다. 항상 누군가를 들여다보고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저주다. 자신은 사라진 채 알게 모르게 삼투압되어 평균치의 농도를 맞춘 비슷비슷한 사람들만이 넘쳐난다. 모든 것을 시험을 통해 해결하려고 하는 대한민국의 교육 환경과,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인식하고 공격하는 정치·사회적 환경 역시 이 저주의 다른 이름이다. 남과 다른 나는 존재하기 힘들어진 세상이다. 그래서 자이언티라는 뮤지션을 주목할 분명한 이유가 생긴다.

정규 음악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그의 이력은 흥미롭다. 사실 힙합·인디신의 뮤지션들에게 정규 음악 교육을 운운하는 것이 우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기에 오히려 주류의 음악을 흉내 내려는 뮤지션들이 존재한다는 건 한 번쯤 떠올려볼 만하다. 자이언티의 음악은 그 반대편에 있다. 장기하와얼굴들의 ‘싸구려 커피’가 처음 들려졌을 때처럼 극히 개인적인 기억과 소재를 사용한 노랫말들은 개성과 취향의 힘을 보여준다. 완성도의 문제를 떠나 다르다는 것이 가진 경쟁력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현재 그의 인기를 만들고 있다.

1990년대 초에 등장한 영화감독 쿠엔틴 타란티노는 전 세계 영화팬들에게 그의 등장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영화를 보여주었다. 비디오가게 점원 출신으로 정식 영화 교육을 받지 못한 그가 보여준 자유로운 상상과 스타일은 영화계 주류의 문법에 완전히 반하는 것이었다. 젊은 영화광들은 바로 그 극단적인 개인의 취향에 열광했다. 디즈니영화사에서 쫓겨났던 팀 버튼이 만든 영화 ‘가위손’에 환호성을 올렸던 것과 같은 의미이다.

우리는 착각한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거대한 흐름의 주류문화라고. 하지만 세상을 변화시키고 지금과는 다른 미래로 향하게 하는 것은 일반이 아닌 이반의 문화다. ‘똑같은 것은 심심하고, 지루하다’라고 생각하는 젊은 생각이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어 왔다. 그리고 그것의 출발점은 다시 한 번 개인의 취향이다. 힙합 뮤지션 이센스가 자이언티의 음악에서 발견한 것이 바로 그 점이다. 자기 음악이 있는 뮤지션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 자본의 논리에 의한 똑같은 노래 부르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

무수히 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이 등장하고, 어김없이 상석에는 심사위원들이 앉아 있다. 신인가수를 꿈꾸는 아마추어들의 무대만이 아니다. 가면을 쓴 프로들의 무대에도 감상평을 던지는 심사위원들이 앉아 이 음악을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지에 대해 열심히 설명한다. 음악을 듣는다는 문화예술 감상의 직접적인 행위마저 중간자를 거쳐서 전달된다. 개인의 취향은 휘발된다. 친절한 도슨트(docent)들의 안내를 따라갈 뿐이다. 오디션 프로그램, 혹은 심사위원들의 설명을 들으며 음악을 한 누군가들은 그들의 레서피를 학습하며 비슷비슷해져 간다. TV의 자막과 멘토링도 그 현상에 일조한다. 나의 취향은 어디에 있는가.

이공계의 학문은 객관성을 추구한다. 사물을 3인칭 시점으로 검토한다. 누가 실험하건 똑같은 결과가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사장되어 가는 인문계 학문의 주어는 ‘나는(I)’이다. 세상을 내 주관으로 해석한다. 개인의 취향이 존재한다. 각박한 취업 현실에 이공계를 지망하는 학생이 늘고 있다. 이공계를 우대하는 기업들의 취향 때문이다. 빅데이터를 이용한 최신의 마케팅 방식 역시 각각의 개인의 취향을 모아서 결국은 몰개성의 상품을 만들어 내는 방식이다. 개인의 취향은 어디에 있는가.

그래서 자이언티라는 한 뮤지션의 등장은 흥미롭다. 개인의 취향이 사라진 시대에 역설적으로 그 취향을 간직한 이가 스타가 되는 모습은 잊고 있던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김태훈

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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