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콘서트홀’을 만든 나규환씨.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서울콘서트홀’을 만든 나규환씨.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지난 10월 9일 오후 7시 서울 종로구 대학로10길. 한 공연장 입구에 50대 안팎의 중년들이 긴 줄을 만들었다. 10~20대 젊은이들이 거리를 메운 대학로에서는 좀체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낯선 줄은 ‘서울콘서트홀’의 개관기념 첫 공연, ‘7080 대학 캠퍼스 밴드와 함께하는 대학로 가요제’를 보러온 관객들이었다. 7시30분 공연이 시작되자 220석 규모의 서울콘서트홀은 빈자리를 찾기 힘들었다. 동창모임으로 보이는 팀도 있고, 부부로 보이는 커플 관객도 많이 보였다.

‘내 사랑하는 그대여 정말 가려나 내 가슴속에 외로움 남겨둔 채로~.’

‘나 어떡해 너를 두고 가버리면 나 어떡해 너를 두고 살아갈까~.’

블랙테트라, 휘버스, 샌드패블스, 활주로, 장남들, 로커스트. 1970~1980년대 대학가를 휩쓸었던 밴드 스타들이 총출동했다. 추억의 노래들은 콘서트홀을 순식간에 30년 전으로 돌려놓았다. 가수도 관객도 피가 끓고 가슴에 천둥이 치는 청춘이 됐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는 없었다. 가수와 관객의 거리는 채 한 걸음도 되지 않는다. 흥이 오른 관객들이 모두 일어나 목청껏 지나간 젊음을 불러댔다. 당시 고고장에서 유행하던 팝송이 준비된 2부는 아예 콘서트홀을 고고장으로 만들었다. 열정 넘치는 몇몇 관객은 무대까지 점령하고 몸을 흔들었다.

대학로 공연장은 130곳에 이르지만 대부분 연극홀이다. 음악 전용홀이 전무한 대학로에 ‘서울콘서트홀’이 새로 간판을 올렸다. 원래 SM엔터테인먼트가 뮤지컬 진출을 선언하며 만든 ‘동키홀’이 있던 곳이다. 대학로에서 음악의 부활을 선언하며 ‘서울콘서트홀’을 만들고 7080 스타들을 불러모은 사람은 기업을 운영하는 나규환(58·코펙스 대표)씨다.

나 대표는 노래를 부르고 싶어도 설 무대가 없는 가난한 밴드들의 ‘키다리 아저씨’를 자처하고 나섰다. 홍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인디밴드는 1000개에 달하지만 이들이 공연을 할 수 있는 홍대 클럽은 40~50개가 고작이다. 신인 밴드들은 무대에 서기도 어렵고 무대에 서더라도 밴드들이 손에 쥐는 것은 몇만원이 고작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나마 7080 밴드처럼 올드 보이들은 이마저도 기회가 없다. 대형 콘서트홀은 티켓파워가 있는 아이돌 스타 그룹이나 대형 스타가 아니면 엄두를 못 낸다. 1000석이 넘는 객석을 채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공연시설 갖추고 가난한 신인 밴드나 올드 밴드들을 환영하는 무대는 없다. 대형 기획사에서 만들어진 음악만 유통되는 구조에서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잃어버린 것은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나 대표는 ‘서울콘서트홀’을 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 예정이다.

못다 이룬 꿈을 찾아

나 대표도 공연 때는 기타를 메고 무대에 선다.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해왔나 싶었는데 평범한 사업가였다. 11월 1일(매주 금~일)까지 열리는 ‘7080 대학로 가요제’의 첫 주 일정이 끝난 10월 12일 ‘서울콘서트홀’에서 나 대표를 만나 음악 인연을 들었다. 그는 흥분돼 있었다. “아휴 굉장했습니다. 이렇게 반응이 뜨거울 줄 몰랐습니다. 기대 이상입니다. 가수도 관객도 이런 공연에 목말랐던 겁니다.”

나 대표가 운영하는 코펙스는 휠·캐스터 전문업체이다. 6800여종의 휠·캐스터를 공급하고 있으니 마트용 카트 바퀴부터 시작해서 산업 전반에 필요한 바퀴 종류는 전부 취급한다고 봐도 될 것이다. 세계적인 독일 브리클(Blickle)사의 한국 독점 공급업체에다 4년 전부터는 브리클사의 요청으로 국내에서 일부 제품을 제작해 역으로 독일로 수출까지 하고 있다. 작은 무역회사로 시작해 브리클사와 손잡고 일을 한 것이 26년, 그동안 음악이 그의 인생에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게다가 그는 엔지니어 출신이다. 그런 그가 밴드들을 돕겠다고 나선 이유는 못다 이룬 꿈 때문이다.

그는 음악 좋아하는 큰형의 영향을 받아 중학교 때부터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소풍 장기자랑 무대는 그의 차지였다. 당시 청량리역에서 출발하는 춘천행 기차는 주말이면 청춘들의 낭만열차였다. 열차엔 어김없이 기타를 치는 사람이 있었고 즉석 라이브 공연이 펼쳐졌다. 그도 주말이면 통기타를 메고 청량리를 향했다. 그의 10대를 한 컷으로 표현하면 아마도 그 풍경일 것이다. 고교 졸업 후 해변가요제가 생겼다. 친구들과 함께 밴드를 결성했다. 예선 20일을 앞두고 밴드의 주축이었던 일렉트릭기타를 맡은 친구에게 군대 영장이 떨어졌다. 그는 “참가했다면 대상을 받을 수 있는 곡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다”고 했다.

재수를 하면서 진로를 고민하던 중 기계 관련 무역회사에서 일을 하다 독일 기술학교에 갈 기회가 생겼다. 그의 인생에서 음악은 사라졌다. 그 시대의 가장들이 그랬듯이 엔지니어로 사업가로 20대 후반부터 30대, 40대를 일과 함께 살았다. 다행히 한 번의 꺾임도 없이 회사를 키웠다. 3년 전 매주 목요일이면 가던 한 노인시설의 점심 봉사를 마치고 ‘회사를 갈까 말까’ 고민하다 바로 퇴근을 했다. 웬걸, 회사에선 전화 한 통화 없었다. 오히려 다음 날 출근해 보니 주문이 더 들어와 있었다. ‘놓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지금껏 왜 이렇게 살았나.’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지난 10월 9일 ‘서울콘서트홀’ 개관기념 ‘7080 대학로 가요제’ 첫 공연.
지난 10월 9일 ‘서울콘서트홀’ 개관기념 ‘7080 대학로 가요제’ 첫 공연.

반백의 중년, 홍대 밴드에 도전하다

30년간 꼬불쳐 두었던 꿈을 꺼냈다. 강남에 스튜디오를 만들고 친구들과 함께 음악을 시작했다. 지난해 1월엔 홍대 밴드 모집 광고를 보고 전화를 걸었다. 오디션을 봐야 한다고 했다. 두 명의 기타 선생님을 모셔 벼락과외를 했다. 딥 퍼플의 ‘스모크 온 더 워터(Smoke on the water)’, 까까머리 학창 시절 부르던 애창곡 악보를 반백의 중년이 돼서 다시 달달 외웠다. 악보를 외워온 노력이 후한 점수를 받았다. 홍대 직장인 밴드가 됐지만 성이 안 찼다. 아예 나와서 ‘오늘과 내일’이라는 이름의 팀을 결성했다. 신촌 쎄시봉 클럽을 시작으로 압구정, 홍대 인근 무대에서 공연을 했다. 공연을 본 한국미술협회 관계자가 협회 행사를 하면서 음악을 주관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본격적으로 해보자는 생각으로 기획사를 차렸다. 코펙스엔터테인먼트를 만들고 보니 공간이 필요했다. 지난 7월 ‘서울콘서트홀’을 인수하기에 이르렀다. 요즘 공연 때문에 회사는 거의 오전 근무만 하는데도 잘 돌아간다고 한다. 그는 괜한 걱정을 하고 살았지만 내려놓기까지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영화연출을 공부한 큰 아들 나기홍(28)씨도 의기투합, 공연장 뒤에서 그의 힘을 덜어주고 있다.

서울콘서트홀은 시설 투자만 2억원이 넘게 들었다. 보증금 2억원에 월 임대료는 1000만원이 넘는다. 운영비까지 매달 최소 2000만원은 쏟아부어야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수익을 낼 생각은 없다. 돈 벌 생각하면 대관을 해야겠지만 다양한 기획공연으로 꾸려갈 생각이다.

그가 나름대로 계산기를 두드린 손익계산법이다. “독일 기업과 일을 하다 보니 접대비 등 불필요한 경비에 돈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회사 규모면 월 500만~1000만원은 접대비 명목으로 들겠죠. 또 이 공간을 안 만들었다면 개인적인 음악활동 한다고 몇백만원 들겠죠. 그 돈을 이 공간에 사용하면 수많은 사람이 행복해집니다. 투자할 가치가 충분하죠. 돈 벌 생각이 아니면 얼마든지 재미있는 무대를 만들 수 있습니다.”

개관기념 공연으로는 대학로인 만큼 무조건 7080 대학가요제 밴드들의 공연을 생각했다. 1978년 제1회 해변가요제 출신인 ‘휘버스’의 이명훈이 주축이 돼 1980년대 젊은이의 가요제에서 ‘하늘색 꿈’으로 대상을 받은 로커스트의 김태민, 한국항공대 출신의 록밴드 ‘활주로’ 11기 백인준 등 6팀이 개런티 따지지 않고 “멋있게 첫 공연을 하자”면서 힘을 합했다. 4주 일정의 공연 티켓은 이미 50%, 1500장 이상이 팔렸고 계속해서 판매가 이어지고 있다. 요즘 같은 공연계 불황에 훌륭한 성적표다.

그의 머릿속에는 다음 공연에 대한 아이디어가 가득 차 있다. 무대는 세대, 장르 불문이다. 음악은 나이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젊은 인디밴드에도 장을 만들어 주고 싶다. 궁극적으로는 홍대 일부를 대학로로 옮기고 싶다. 클래식 공연도 ‘오케이’다. 젊은 밴드들도 발굴해 키우고 싶다. 대학가요제를 대신할 대학로 가요제도 구상 중이다. 신인 밴드들에도 기회를 줘서 10석이든 20석이든 티켓 수입을 가져가게 할 생각이다. 매주 월요일에는 음악 소외계층을 초청한 무료 공연도 계획하고 있다.

그는 ‘서울콘서트홀’이 이런 곳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언제든 음악이 있는 곳, 40~50대들이 소풍 오듯 대학로를 오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듣기 위해 대학로를 찾게 만드는 곳, 무대가 없는 친구들이 열정을 토해낼 수 있는 곳, 그리고 음악으로 모두 행복할 수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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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순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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