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조선의 인기 프로그램 ‘난생처음’.
TV조선의 인기 프로그램 ‘난생처음’.

처음엔 그저 그런 어린이 예능 프로그램인 줄 알았다. 전 가족의 TV 등장을 목표로 한 듯 연예인 가족 모두가 안방극장을 누비고 있는 요즘이기에 큰 기대감도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부모님의 심부름을 수행하는 연예인 자녀들을 보여주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할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이것은 좀 달랐다. 단순히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쫓는 시간이 아니었다. 세상살이에 지친 어른들 스스로 자신만의 ‘난생처음’ 순간과 그때의 마음을 돌아보게 하는 마법 같은 시간이었다. 제목도 그냥 처음이 아니라 난생처음이란다. ‘난생처음’(TV조선, 연출 정규훈).

두려웠나요?

엄마 아빠의 품이 마냥 따뜻한 4~5세의 아이들, 세상 속으로 혼자 발을 내디뎌 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 엄마는 조용히 다가가 말한다. 엄마를 위해 심부름 하나만 해달라고. 아이들은 선뜻 응하지 못한다. 심부름이 뭔지 잘 모르지만 본능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혼자 해야 한다는 것도 두려웠다. 오죽했으면 울음부터 터져 나왔을까. 하지만 엄마의 부탁이니 거절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간신히 현관문을 나서지만 다시 돌아오길 몇 번. 도저히 혼자서 길을 나설 수 없는 아이는 친구와 함께 길을 나서기도 했다. 그렇게 아이들의 심부름은 시작되었다.

아이들이 해야 할 일은 아빠 생일상 차릴 미역과 간장 사오기, 아빠가 두고 간 서류 가져다 드리기, 집에 놀러올 이모를 위해 먹을 것 사오기, 앞치마를 두고 등교한 누나를 위해 앞치마 가져다 주기, 어린이집에 있는 여자친구 데리고 집에 오기 등등이다. 엄마의 주문을 듣다 보면 모두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두렵지만 용기를 내본다.

힘들었나요?

엄마 아빠의 응원을 뒤로하고 보무도 당당하게 집을 나섰으나 가야 할 길은 멀었다. 심호흡 크게 하고 사방을 둘러보니 엄마가 알려준 길이 조금씩 보였다. 난생처음 혼자 나선 길이 두렵긴 했지만 구경할 것도 많고, 좋아하는 장난감이나 과자 앞에서 한참을 머물러도 얼른 가자고 하는 엄마가 없어 좋은 듯도 했다. 하지만 가게에 진열된 물건 속에서 엄마가 사오라는 것을 찾아내긴 쉽지 않았고, 파란 돈과 누런 돈을 구별하기도 어려웠고, 계산은 더더욱 힘들었다. 어른들은 척척 잘도 하는데 모든 것이 왜 이렇게 어렵고 복잡한 것일까. 하지만 신기한 것은 엄마의 얼굴을 떠올려보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이 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손에 든 짐은 천근만근, 날은 왜 그리 더운지 땀이 줄줄 흘렀다. 시장 한복판에서 엄마를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결국 애절하게 외쳐본다. “아무도 없어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아이의 모습을 모니터로 지켜보는 엄마의 눈에선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강했다. 노래도 불러 보고, 힘들 때마다 먹으면 힘이 났던 파프리카도 꺼내 먹었다. 엄마가 챙겨준 망고주스를 한 모금 마실 땐 살 것 같았다. 마법의 힘으로 자신을 지켜주던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밴드를 아픈 다리에 붙이니 금방 멀쩡해졌다. 마치 삼신할머니처럼 아이들에겐 그들을 지켜주는 각자의 수호신이 있었다. 힘을 얻은 아이들은 “하나도 힘들지 않아”라고 주문을 외우며 집으로 향했다. 마치 “나는 할 수 있어”라고 주문을 외우는 어른들처럼.

어른 걸음으로 20분 내외면 갔다 왔을 거리를 아이들은 보통 3시간 남짓 걸린다. ‘난생처음’이긴 엄마나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제작진의 보호 아래 심부름을 수행하고 있다고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을 기다리는 시간은 애간장이 탔다. 드디어 집, 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엄마 아빠의 모습이 보이자 아이들의 얼굴은 환해지고, 발걸음은 가벼워졌다. 엄마의 품에 안기는 순간 아이들은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두세 시간 남짓한 혼자만의 외출이었지만, 아이들이 겪었을 세상은 천국과 지옥을 수십 번 오갈 만큼 벅찬 곳이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은 아이들은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 전설의 마라토너같이 성취감에 충만해 있었다.

포기하지 않았죠?

들고 와야 하는 심부름 품목들은 아이들이 감당하기엔 다소 무겁고, 부피도 컸다. 새로 태어난 동생의 기저귀 한 보따리를 질질 끌면서도 결코 손에서 놓지 않았다. 강보에 싸여 방긋방긋 웃는 동생을 위해서라면 누나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기 두 근과 야채, 뻥튀기 한 자루까지 조그마한 아이의 손에 들린 검은 봉지들은 뒤뚱거렸다. 얼마나 무거웠으면 몇 번을 멈춰 서서 긴 한숨을 내쉬며 다 내던져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그래도 친구가 함께했기에 포기하지 않았다. “울지마.” “내가 들어줄게.” 그 짧은 한 마디 말에 힘을 내고 집까지 올 수 있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참아야 하고, 벅찬 길은 친구의 손을 잡고 걸어가면 힘을 얻을 수 있고, 넘어질지언정 포기하지 않으면 끝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을 아이들은 스스로 알게 되었다.

잊지 마세요

처음 엄마 손을 놓고 혼자 대문을 나섰던 날을 기억하는가. 그날이 언제였는지, 맑았는지 흐렸는지, 어디까지 갔다 돌아왔는지, 엄마가 말씀하신 것은 잘 했는지, 당신은 생애 첫 심부름에 대한 기억이 있는가? 분명 첫 심부름의 문턱을 넘었을 것인데, 기억은 사라지고, 감동은 잊은 지 오래이다. 살다보면 때로는 내가 이루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어디쯤인지, 길을 잃고 방황할 때마다 처음 마음 정했던 것이 무엇인지 뒤돌아보지만 그 ‘처음’이 잘 보이지 않을 때도 많았다. 그런데 ‘난생처음’이 그 ‘처음’을 보여주었다.

2009년 ‘스타주니어쇼 붕어빵’(SBS)을 시작으로 ‘아빠 어디가’(MBC)에서 연예인 자녀들의 TV 등장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슈퍼맨이 돌아왔다’(KBS)를 통해 시청자들은 그들의 일상에 더 깊이, 열광적으로 동참했고, ‘오 마이 베이비’(SBS)로 관심의 영역을 확대해 갔다. 하지만 아이들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기획 의도와 달리 회를 거듭할수록 아이들은 PPL의 홍수와 어른들이 만들어주는 인위적 일상의 틀에 갇히는 듯했다. 매일매일 새로운 옷을 입고, 새로운 장난감을 갖고 놀아야 하고, 체험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여러 현장으로 나서야 했다. 이제는 그 아이들이 조금씩 안쓰러워 보인다. 마치 세파(世波)에 시달리며 자신의 꿈을 잃어가는 어른들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혹시 시간이 지나 ‘난생처음’도 길을 잃고 아이들을 자본의 논리 앞에 내몰지 몰라도 아직은 아이들에게만 집중했고, 그것을 보는 감동은 오롯이 어른들이 만끽할 수 있는 ‘순수시대로의 복귀’였다. 어쩌다 어른이 되어버린 자신의 삶이 고달플 때, 수없이 넘어온 ‘난생처음’의 순간은 삶의 특효약이 될 것이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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