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1999년 개봉 당시 포스터.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1999년 개봉 당시 포스터.

복고란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자, 현재에 대한 부정이다. 먹고살 만한, 지금이 행복한 시절엔 과거의 이야기 따윈 등장하지 않는다. ‘왕년에’를 외쳐대는 것은 곧 ‘오늘’이 힘들다는 것을 말하는 간접화법이다. 그래서 복고풍과 리메이크, 재발매와 재개봉은 곧 ‘이곳’에 대한 안쓰러움과 지나간 어느 날의 ‘저곳’에 대한 향수로 해석된다.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 11월 19일 디지털 리마스터링으로 재개봉한다. 빔 벤더슨이 감독하고 라이 쿠더가 음악감독을 맡아 1999년 개봉했던 이 기념비적 영화는 잊혀진 나라 쿠바와 그 음악을 전 세계 팬들에게 전달하며 당시 하나의 현상을 만들어 냈다.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은 그래미 어워즈와 빌보드 차트를 휩쓸었으며, 관련 아티스트들의 솔로 앨범들 역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이들의 콘서트 요청이 쇄도했으며, 변방의 음악쯤으로 이해되던 월드뮤직은 단숨에 붐을 이루며 메인스트림으로 진입했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신드롬이라고 불렸던 이 현상은 세기말의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에게 하나의 감동적인 소재를 제공했고, 20세기를 마감시켰다.

영화는 다큐멘터리이다.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쿠바 혁명을 일으키기 전, 클럽의 뮤지션이었던 주인공들은 긴 시간 동안 자신들의 음악으로부터 소외된 삶을 살았다. 그러다 우연히 쿠바를 방문한 음악가 라이 쿠더에 의해 다시금 녹음 스튜디오로 이끌려왔고, 연주와 노래를 시작하게 된다. ‘당연히’ 곧 이들의 영화와 앨범이 만들어진다. 구두닦이로 생계를 이어가고, 살아가는 것의 즐거움을 잊은 채 칩거하며 소외되었던 예전의 음악가들이 마이크 앞에서 자신들의 음악을 토해내는 장면들이 보여진다.

이 장면은 기록이 연출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무엇’이 되었다. 루벤 곤살레스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이브라힘 페레르가 거칠어진 목소리로 ‘Chan Chan’을 노래할 때, 관객들은 숨죽이며 자신들이 몰랐던 라틴의 매력에 빠져든다. 그것은 단순히 음악이 들려주는 순수한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다. ‘바둑은 슬픈 드라마다’라고 했던 일본의 기사 사카타의 이야기를 빌려 말하자면,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음악은 그들의 삶이 지닌 굴곡과 시대에 의해 잃어버렸던 음악을 다시금 찾았다는, 먹먹한 감정이 담긴 ‘슬픈 드라마’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슬픈 드라마’를 전달하는 방식은 오히려 담담했다. 갑작스러운 라이 쿠더의 제안으로 스튜디오에 들어서 몇십 년 만에 다시금 노래를 시작하는 이브라힘 페레르의 당황스러운 표정과 아흔 살이 넘은 나이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쾌락은 여자와 시가라고 말하는 콤파이 세군도를 편견 없이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선은 관객들의 입가에 미소까지 짓게 만든다. 그리고 그들이 그 힘든, 음악을 잃어버린 시간들을 어떻게 버텨왔는지를 짐작게 만든다.

영화가 전하는 이 슬프지만 아름다운 드라마가 2015년에 다시 도착했다는 것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앞서 말한 대로 현재의 이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시대적 감각 때문이다. 고도성장과 그 그늘 속에서 모두들 지쳐간다. 각종 숫자가 가리키는 지표는 분명 과거보다 이곳이 나은 곳임을 말하지만, 내용물은 그렇지 않다. 몇 년 전 영국 저널리스트 출신의 작가 다니엘 튜더는 자신의 책 제목을 통해 이렇게 설명했다.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15년의 간극을 지나 다시금 도착한 한 편의 영화에 너무 과잉한 호들갑일까?

과거로의 귀환은 꼭 이곳만의 유행은 아니다.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 마이클 제이 폭스 주연의 영화 ‘백투더퓨처’가 지난 10월 21일 전 세계에서 재개봉했다. 1989년 개봉했던 영화 ‘백투더퓨처 2’에서 주인공 마티가 갔던 미래의 해인 2015년 10월 21일을 기념하기 위한 일종의 유머러스한 행사였다. 미국의 각종 토크쇼에는 영화 속 등장했던 자동차와 함께 마티와 괴짜 과학자가 출연해 영화의 재개봉을 축하했다. 영화와 관련된 행사장은 몰려든 팬들로 축제 분위기를 연출했고, 과거에 이 영화를 보았던 젊은 세대들은 이제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극장을 찾는다. 그러나 영화가 25년의 시간을 거쳐 도착한 극장에서 우린 새로운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영화가 꿈꾸었던 미래인 2015년은 얼마나 그대로 이루어졌는가? 그리고 전 시대가 상상했던 낭만은 얼마나 현실이 되었는가?

지난 8월 쿠바와 미국의 두 정상은 양국의 외교관계에 정상화 선언을 했다. 드디어 미국에서 쿠바로 갈 수 있는 직항로가 뚫린 것이다. 아울러 비행기를 세 번이나 갈아타야 갈 수 있었던 변방의 우리에게도 고단한 여정이 마감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쿠바를 가보지 못한, 그러나 쿠바의 낭만을 동경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낮은 탄식이 터져나온다. 그리곤 쿠바로의 여행계획을 서두른다. 그것은 이제 미국의 상업 자본과 다수의 관광객들이 쿠바로 향할 것임을 눈치챘음이며, 아울러 쿠바가 곧 그 본래의 순수성을 잃어버릴 것을 안타까워함이다.

행복은 숫자에 있지 않다. 행복지수의 상위에 올라있는 국가들의 면면이 그것을 증명한다. 한 작가는 베트남을 방문한 뒤 이런 문장을 남기기도 했다. ‘잃어버린 내 누이 같은 나라’. 그가 본 것은 높은 건물과 멋진 자동차가 아니었다. 우리가 발전이란 단 하나의 명제 속에서 잃어버린 인간에 대한 애정과 예의일 것이다.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은 이들의 미국 카네기홀 공연으로 마침표를 찍는다.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로 살아가던 주인공들이 성공을 상징하는, 그리고 뮤지션이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카네기홀에서 연주와 노래를 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감동이다. 관객들은 기립하고 박수는 끝없이 이어진다. 그러나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이런 성공의 모습에 담겨져 있지 않다. 그것은 영화적 엔딩일 뿐이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멤버들의 삶이 전하는 메시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에 도착한 주인공들은 공연을 앞두고 거리를 구경하며 돌아다닌다. 그런 그들 눈에 쇼윈도에 진열된 미국의 유명 재즈 아티스트들의 인형이 들어온다. 멤버 중 누군가가 묻는다.

“저 트럼펫을 연주하는 친구가 누구였지?”

다른 멤버가 대답한다.

“글쎄, 누군지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음을 굉장히 높게 불었던 것은 기억해!”

그들이 대화를 나눈 그 아티스트는 재즈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루이 암스트롱이었다. 음악을 모르는 이들도 알고 있을 법한 불세출의 아티스트를 쿠바의 뮤지션들은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역설적인 감동을 선사한다. 음악이란 지식이 아니며, 삶을 노래하고 아름다움을 들려주는 것은 누구누구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것을. 철저히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있던 그들이 그 삶으로부터 건져올린 것은 성공이라는 세속적인 것이 아닌, 살아감의 순수함과 음악에의 본질이었던 셈이다.

영화는 홍보되고, 또다시 많은 이들이 극장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 속으로 들어가 현재의 삶을 돌아볼 것이다. ‘백투더퓨처’의 마티가 황홀해하던 2015년은 도착해 있는가? 지금 이곳의 삶이 행복하다면 우린 왜 세기말에 상영되었던 과거를 소환해 온 것일까? 담배를 물고 쿠바 아바나의 거리를 무심한 듯 걷고 있는 이브라힘 페레르의 모습은 그런 질문들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김태훈

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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