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1일 개봉한 ‘007 스펙터’. ⓒphoto MGM/UA
지난 11월 11일 개봉한 ‘007 스펙터’. ⓒphoto MGM/UA

“본드, 제임스 본드.” 한 주인공으로 50여년간 이어온 영화. 모든 스파이 영화의 선배. ‘007’ 시리즈의 24번째 작품 ‘스펙터(SPECTRE)’가 개봉했다. 영화사(史)에서 제일 오래된 시리즈다 보니 영화 안팎으로 숨겨진 이야깃거리가 많다. 몰라도 재미있지만, 알면 더 재미있다. 제임스 본드와 제이슨 본(‘본 아이덴티티’ 시리즈 주인공)이 헷갈리는 초보자부터 ‘스펙터’라는 제목이 무슨 의미인지 궁금했던 영화 팬까지. 007 시리즈를 얇고 넓게 알아보자.

첫 007 영화인 1962년작 ‘살인번호(Dr.No)’에서 제임스 본드를 연기한 배우는 숀 코너리다. 트럭 운전사였던 숀 코너리는 제임스 본드 역을 맡기 전까지 연기 수업을 받아본 적 없던 무명 배우였다. 숀 코너리의 어색한 연기와 노동자 계급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007 영화의 원작자 이언 플레밍은 캐스팅에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동제작자인 해리 살츠만과 알버트 R. 브로콜리가 그의 남성적인 매력과 액션 소화능력을 높게 평가해 제임스 본드 역으로 낙점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숀 코너리는 남성적인 제임스 본드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총 6편의 007 시리즈 영화에 출연했는데, 그중에는 시리즈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골드핑거(Goldfinger)’도 있다. 영국 정부로부터 살인면허(007)를 인정받은 스파이로서 물불 가리지 않고 목표를 달성하는 제임스 본드의 모습은 후대의 스파이 영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숀 코너리의 뒤를 이은 제임스 본드는 호주 출신의 패션모델 조지 라젠비였다. 그는 비운의 007로 불린다. 숀 코너리가 출연료 문제로 하차해 30세의 나이로 제임스 본드 역에 발탁된 조지 라젠비는 6편 ‘여왕 폐하 대작전(On Her Majesty’s Secret Service)’ 한 편에만 출연하고 하차한다. 사실 조지 라젠비의 외모는 원작에서 묘사된 제임스 본드와 가장 닮았다. 연기 경력이 전무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액션을 대역 없이 직접 소화하는 등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제작진과 갈등을 빚던 라젠비는 결국 하차했다.

그러나 단 한 편만 남긴 조지 라젠비의 007은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를 설명할 때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여왕 폐하 대작전’ 말미에 본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결혼을 한다. 그리고 결혼식 당일, 악당 조직 ‘스펙터’의 수장 블로펠드에 의해 아내를 잃는다. 이 영화는 본드의 인간적인 매력을 보여주는 작품인데 ‘본드답지 않다’며 싫어하는 팬들도 많다. 007 시리즈의 팬으로 알려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자신의 영화 ‘인셉션’에서 이 영화에 나오는 산악스키 액션 장면을 오마주하기도 했다.

단언컨대 최고의 본드, 로저 무어

조지 라젠비의 짧고 굵은 출연 때문에 더욱 빛나는 최장수 제임스 본드가 바로 로저 무어다. 로저 무어는 8편 ‘죽느냐 사느냐(Live and Let Die)’부터 12년 동안 일곱 편의 007 영화에 출연했다. 로저 무어 이전에 숀 코너리가 잠시 돌아와 7편 ‘다이아몬드는 영원히(Diamonds Are Forever)’를 찍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출연료를 두고 갈등을 빚으면서 영화 제작진은 3대 제임스 본드를 물색하게 됐다. 이때 로저 무어를 추천한 사람이 다름 아닌 숀 코너리였다고 한다.

로저 무어는 왕립연극학교 출신으로 45세의 고령에 제임스 본드를 맡아 품위를 갖춘 ‘정중동(靜中動)’의 액션을 선보였다. 숀 코너리가 연기한 1대 제임스 본드가 저항하지 않는 상대를 총으로 쏴서 죽일 만큼 냉혈한 모습을 보여준 반면, 로저 무어 때부터 제임스 본드는 유머와 재치를 갖춘 신사였다. 로저 무어가 연기한 작품 중 ‘나를 사랑한 스파이(The Spy Who Loved Me)’와 ‘유어 아이스 온리(For Your Eyes Only)’는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로저 무어는 2004년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역대 최고의 제임스 본드’로 꼽혔다.

12년 동안 제임스 본드를 연기하고 고령으로 은퇴한 로저 무어의 빈자리를 채운 건 ‘상남자’ 티모시 달튼이었다. 티모시 달튼의 제임스 본드는 갈라진 턱과 차가운 눈매만큼이나 냉정하고 진지한 캐릭터였다. 그가 출연한 두 편의 007 영화 ‘리빙 데이라이트(The Living Daylight)’와 ‘살인면허(License To Kill)’는 현실적이고 잔혹한 묘사를 통해 액션영화 같았던 007 시리즈를 다시 첩보물 장르로 돌려 놓았다. 특히나 살인면허를 취소당하면서까지 사적인 복수를 감행하는 ‘살인면허’는 시리즈 전체의 분위기와 이질적이면서도 매력이 넘친다는 평이다. 다만 흥행 성적이 매우 저조했고, 영국 측 제작사와 미국 측 제작사 사이에 판권 문제가 불거지면서 일찍 제임스 본드 역에서 하차했다.

007이 돌아왔다, 피어스 브로스넌

피어스 브로스넌은 아일랜드 출신의 연기자로, 영국 드라마 ‘레밍턴 스틸’ 시리즈로 이름을 알렸다. 원래도 007 시리즈와 인연이 깊은데, 11살 때 ‘골드핑거’를 보고 배우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리빙 데이라이트’에서 티모시 달튼 대신 제임스 본드를 연기할 뻔했으나 무산됐고, 달튼이 하차한 후 ‘007 되살리기’의 막중한 임무를 띠고 ‘골든아이(Goldeneye)’에 투입됐다. 고급스럽고 지적인 이미지와 능글맞은 연기가 합쳐져 “딱 제임스 본드”라는 평가를 받는다.

‘골든아이’는 구소련 붕괴 이후를 다룬 첫 작품으로, 여러 면에서 007 시리즈의 전통을 일신했다. 우선 본드의 상관인 M이 여성으로 교체됐다. 이때 M으로 캐스팅된 주디 덴치는 ‘스카이폴’까지 활약했다. 또 본드가 기관단총을 난사하고 전차를 끌고 적을 추격하는 등 액션 히어로다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흥행 성적도 좋았다. 이 작품을 연출한 마틴 캠벨 감독은 이후 다니엘 크레이그의 첫 007 작품인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도 연출하면서 명실상부 ‘007 부활 전문’ 감독으로 자리매김한다.

미운 오리에서 백조로, 다니엘 크레이그

‘골든아이’는 흥행에 성공했으나 이후 피어스 브로스넌이 주연을 맡은 007 시리즈는 ‘안드로메다로 가는’ 설정과 엉망인 스토리로 혹평을 받았다. 결국 피어스 브로스넌이 하차하고 6대 제임스 본드로 낙점된 인물은 바로 다니엘 크레이그였다. 영국에서는 엄청난 반발이 일었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피어스 브로스넌과 완전히 다르게 생겼다. 우락부락한 얼굴에 금발의 푸른 눈. “영국 첩보원이 아니라 러시아 첩보원처럼 생겼다”는 비판 혹은 비난이 이어졌다. ‘danielcraigisnotbond.com(다니엘 크레이그는 본드가 아니다 닷컴)’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아버지 알버트 R. 브로콜리에 이어 제작을 맡은 딸 바버라 브로콜리는 자신의 선택을 밀어붙였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제작자로서의 안목은 유전되는 모양이다.

시리즈를 일신하겠다고 선언하며 개봉한 ‘카지노 로얄’은 시리즈 사상 최고 흥행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이 기록은 이후 ‘스카이폴(Skyfall)’이 흥행 수입 10억달러(약 1조1500억원)를 세우며 깨진다. ‘카지노 로얄’에서는 터프하고 불안정한 성격의 제임스 본드가 등장했는데, 원작에 가까운 인물 묘사가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스카이폴’에서 다니엘 크레이그의 활약이 대단했다. ‘스카이폴’은 007 시리즈 50주년 기념작이었는데, 007 시리즈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보여줬다는 극찬을 받았다. 크레이그는 시나리오와 제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알려졌다. ‘스카이폴’의 연출을 맡은 것은 샘 멘디스 감독이었는데, 멘디스 감독을 설득한 것이 바로 다니엘 크레이그였다. 최고의 악당으로 평가받은 하비에르 바르뎀에게 출연을 제안한 것도 모두 크레이그였다. 여담으로 위에서 언급한 ‘다니엘 크레이그는 본드가 아니다 닷컴’은 아직도 운영 중인데 동명의 페이스북에 가보면 “여기가 인터넷에서 가장 불쌍한 사이트”라는 댓글이 달려 있다.

역대 제임스 본드. 왼쪽부터 로저 무어, 숀 코너리, 다니엘 크레이그, 피어스 브로스넌, 조지 라젠비, 티모시 달튼. ⓒphoto MGM/UA
역대 제임스 본드. 왼쪽부터 로저 무어, 숀 코너리, 다니엘 크레이그, 피어스 브로스넌, 조지 라젠비, 티모시 달튼. ⓒphoto MGM/UA

제임스 본드의 탄생

제임스 본드는 작가 이안 플레밍의 소설 ‘카지노 로얄’에서 처음 등장했다. 소설에 따르면 제임스 본드는 1924년생이다.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14살에 명문 사립고등학교인 이튼스쿨에 입학했으나 여자 문제로 퇴학당한다. 영어, 러시아어 등 5개 국어를 구사한다. 통성명할 때마다 “본드, 제임스 본드”라고 말하는 버릇이 있다.

본드는 영국 정보국 비밀정보부 SIS(Secret Intelligence Service), 일명 MI-6 소속의 첩보원이다. 첩보원명인 ‘007’에서 ‘00’은 영국 비밀 정보국인 MI-6가 허가한 살인면허를 뜻하며 ‘7’은 살인면허를 가진 일곱 번째 요원이라는 의미다. 공식계급은 영국 해군 중령이다. 제임스 본드는 작가의 분신 같은 존재다. 작가 이안 플레밍은 모스크바 주재 로이터통신 기자 출신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영국 해군 정보부에서 근무하며 본드와 마찬가지로 중령까지 진급했다. 그는 생전에 12편의 작품을 썼는데 사후에 공개된 단편집 1편과 미완성 작품 1편을 포함하면 모두 14편의 007시리즈를 남겼다. 술과 담배를 즐겼던 그는 1964년 56세를 일기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본드가 즐겨 마시는 술은 보드카 마티니다. 본드의 특별한 주문은 ‘골드핑거’에서 첫 등장하는데, 이 작품에서 그는 바텐더에게 ‘보드카 마티니, 젓지 말고 흔들어서(Vodka martini, shaken not stirred)’라고 주문한다. 캐나다에 있는 웨스턴온타리오대학 연구팀이 1999년 영국 의학전문지 ‘브리티시메디컬저널(BMJ)’에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마티니를 저어서 섞은 것보다 흔들어 섞은 쪽이 암, 심장병, 성인병 예방에 효과가 있는 항산화제를 더 많이 생성시키는 것으로 밝혀졌다.

M은 MI-6에서 제임스 본드의 상관 역할을 하는 존재다. M의 비서 머니페니는 늘 제임스 본드와 농담을 던지며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한다. ‘카지노 로얄’부터 머니페니 역할이 사라졌는데, 전작 ‘스카이폴’에서 흑인 나오미 해리스가 머니페니 역할을 맡아 부활했다. ‘스펙터’에서는 옛 007 시리즈처럼 제임스 본드를 챙겨주면서도 희롱하는 머니페니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본드카와 본드 시계

시리즈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골드핑거’는 시리즈 사상 가장 유명한 본드카가 데뷔한 편이기도 하다. 영국 자동차 제조회사 애스턴마틴의 DB5다. 영화 속에서 DB5의 전조등 부분에는 기관총이, 트렁크에는 방탄 철판이 숨겨져 있다. 차량 번호판은 회전하며 바뀌고, 버튼을 누르면 좌석이 공중으로 튀어 올라 비상 탈출할 수 있다. 이후 시리즈에도 DB5가 잠깐씩 등장하지만, 본격적으로 다시 얼굴을 비춘 것은 ‘스카이폴’ 때다. ‘스카이폴’에서 DB5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007의 메인 테마곡이 초창기 편곡 그대로 흘러나왔다. 과거를 테마로 한 ‘스카이폴’이 지향하는 바를 제대로 보여준 셈이다.

한동안 본드카는 애스턴마틴이 아니라 여러 자동차 회사가 맡았다. ‘두 번 산다(You Only Live Twice)’에는 도요타의 2000GT가 등장한다. BMW는 ‘두 번 산다’를 비롯해 ‘골든아이’ ‘네버다이(Tomorrow Never Dies)’에서 본드카를 만들었다. 하지만 ‘언리미티드’에서는 거대한 톱날에 반토막 난다.

본가 애스턴마틴이 귀환한 건 ‘어나더데이(Die Another Day)’에서다. ‘카지노 로얄’에서는 DB5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DBS(S와 5는 글씨 모양도 매우 유사하다)가 등장한다. 이번에 개봉한 ‘스펙터’에는 애스턴마틴 DB10이 등장한다. 영화 제작사와 제작진이 함께 디자인한 DB10은 전 세계에서 단 10대만 생산된다. 아쉽게도 10대 모두 일반에 판매하지 않고 영화를 위해서만 사용할 예정이다.

007 시리즈에서 본드카와 함께 PPL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시계다. 영국신사답게 옷을 갖춰 입는 본드가 애용하는 시계는 롤렉스에서 세이코, 그리고 오메가로 이어졌다. 시리즈 첫 작품인 ‘살인번호’ 때부터 본드의 시계는 롤렉스 서브마리너였다. ‘나를 사랑한 스파이’부터는 일본 시계 브랜드 세이코의 디지털 시계가 본드의 손목을 장식했다. 이후 잠시 롤렉스로 회귀했던 본드는 피어스 브로스넌이 BMW를 몰고 온 ‘골든아이’부터 오메가의 다이버 시계인 시마스터를 차기 시작했다. 남성적인 외관에 명료하고 직관적인 와치페이스 디자인,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터프함을 갖춘 제품이다. 여기에 브레이슬릿(금속 소재 시곗줄)을 매칭시키면 정장이든 캐주얼이든 문제없이 소화할 수 있는 전천후 시계가 된다. 오메가는 007 신작이 개봉할 때마다 영화의 콘셉트에 맞춰 디자인한 한정판 모델을 발매한다. 물론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다.

스펙터의 정체

이번 ‘스펙터’ 영화의 ‘스펙터’는 007 시리즈에 등장하는 국제 범죄조직이다. 스펙터(SPECTRE)는 ‘SPecial Executive for Counter-intelligence, Terrorism, Revenge and Extortion’의 약자로 첩보, 테러, 복수, 강탈을 하는 조직이라는 뜻이다. 스펙터는 1편 ‘살인번호’에서부터 등장한다. 1편의 악당인 ‘닥터 노’가 스펙터의 주요 조직원이다.

스펙터의 수장은 ‘에른스트 스타브로 블로펠드’다. 2편 ‘위기일발’에 처음 등장했을 때는 얼굴은 드러내지 않고 고양이를 쓰다듬는 손만 보여줬다. 애니메이션 ‘형사 가제트’에서 악당 닥터 클로의 모습으로 차용하기도 했다. 잔혹한 성격의 블로펠드는 임무에 실패한 부하들을 직접 숙청한다. 가뜩이나 부족한 주요 조직원을 자꾸 제거해서 스펙터의 인력난을 야기한다. 블로펠드는 제임스 본드의 숙적으로 ‘여왕 폐하 대작전’에서 본드의 처음이자 마지막 아내인 트레이시를 결혼식 당일에 습격해 죽이기도 했다.

시리즈 초창기에 블로펠드는 무서운 악당이었다. 그러나 그 끝은 초라했다. 12편 ‘유어 아이스 온리’ 오프닝에서 헬기에 탄 제임스 본드를 죽이려다 굴뚝에서 추락사한다. 스펙터와 블로펠드의 초라한 퇴장은 당시 스펙터에 대한 저작권 분쟁 때문이다. 스펙터의 저작권이 시나리오 작가 캐빈 맥클로리에게 있었는데, 분쟁이 생기자 아예 블로펠드를 죽여버리고 깔끔히 털어버린 것. 제작사인 MGM/UA는 기나긴 법정공방 끝에 2000년 스펙터의 저작권을 회수했다.

24편의 제목이 ‘스펙터’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007 팬들은 기쁨과 충격에 휩싸였다. 송사에 휘말려 퇴장한 블로펠드가 부활할 것이라는 예측을 하는 팬들도 있다. 진실은 11월 11일 개봉한 영화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팜므파탈에서 어머니까지

1대 우슐라 안드레스 이후로 본드걸은 007 시리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보수적이고 마초적인 시각에서 그려진 여성상에 대해서는 비판의 여지도 많다. 그러나 007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본드걸의 모습도 다양해졌다. ‘네버다이’에는 최초의 동양인 본드걸 양자경이 나오는데, 액션 비중이 상당하다. ‘언리미티드(The World is Not Enough)’의 팜므파탈 소피 마르소는 사실은 악당으로 제임스 본드에 맞서는 다채로운 매력을 보여줬다. 특히 ‘스카이폴’에서 본드의 상관인 M은 최고령 본드걸로 활약하는데, 냉철한 상관의 모습에서 본드의 어머니 같은 존재로 변화하면서 이전에는 없었던 본드걸의 모습을 보여줬다.

전작 ‘스카이폴’은 작품 자체로도 손꼽히는 수작이지만, 007 시리즈의 반백년 역사를 반추하고 앞으로의 이정표를 제시한 작품으로도 의미가 크다. 냉전시대가 종식된 이후 007 시리즈는 데탕트 시대, 우주개발 경쟁과 미디어 재벌, 테러리즘 등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며 맞서 싸울 상대를 모색해 왔다. ‘스카이폴’에서는 극중 MI-6의 존폐를 놓고 열린 청문회에 불려 나간 M이 읊은 시를 통해 이제는 구식이 된 스파이, 제임스 본드와 007 시리즈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나온다. 알프레스 테니슨의 시 ‘율리시스’의 한 구절이다. “예전처럼 천지를 뒤흔들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다/(중략)/ 세월과 운명 앞에 쇠약해졌다 하여도 의지만은 강대하니/ 싸우고 찾고 발견하며 굴복하지 않겠노라.”

키워드

#영화
홍성윤 매일경제 오피니언부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