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88’에서 연기하는 성동일. ⓒphoto tvN
‘응답하라 1988’에서 연기하는 성동일. ⓒphoto tvN

성동일이 돌아왔다. 해태 타이거즈 선수 출신 ‘서울 쌍둥이’ 코치로, 구수한 사투리 한마디에 넉넉하고 소박한 마음을 담아주던 ‘응답하라 1997’(tvN·2012)과 ‘응답하라 1994’(tvN·2013)의 그가 이젠 만년 은행 대리가 되어 ‘응답하라 1988’(tvN)로 돌아왔다.

‘응답하라 1988’은 ‘응답하라 1997’ ‘응답하라 1994’에 이은 세 번째 시간여행이다. 등장인물이 바뀌어도, 이야기 틀이 변해도 여전한 사람, 아버지 성동일.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렸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로 고도성장의 그늘을 명확히 보여준 ‘지강헌 사건’이 있었다. ‘별이 빛나는 밤에’와 ‘밤을 잊은 그대에게’는 여전히 청소년들의 밤을 밝혔고, 순악질 여사의 ‘음메 기죽어’는 세상 남자들의 오금을 저리게 했다. 장총찬의 종횡무진 활약이 빛났던 ‘인간시장’(MBC)은 통쾌했고, 김수현 작가의 ‘모래성’(MBC)은 사랑의 윤리에 대해 직격탄을 날리며 표리부동한 우리의 애정관을 들여다보게 했다.

‘천녀유혼’의 왕조현은 남자들의 넋을 빼앗았고, ‘탑건’의 톰 크루즈는 여자들의 마음을 통째로 흔들어놓았다. ‘영웅본색’을 보며 의리를 배웠고, 신해철의 ‘그대에게’를 들으며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그때 성동일은 스물두 살,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며 퍼붓는 빗속을 우산도 없이 맨발로 달렸고, 배우라기보다는 청년인 시절이었다.

처음은 창대했으나 갈 길은 멀었다

성동일의 데뷔는 화려했다. 1991년 SBS 공채 탤런트 1기생. 여자 20명, 남자 9명의 배우를 뽑는데 응모한 사람은 6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수천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탤런트가 된 29명 중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배우는 공형진, 오대규, 김희정, 그리고 성동일뿐이다. 그는 살아남았다.

극복할 수 없었던 가난과 불우했던 가정, 얼른 어른이 되어 집을 떠나고 싶었다. 무엇이 되고 싶다는 생각조차 품을 수 없었던 그에게 운명처럼 연극이 다가왔다. 연극인의 삶은 늘 그렇듯 팍팍했다. 어떻게 살았나 싶을 만큼 힘들었지만 꿈이 있어 버틸 수 있었다. 연극배우였던 20대의 그는 지금과는 너무 다른, 소위 ‘꽃미남’이었다. 강렬한 눈빛에 깎은 듯 반듯한 얼굴, 먼 곳을 응시하는 그에게서 진한 우수(憂愁)가 배어나왔다.

그의 TV 첫 작품은 1992년 11월에 방송된 SBS 창사 특집극 ‘관촌수필’이었다. 연극무대에서 연기력을 쌓았고, 외모도 출중했던 그는 당연히 주목받는 신인이었다. 그러나 연극과 TV가 다른 매체임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기는 이전의 관습을 쉽게 벗지 못했다. 첫 출연작에서 고배를 마신 그는 몇 편의 드라마를 전전했지만 본인에게도, 시청자에게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러다 만난 작품이 ‘은실이’(SBS·1998)였다.

‘한때 배우’로 기록되고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니 죽기 살기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사투리를 써야 하는 역할이었기에 그는 전라도 화순까지 내려가 직접 현지 사투리를 채록했고, 노트가 다 닳을 정도로 수없이 연습을 거듭했다. 인천 사람인 그의 사투리가 어찌나 능청맞던지 고향이 그쪽인 줄 착각할 정도였다. 결국 그냥 ‘남자1’이었던 역은 ‘양정팔’이 되고, 그를 상징하는 빨간 양말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발에 땀나게 뛰어다닌 결과였다.

방송사 공채 탤런트가 되었던 기쁨도 잠시, 무명과 다를 바 없는 시간이 길었기에 ‘은실이’의 성공은 더욱 소중했다. 하지만 세상은 만만하지 않았다. ‘은실이’가 안겨준 경제적 여유와 명성도 잠시, 세상의 유혹과 음모는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사업은 실패했고, 그는 오로지 살기 위해 더욱 연기에 집중해야만 했다. “예술, 그런 건 개나 줘라”며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연기에 몰입했다. 다르지 않으면 자신을 찾지 않을 것을 알기에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성동일표 연기’를 만들어야만 했다. 스스로를 생계형 연기자라 칭하며 자기 연마의 끈을 놓지 않았다.

탤런트가 된 후 그는 한 해도 쉬지 않고 작품을 했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보다 많은 작품에 출연한 그는 TV에서 극장으로, 드라마에서 예능으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야인시대’(SBS·2002)에선 수표교 거지 개코, ‘뉴하트’(MBC·2007)에선 의사 이승재,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SBS·2010)에선 짝퉁 주윤발 무술감독 반두홍, ‘전우치’(KBS·2012)에서는 사복시 관노 봉구, ‘장옥정, 사랑에 살다’(SBS·2013)에서는 반상의 구별을 뒤엎으려는 거상 장현, ‘갑동이’(tvN·2014)에서는 형사과장 양철곤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영화 ‘국가대표’(2009)에서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방코치, ‘아부의 왕’(2012)에서는 감성 영업의 정석을 펴낸 아부계의 전설 혀고수, ‘탐정, 더 비기닝’(2015)에서는 광역 수사대 노태수 형사였다. 그리고 인간 성동일을 보게 해준 ‘아빠 어디가’(MBC·2013)까지. 어느 하나도 그냥 만들어지지 않았다.

“나 성동일이야”

요즘 말로 하면 흙수저, 그것도 찌그러지고 망가져 반쯤은 없어진 흙수저를 간신히 물고 태어나 남보다 수십 배, 수백 배 노력해도 남들만큼 되기 어려운 삶이었다. 그래서 그에겐 ‘그냥’이 없었다. 말투가 자연스럽고 행동에 막힘이 없기까지 인간 성동일을 내려놓고 작품 속 인물이 되기 위해 그는 잠시도 쉬지 않았다. 인물에 대한 철저한 분석, 멈출 때와 나갈 때를 정확히 구분하기 위한 무한 연습, 망가질 때는 바닥까지 엄해질 때는 추상같이, 애드리브와 순발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의 연기는 쉽게 넘볼 수 없는 힘을 갖게 되었다.

그를 이른바 ‘신 스틸러’로 각인시킨 ‘추노’(KBS·2010)를 보자. 추노꾼 천지호 역은 조연 중에서도 등장 컷 수가 많지 않은 편에 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노’는 성동일의 드라마로 기억된다. 끝없이 쫓고 쫓기는 비천한 추노꾼의 죽음 앞에 누가 저승길 노잣돈을 챙겨주겠나 싶어 그는 ‘천지호 죽음’ 신을 찍을 때 직접 소품팀에 엽전을 부탁해 스스로 입안에 쑤셔넣었다고 한다. “나 천지호야, 천지호”를 외치며 미친 존재감을 원 없이 발휘했던 그는 이 한 마디의 대사를 완벽하게 해내기 위해 수많은 밤을 대본과 씨름했을 것이다.

성동일의 눈물은 데일 듯 뜨겁고, 웃음은 결코 가볍지 않다. “우리 엄니 불쌍해서 어쩐대. 무엇이 급하다고 이렇게 먼저 갔을까. 무엇이 급하다고. 이제 우리 엄니 못 보자네.” ‘응답하라 1988’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며 형의 품에서 뜨거운 눈물을 토해낸 그, 역시 성동일이었다. 나이의 무게감으로 그저 강한 척 버텨내는 어른들의 약한 속마음을 이리 잘 표현해 낼 수 있을까.

올해로 데뷔 25년, 그를 우리는 명품 조연이라 부르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는다. 주연이든 조연이든 성동일은 성동일이니까. 성동일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연기의 세계가 있기에 대중들은 그의 새로운 25년을 기대하고 있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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