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이 제기됐던 아이유의 새 앨범 재킷 ‘CHAT-SHIRE’. 왼쪽 가운데에 ‘제제’의 이미지가 보인다.
논란이 제기됐던 아이유의 새 앨범 재킷 ‘CHAT-SHIRE’. 왼쪽 가운데에 ‘제제’의 이미지가 보인다.

아이유. 그녀가 논란의 주인공이 됐다. 지난 10월 23일에 발매된 그녀의 앨범 ‘CHAT-SHIRE’의 수록곡 ‘Zeze’가 논란의 대상이다. 브라질의 작가 조세 마우르 지 바스콘셀루스의 소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의 주인공 ‘제제’에 대한 해석과 비판을 그 내용으로 하는 이 논쟁은 소아성애라는 윤리적 문제가 그 중심에 있음으로써 온도를 높였다. 국내에서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최초로 출간한 출판사 동녘은 ‘Zeze’의 노랫말과 뮤직비디오에 등장한 오브제 하나하나를 거론하며 아이유의 해석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했다. 동녘에 의해 제기된 이 논쟁은 각양각색의 반응을 불러왔고, 급기야 다음 아고라에서는 음원 폐기 청원이라는 극단적 행동까지 진행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다양한 의견 속에서 확신에 찬 논지들은 넘쳐나지만 이 논쟁을 둘러싼 외형 혹은 그 내용에는 몇 가지 의문이 여전히 존재한다. 표현의 자유와 예술의 윤리적 책임을 외치는 이들 사이에서 당사자인 아이유 측은 사과문을 발표하며 슬며시 한발 비켜섰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논쟁이 사그라들지 않는 이유이다.

첫 번째 질문은 이런 것이다. ‘왜 아이유인가?’ 음원 ‘Zeze’에 대한 윤리론자들의 시비는 아이유가 소설 속 주인공 ‘제제’를 소아성애적 대상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야말로 가장 휘발성 높은 논쟁 지점이다. 소아성애를 중범죄로 다뤄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 속에서 아이유의 음원 ‘Zeze’가 갖게 될 잠재적 위험을 거론한다. 예술의 자유라는 명목하에 자칫 소아성애를 정당화할지도, 아니 최소한 미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비판과 비난은 조금 낯설다. ‘왜 아이유만인가’라고 다시 질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소아성애의 고전(!)이라는 ‘롤리타’가 지금 이 시점에도 서점의 문학 코너에 버젓이 전시·판매되고 있음을 떠올려 보면, 이 예민한 사안의 모든 포화를 아이유 혼자 맞고 있는 것은 이상하다. 만약 소아성애라는 윤리적 판단이 논쟁의 목표지점이라면, 비난은 아이유를 출발해 전방위로 퍼져가야 하는 것이 정상이지 않을까. 그러나 비난은 아이유의 텍스트 ‘Zeze’에만 머물러 있다. 이 의문에 대한 몇몇 대답도 있다. 소설 ‘롤리타’나 또 다른 텍스트로 사용할 수 있는 영화 ‘레옹’이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은 성인 남자와 소녀의 사랑이 분명한 논리적 이야기의 맥락 안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라는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의 사랑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라는 예술적 감수성(!)의 단서도 하나 더 붙는다. 그러나 이런 근거 역시 어색하다. 예술에 대한 대부분의 평가는 주관의 영역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예술은 금기를 다루고자 해야

추측건대 이 논쟁의 시작은 아이유 개인에 대한 일종의 괘씸죄에서 출발했을 가능성이 크다. 논쟁의 시작이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출간한 출판사의 문제제기, ‘제제는 그런 아이가 아니거든요’인 점을 상기해 보자. 소아성애의 대상으로서 ‘제제’를 거론한 것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 출발점이 아니라 잘못된 해석에 대한 문제제기, 그리고 훈시와 같은 가르침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문학에 대한 이해도 없으면서 ‘감히’ 명작(!)의 주인공을 잘못 해석한 것에 대한 따끔한 충고라는 것이다. 동녘의 아이유에 대한 비판이 대중들에 대한 연설이 아닌, 아이유에 대한

1인칭의 편지 형식이었음을 기억해 내면 이 혐의는 좀 더 짙어진다. 일개 대중가수가 감히 문학작품을, 그것도 잘못된 해석으로 인용했다는 것에 대한 불쾌감마저 느껴진다. 물론 그 이후 펼쳐진 논쟁의 양상은 아이유 개인에 대한 공격에서 벗어나 다른 층위로 옮겨간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적어도 그 발화에는 문학이라는 문화계가 대중음악이라는 또 다른 문화계를 가르칠 수 있다고 믿는 오만함은 아니었는지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이런 상황을 아이유가 감수해야 할 분명한 이유도 존재한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의 곡에 직접 가사를 쓰는 창작자라는 점이다. 앞선 혐의에서 여성 아이돌 그룹들이 비교적 편안히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녀들이 자신들의 음악과 의상 등, 거의 모든 활동 분야에서 자기 결정권을 갖지 못한 존재임을 대중들이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희생자의 이미지가 있을 뿐, 비난의 대상이 될 조건들을 충족시키지 못한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유는 상대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작사가로 올려 놓은 명예와 함께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다. 그녀가 만든 ‘Zeze’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는 그 다음 문제다. 어떤 작가의 이야기처럼 자신의 이름을 걸고 무엇인가를 만든다는 것은 대중 앞에 벌거벗고 선 것과 같은 것이다.

아이유에 대한 논쟁의 두 번째 질문은 예술의 윤리적 태도에 대한 변(辯)에 있다. 아이유의 음원 ‘Zeze’의 폐기 청원을 주도하는 측의 주장은 분명하다. 예술은 윤리를 벗어나선 안 된다는 것이다. 한 미디어는 ‘상상은 금기를 넘어설 수 없다’라고까지 평했다. 그런데 과연 그래야만 하는가? 이 질문은 아이유가 ‘Zeze’에서 다루었다고 하는 소아성애의 부분을 넘어선 원칙적인 부분으로까지 확장된다. 예술은 윤리를 다뤄선 안 되고, 상상은 금기를 넘어서면 안 되는 것일까? 윤리란 시대에 따라 변하고, 금기란 어떤 시대엔 폭압을 위한 장치로 이용되어 왔다. 동성동본의 혼인도 윤리적 폐륜이었고, 인간의 신체를 해부하거나 그 그림을 그리는 것도 금기였다. 소아성애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그 윤리를 벗어날 수 있고, 언제나 금기를 다루고자 욕망에 시달려야 한다. 그 대전제가 이루어졌을 때, 각각의 경우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론 그 평가 속에서 당시 사회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윤리적 금기에 대한 비판과 비난이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출발선부터 모든 것을 금지한다는 것은 검열이라는 단어의 뜻과 같다.

하지만 이 모든 논쟁의 끝에 와서도 여전히 개운치 않은 부분들이 있다. 예술의 윤리적 태도에 대한 반대의견으로 존재했던 예술의 자유에 대한 주장들이다. 일부 평론가들의 재기 넘치는 의견들이 인터뷰를 통해 전달되었지만, 결국은 ‘예술은 자유다’라는 원론적인 문장 하나를 넘어서지 못했다.

창작과 해석의 자유만을 부르짖으며 아이유의 ‘Zeze’를 깃발처럼 흔들기만 했지, 과연 이 곡이 지니고 있는 의미는 어떤 것이며,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 하나 변변히 던져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평론가들의 문제라기보단 상업적 미디어의 한계이다. SNS를 통해 ‘아이유 논쟁’에 대한 특별한 시각과 탁월한 해석들이 있었지만, 대중들에겐 전달되지 못했다. 영향력 있는 대중매체는 아이유의 사과문으로 비난과 대응의 첨예함이 사라지자 뒤이은 기사를 내놓지 않았다.

결국 미디어는 논쟁의 승패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그 농밀한 내용은 무시해 버린 것이다. 예술과 윤리에 대한 논의는 없고, 승부를 결정 짓는 게임만 있었던 셈이다. 논쟁이란 그 시대의 품위를 나타낸다. 홍해처럼 양쪽으로 갈라져 감정적 대립만을 거듭하는 정치판의 모습이 대중예술의 논쟁에서도 펼쳐진다. 정치에서 잃어버린 품위를 대중예술에서도 찾기 힘든 시대이다.

김태훈

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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