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박상훈
일러스트 박상훈

방송인 송해는 환갑이 지나서 잡은 ‘전국노래자랑’ 마이크를 무려 30년째 쥐고 있다. 90수를 바라보는 나이에 방송 진행자로 건재하고 있는 주인공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 국내외를 통틀어 최고령 현역 방송인이자 사실상 첫 종신 MC이다.

송해는 KBS의 예능프로그램 ‘나를 돌아봐’의 멤버로 합류하면서 젊은층 시청자들로부터 주목을 받더니, 최근 또 한 차례 화제의 주인공이 됐다. 남성잡지 ‘맥심((MAXIM)’의 표지모델로 나선 것이다. 송해가 등장한 ‘맥심’(12월호) 화보는 턱시도를 차려입고 표정 없는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어디선가 본 듯하다. 영화 ‘대부’의 말론 브랜도를 연상시키는 암흑가 보스 콘셉트다. 자신이 출연 중인 ‘나를 돌아봐’의 기획이벤트로 참여한 것이긴 하지만 방송생활 61년 만에 첫 잡지 모델이다. 송해가 화보 촬영 직후 “89세에서 90세로 넘어가는 시기에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고 소감을 밝혔듯 그에겐 색다른 시도였음엔 분명하다. 더구나 4시간이 넘는 화보 촬영에도 지친 기색 하나 없어 “역시 프로다”란 찬사가 쏟아졌다고 한다.

송해의 고향은 황해도 재령이고, 본명은 송복희다. 1927년생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나이는 미스터리이다. 주변사람은 물론 본인조차도 의견이 분분하다. 송해는 수년 전 코미디언 행사에 참석해 “내 실제 나이는 호적 나이보다 두 살이 더 많다”고 말해 측근들조차 의아해 한 적이 있다. 또 북한에서 소학교와 중등학교를 함께 다닌 실향민 사이에서는 “이미 90살이 넘었다”는 얘기도 있고, “실제 나이는 80살 중반”이라는 증언도 있다. 엄용수 대한민국코미디협회장은 “유랑극단 시절엔 형편에 따라 자신의 나이를 늘였다 줄였다 했기 때문에 실제 나이는 본인들만 안다”고 언급했다.

송해의 삶을 조명한 평전(評傳) ‘나는 딴따라다’를 쓴 단국대 영어영문학과 오민석 교수는 “책을 쓰기 시작하면서 저도 여러 차례 그 부분을 묻고 확인했는데 내년이 ‘90수’라는 결론을 얻었다”고 증언했다. 오 교수는 지난 9월 ‘나는 딴따라다’를 세상에 내놓기까지 무려 1년 이상 식당에서, 술집에서, 목욕탕에서, 그리고 녹화가 있는 전국 방방곡곡을 쫓아다니며 송해와 동고동락한 사이다.

“송 선생님은 90살이 다 돼서야 비로소 예인(藝人)으로 일가를 이뤘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은연중에 멸시받던 유랑극단 시절을 생각하면, 사인 한 장 받으러 전국에서 팬들이 몰리는 팬덤현상에 격세지감을 느끼시고요. 스스로 딴따라임을 자처하는 것도 자신은 예나 지금이나 영원한 예인이란 자부심 때문이겠죠.”

송해의 3無, 매니저·자동차·스마트폰

 ⓒphoto 맥심
ⓒphoto 맥심

그는 “송해 선생님과의 첫 만남은 서울 종로구 낙원동의 한 허름한 목욕탕에서였다”고 했다. 우연히 목욕탕에서 등을 밀어준 것이 인연이 돼, 발가벗고 대화를 나누다 소줏잔을 기울이는 사이가 됐다. 인간적 매력에 이끌려 ‘송해의 90년 인생’을 더듬는 평전(評傳)까지 쓰게 됐다. 굳이 그의 증언이 아니라도 송해는 스스로 “나는 딴따라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예인임은 분명하다. 나이와 상관없이 대한민국 연예계를 관통하는 불멸의 ‘작은 거인’이다.

송해는 요즘 중년 여성들 사이에 ‘가장 멋진 남편감’ 1순위로 꼽힌다. 50세도 안 돼 실업자가 되는 세상에 90세까지 돈을 벌어다 주니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하다. 현재 생존한 원로 코미디언 중 송해가 선배로 모시는 유일한 사람은 구봉서다. 구봉서가 한 살 더 많긴 하지만 지금 그는 바깥 나들이를 못할 만큼 병색이 짙다. 방송활동을 하지 않은 지도 10여년이 넘었다. 어쩌다 코미디언 행사에 참석해도 휠체어에 의존한 채 후배들의 부축이 없으면 어렵다.

나이 든 연예인들의 데뷔가 대부분 그렇듯이 송해도 가설극단 출신이다. 1949년에 국립음악학원를 졸업하고 졸업 발표회에서 노래를 시작했다. 1955년 29세 때 창공악극단에서 가수로 정식 데뷔했고, 37세 때인 1963년 영화 ‘YMS 504의 수병’의 단역으로 출연했다. 악극단 시절 가설무대 등을 거쳐 TV 출연과 라디오 진행 등에서 예능인으로 활약했다. TV가 보편화되기 전엔 유랑극단 멤버로 전국을 누볐다. 그가 젊은 시절부터 인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고인이 된 배삼룡·이기동·서영춘 같은 스타 코미디언들이 전성기를 누리던 때는 사실 무명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기동과 서영춘은 젊은 나이에 요절했고, 배삼룡은 오래 살긴 했지만 말년이 초라하고 불행했다. 새옹지마이고 고진감래다. 산이 있으면 골이 있고, 골이 있으면 반드시 산이 있다고 했다. 그가 뒤늦게 대기만성형 성공 모델로 장수한 비결은 뭘까?

코미디협회가 마련한 선후배 화합의 자리에서 송해는 “현역 방송인으로 이렇게 장수하는 비결의 첫 번째는 긍정적인 마인드”라고 언급한 뒤 “일을 통해 쉼 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고 움직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건강 엔돌핀이 솟아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말 그대로 ‘89세 청춘’이다. 그는 한때 소주 서너 병쯤은 달고 사는 애주가였고, 90세를 코앞에 둔 지금도 여전히 하루에 소주 한 병씩은 거뜬히 마실 만큼 노익장을 과시한다.

일요일 낮 시간대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의 진행자인 송해는 남녀노소 모두 좋아하는 인기 MC다. 그에게 잘나가는 모든 연예인들이 다 갖고 있는 3가지가 없다. 자동차가 없고, 스마트폰이 없고, 매니저가 없다. 이른바 ‘송해 3無’다. 휴대폰은 필요할 때만 잠시 켜는 일방통행 소통수단이다. 스마트폰은 있어 봐야 되레 불편할 뿐, 10년째 사용 중인 폴더폰이면 충분하다. 스케줄을 직접 챙기니 매니저가 되레 거추장스럽다. 이동수단은 거의 대부분 ‘크고 안전한’ 지하철이다. 지방 녹화날조차도 지하철을 타고 방송사로 이동해 스태프용 버스를 이용한다. 대신 방송이 없는 날은 어김없이 종로구 낙원동 ‘상록회’(개인사무실)에 머문다. 연락이 꼭 필요한 사람은 여기에 메모를 남겨두면 된다.

송해는 소문난 ‘자린고비’이다. 이 때문에 방송계에서 인심을 잃은 부분도 있다. 특히 지난 11월 22일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송해 헌정공연’을 놓고 잡음이 많았다. 장소가 경기도 고양시에서 장충체육관으로 변경된 것을 비롯해 제작비 부풀리기, 유료티켓 판매 논란, 출연료 미지급, 스태프 인건비 등 문제들이 불거져 나왔다. 더구나 송해는 자신의 헌정공연에 출연하면서 개런티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1월 27일 서울 종로구 관수동의 한일장에서 있은 공연 뒤풀이 자리에 불참한 한 연예전문 기자는 “공연이 열리기 이전부터 공연 관계자들 사이에 볼썽사나운 일들이 자주 발생했는데 알고 보니 송해 선생의 독선과 아집이 문제였다”면서 “자축하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아 아예 불참했다”고 말했다.

전국노래자랑 마이크 “100살까지~”

2011년 방송된 KBS ‘개그스타’에 출연한 송해. ⓒphoto KBS
2011년 방송된 KBS ‘개그스타’에 출연한 송해. ⓒphoto KBS

사실 그의 가장 큰 우군은 시청자다. 그는 “시청자들이 원한다면 전국노래자랑 무대는 죽는 날까지 서고 싶다”고 말해 왔다. KBS 안에서도 ‘전국노래자랑’ MC 교체를 언급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제작진은 말할 것도 없고 윗선에서조차 암묵적인 금기사항이 돼 있다. 자칫 말을 잘못 꺼내놓았다가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히는 ‘날벼락’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박중민 KBS 예능국장은 “사실상 ‘종신 MC로 굳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MC를 언제까지 하느냐는 이제 우리 몫이 아닙니다. 본인의 의지에 달린 거죠. 더 큰 이유는 시청자들입니다. 시청자가 송 선생님을 원하는 한 진행자를 바꿔야 할 이유가 없어요. MC 독주는 당분간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MC 교체를 고려한 적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송해는 3년 전 인천광역시 편 전국노래자랑 리허설 중 피로를 호소하며 펑크를 낸 적이 있고, 이때 건강이상설과 함께 MC 교체설이 잠시 나돌았다. 하지만 곧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시청자들의 우려와 걱정, 위로와 격려가 쏟아진 데다 무엇보다 본인의 강력한 의지가 발동했다. 지금은 논의 자체가 막혀 있다. 방송사 입장에선 그가 같은 프로그램을 30년 이상 진행 중인 데다 90살을 바라보는 최고령 현역이란 사실만으로 충분히 예우할 가치가 있다. 마이크를 잡고 무대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상징성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이를 먹어갈수록 진행은 감칠맛이 난다. 그는 젊은 가수 뺨치는 노래 실력과 다양한 제스처로 무대를 즐기고 장악한다. 유랑극단 코미디언 출신답게 재치와 만담까지 겸비했다. 인기와 인지도로 보면 송해만 한 대안이 없다. 정말 그는 자신의 공언대로 ‘죽는 날까지 무대에 서는 소망’을 이룰지도 모르겠다.

송해가 살아온 삶의 궤적은 우리 대중문화사(史)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광복과 분단, 6·25, 경제개발, 민주화, 그리고 경제대국의 과정을 모두 거쳤다. 문학평론가 오민석 교수가 쓴 송해평전 ‘나는 딴따라다’에는 철저한 자기절제와 근검절약, 부지런함 등 인간 송해의 모든 것이 녹아 있다. 오 교수는 “송 선생님 역시 무대를 내려오면 어쩔 수 없이 평범한 노인으로 돌아온다. 생활패턴을 단순화해 에너지를 충전하는 것이 30년간 변함없는 무대를 보여주는 비결”이라고 말하고 “항상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먹고 활동하고 주무신다. 안경도 신발도 늘 같은 장소, 같은 위치에 놓는다. 이는 불필요한 에너지를 허비하지 않으려는 생활패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방송인으로서 부러운 삶을 보내고 있지만 그에게는 아픔이 있다. 오토바이에 빠진 아들이 오래전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한남대교를 건너던 아들이 사고를 당한 이후 ‘송해 사전에는 절대로 한남대교를 건너지 않는다’는 말이 생겼다.

2003년 ‘전국노래자랑’ 연말 결선 방송. ⓒphoto KBS
2003년 ‘전국노래자랑’ 연말 결선 방송. ⓒphoto KBS

‘슈스케’보다 뜨거운 ‘전국노래자랑’ 녹화장

“빰빰빠 빰빠~빰빠~ 안녕하세요~ 일요일의 남자, 송해입니다!” 일요일 낮시간, 어김없이 들려오는 목소리다. ‘일요일의 남자’ ‘아줌마들의 오빠’로 통하는 송해는 특유의 강단 있는 인사로 시청자들의 귀를 사로잡는다. ‘전국노래자랑’은 지금까지 무려 1700회 이상 방송되면서 전 국민 참여형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했다.

‘전국노래자랑’ 본선 녹화장은 이른 시간부터 늘 장사진을 이룬다. 전국 어디든 녹화 시작 전부터 축제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여러분, 초대가수들이 나와 노래를 부르면 더 크게 박수쳐 주실 거죠? 나와서 흥겹게 춤도 춰주세요.” MC인 송해가 노구를 이끌고 이처럼 직접 분위기를 띄우는 덕분이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162㎝의 작달막한 체구가 믿기지 않을 정도다. ‘전국노래자랑’의 장수 비결과 원천은 물론 송해다. 30년 동안 숱하게 PD가 바뀌었지만 그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다. KBS가 정치 바람이 거센 곳이란 점을 감안하면 국장, 사장이 수없이 바뀌는 외풍(外風)을 뚫었다는 점도 이채롭다.

‘전국노래자랑’의 인기에는 신재동 악단의 노련한 연주도 한 몫한다. 신재동 악단장은 2012년, 27년간 ‘전국노래자랑’의 반주를 도맡았던 김인협 악단장이 폐암으로 71세에 유명을 달리한 뒤 바통을 이어받았다. 초대가수든 일반 출연자이든 ‘전국노래자랑’에 나오는 모든 노래는 직접 연주를 한다. 신 단장이 선배의 부재를 즉석에서 메울 수 있었던 것은 ‘전국노래자랑’에서 23년간 잔뼈가 굵은 덕분이다. ‘전국노래자랑’ 역사의 증인이며 누구보다 프로그램에 익숙하다. 신재동 악단장과 호흡을 맞추고 있는 12명의 멤버 또한 경력 17~18년의 내공을 가진 실력자들로 이들이 연주하지 못하는 곡은 없다.

송해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감초들이 있다. 송해가 있는 곳이면 전국 어디든 달려가는 팬클럽 ‘부산갈매기’이다. 고길상(77)·한동옥(72) 등 4명의 댄서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무대 앞에서 춤을 추며 방청객들의 흥을 돋운다. ‘부산갈매기’의 회장인 고길상씨는 전북 정읍 출신으로 부산의 한 식품회사 영업사원과 자영업 등을 하다 2012년 주위 사람들과 의기투합해 팬클럽을 결성했다. 1990년대 말 광안리해수욕장에서 개최된 전국노래자랑을 찾았다가 흥에 겨워 여러 사람과 함께 춤을 춘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전국노래자랑이 열리는 곳마다 달려간다. 좋아서 하는 일이다 보니 비용도 스스로 조달한다. 그는 “송해 선생님이 촬영에 앞서 ‘오늘도 부산갈매기 왔나?’라고 한마디 해주는 것만으로 신명이 난다”고 말한다.

송해는 1994년에 잠깐 KBS 김선동 아나운서에게 바통을 넘긴 적이 있다. 당시 ‘전국노래자랑’ 연출은 홍순창 PD였는데 그는 ‘출연가수나 스태프 누구든 1분이라도 늦으면 집으로’라는 연출 원칙으로 유명했다. 유독 술을 좋아했던 송해가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자 하차시킨 사건(?)이다. 하지만 ‘송해만 한 사람이 없다’는 여론이 들끓었고 그는 오뚝이처럼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송해만의 맛과 향기가 국민 모두의 기억 속에 자리매김한 덕분이다. 송해는 코미디언 후배들과의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하늘에서 내린 복이고 내게 여러 가지로 운도 따른 것 같다. 아들이 비명횡사한 후 모든 욕심을 다 내려놓고 미련과 후회를 버리니 더 잘 풀리는 것 같다.”

엄용수 회장은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고 말한다. “언젠가는 그 자리를 비우시겠죠. 송 선생님을 대체할 만한 후배들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아직은 그 자리를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후배들은 선생님의 건강이 허락하시는 한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주시길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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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연구
강일홍 더팩트 부국장 겸 연예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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