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주말드라마 ‘엄마’에서 차화연이 춤사위를 선보이는 장면. ⓒphoto MBC
MBC 주말드라마 ‘엄마’에서 차화연이 춤사위를 선보이는 장면. ⓒphoto MBC

보내지 않았는데도 청춘은 떠나갔고, 부르지 않았는데도 황혼은 다가왔다. 풋풋했던 젊음도 한때, 세월의 꼬리는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우리에게 미자였고, 아름다운 추억이었고, 아픈 사랑이었다.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불새가 되길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녀는 차화연이다.

요즘 그녀는 엄마다. 주말연속극 ‘엄마’(MBC·2015)에서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아이들 넷을 키워낸 엄마 윤정애로 살고 있다. 변두리지만 서울에 내 집이 있고, 번듯한 가게도 있는 사장님이다. 시장통 좌판 장사부터 시작했으니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겠지만 초로의 그녀는 단색 비단처럼 곱다. 시난고난했던 세월은 가슴에 묻고 이제는 엄마로서의 숙제를 마쳐가나 싶었는데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 했던가. 공부 마친 아이들의 결혼, 출산, 손주 돌보기 등 자식들 뒷바라지는 끝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힘들었지만 긴 터널 묵묵히 지나온 그녀 앞에 사랑이 찾아왔다. 그녀에게 예쁘다 말해주고, 그녀를 닮은 작은 국화 다발을 대문 틈에 끼워놓고 가기도 하고, 투박한 손으로 조그만 학을 접어 그녀에게 전해줄 줄 아는 그런 남자를 만났다. 환갑을 앞둔 나이에 새로운 사랑을 한다는 것이 쑥스러웠지만 우여곡절 끝에 나선 데이트 길의 그녀는 두 볼이 발그레한 수줍은 소녀였다. 웃음은 끊이지 않았고, 마음은 콩당콩당 설레었다. 그렇게 차화연식 황혼의 로맨스는 엄마에게 여자의 자리를 돌려주었다.

‘이 사람은 평생 배우로 살겠구나’ 싶었던 작품은 ‘TV문학관-삼포 가는 길’(KBS·1981)이었다. 스물두 살의 차화연은 술집 작부 백화를 처연하게 그려냈다. 백화는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술집으로 팔려갔다. 고작 몇 년밖에 안 된 술집 생활이었지만 수십 년은 된 듯 길고 고독했다. 사랑에 속고, 빚은 늘어가고, 술에는 넌더리가 난 그녀는 술집을 도망쳐 나와 고향으로 향했다. 그 길에서 바람난 아내를 죽이고 감옥에 갔다 출소한 떠돌이 정씨와 공사판을 전전하다 밥값 떼어 먹고 도망자 신세가 된 영달을 만나 함께한다.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 부평초(浮萍草) 같은 그들의 삶은 고단했고 미래에 대한 다짐이 굳을수록 일상은 피폐해져갔다.

그녀는 ‘삼포 가는 길’을 통해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1978년 미스롯데이자 TBC 20기 공채 탤런트로 연기 생활을 시작했으니 아직 애송이였지만, 함께 연기한 대선배 문오장, 안병경과의 연기에서 결코 밀리지 않았다. 당시 그녀는 “좋은 연기가 무엇인지 아직은 모르지만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연습을 해야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연기라는 것은 알게 되었다”고 했다. 참된 연기자가 되겠다는 당찬 오기와 집념으로 똘똘 뭉쳤던 때였다. 흰 눈길을 끝없이 걸어가는 그녀를 보면 영화 ‘별들의 고향’(1974)의 경아가 보인다. 주는 사랑밖에 몰랐던 경아는 도시의 욕망 아래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하얀 눈 내린 벌판에서 수면제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그러나 ‘삼포 가는 길’의 백화는 고향행(行) 기차는 탈 수 있었으니 경아보단 낫지 않은가. 비록 같이 가길 원했던 영달이 동행하진 못했지만 그녀는 고향으로 갔다. 그리고 몇 년 뒤 백화는 ‘고래사냥’(1984)의 춘자가 된 듯했다. 벙어리 창녀이지만 순수한 영혼을 갖고 있는 춘자는 병태와 민우의 도움으로 창녀촌을 빠져나와 고향에 계신 엄마 품에 안긴다. 고도성장의 그늘에서 만난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 경아, 백화, 춘자. 그 가운데 차화연이 있었다.

데뷔 10년차, 그녀는 미자가 되어 화려하게 비상했다. 언어의 마술사 김수현 작가의 ‘사랑과 야망’(MBC·1987). 앙다문 입술과 새초롬한 눈에선 자신의 꿈을 향한 열정이 가득했다. 누구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꼿꼿함이 있었지만 사랑 앞에서만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다. 꿈이 화려할수록 그녀의 삶은 삭막했다. 은막의 스타가 되어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지만 그녀에게 사랑은 오직 하나 첫사랑 태준뿐이었다. 한 번도 의심해본 적 없는 그에 대한 사랑은 완고한 시어머니의 반대 앞에 수없이 좌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 길을 돌아 태준의 품에 안겼지만 그 사랑은 얼음보다 차가웠다.

냉철한 사랑을 품은 女人

MBC 자체 시청률 85%, 일반 시청률 76%를 기록했던 ‘시대의 드라마’를 끝으로 그녀는 은퇴를 선언했다. 정점(頂點)에서, 최고의 여배우답게 극적이었다. 드라마 최종회 방송 이후엔 어디서도 그녀를 볼 수 없었다. 다만 계약 기간이 몇 달 남아있던 화장품 광고만 그녀의 빈자리를 채워줄 뿐이었다. 그리고 이십 년쯤 지난 2008년 어느 봄날, 잠시 먼 길 나들이 다녀온 큰언니처럼 그녀는 대중들 곁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복귀작 ‘애자 언니 민자’(SBS)는 동생이 짊어져야 할 운명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는 품 넓은 언니 민자의 이야기이다. 조금은 살이 올라 중년 분위기가 느껴졌지만 그녀는 곱고 단아했다. 웃을 때마다 살짝살짝 보이는 주름은 자연스러웠다. 미자였을 때 그녀가 화려한 목단 같았다면 민자로 돌아온 그녀는 길가 어디라도 피어있는 망초꽃 같았다. 연기에 대한 열정을 어떻게 참고 지냈을까 싶을 만큼 복귀 이후의 그녀는 쉼 없이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다. 주연이든 조연이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복귀 두 번째 작품인 ‘씨티홀’(SBS·2009)에서 그녀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었다. 짙은 화장, 빨간 매니큐어, 킬힐을 신은 그녀는 신경질적인 변덕쟁이였다. 모정보다 자신의 욕망이 중요한 엄마였다. 매몰찬 그녀의 연기 속에는 오래 쉬었지만 녹슬지 않았음을 보여주겠다는 노장의 비장한 각오가 깃들어 있었다. 이후 ‘야왕’(SBS·2013)에선 주체할 수 없는 허영끼와 사치로 결혼생활에 실패하고 대기업 회장인 오빠의 집에 얹혀사는 골칫덩어리 백지미였다. 알코올 중독에 쇼핑광, 게다가 도박까지. 그러나 그녀는 복수를 꿈꾸는 음모자였다. 속을 알 수 없는 지미를 그려내는 그녀의 연기는 섬뜩했다. 그리고 다시 동네 골목 어딘가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아줌마가 되었다. 남편의 외도로 이혼하고 혼자서 자식들을 키우는 굳센 엄마. ‘사랑해서 남주나’(MBC·2013)의 그녀는 괄괄한 성격에 말투도 거칠었지만 천생 여자임을 숨길 순 없었다. 자신의 사랑을 당당하게 찾아가는 엄마, 여자로 사랑받는 삶을 꿈꾸는 그녀는 당당하게 자신의 이상형에게 먼저 사랑을 고백한다.

그녀가 그리는 엄마는 고두심이나 김용림 등의 엄마와는 다르다. 조용하고 차분하지만 차돌 같은 당참을 갖고 있다. 그악스럽기보다는 냉철한 사랑을 품고 있다. 쉽게 소리 지르지 않지만, 그래서 더 무서운 존재이기도 하다. 엄마는 딸들의 미래이다. 세월을 지고 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미래를 그려본다. 선과 악, 희극과 비극을 넘나드는 팔색조(八色鳥) 연기의 차화연에게서 이 겨울 곱고 로맨틱한 엄마의 내음을 한껏 맡고 싶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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