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손가락’의 이두헌(왼쪽)·임형순.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다섯손가락’의 이두헌(왼쪽)·임형순.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1980년대 중반, 수요일만 되면 전국 곳곳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특히 비라도 왔다 치면 전국의 카페에서, 매장에서 이 노래를 틀어대느라 바빴다. 이 노래 덕분에 가장 즐거운 곳은 꽃집이었다.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를 그녀에게 안겨주고파/… 무거운 코트 깃을 올려 세우며/ 비 오는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그룹 ‘다섯손가락’의 1집 앨범(1985)에 수록된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를’은 당시 새로운 풍속도를 만들어냈다. 생전 꽃집이라고는 가본 적 없던 남자들이 장미꽃을 사느라 꽃집 앞에 줄을 섰다. 덕분에 이 노래를 작사·작곡한 ‘다섯손가락’의 멤버 이두헌은 화훼협회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역시 1집에 실린 ‘새벽기차’도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었다. ‘희미한 어둠을 뚫고 떠나는 새벽기차’에 몸을 싣고 떠나는 것이 청춘의 특권인 양 기타를 둘러메고 새벽기차 여행을 떠나는 것이 또 하나의 유행이었다.

1980년대 들어 부활, 시나위, 들국화 등 하드록 그룹이 대세이던 시절, 차분한 포크록을 들고 나타난 대학생 밴드 ‘다섯손가락’은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보컬 임형순(51), 기타 이두헌(51), 키보드 최태완(50)을 주축으로 1985년 데뷔한 다섯손가락이 데뷔 30년 만에 다시 뭉친다. 오는 12월 26일 서울 마포구 홍대 인근 앰프라이브클럽에서 1987년 그룹 해체 이후 첫 단독콘서트를 갖는다. 지난 12월 4일 경기도 일산 현대백화점에서 임형순·이두헌씨를 만났다. 마침 이두헌씨가 그곳에서 공연이 있었다. 이번 공연에는 오리지널 멤버 중에서 두 사람을 비롯해 최태원씨가 함께한다. 머리 희끗한 50대가 되어 30년 만에 뭉친 다섯손가락의 근황과 추억을 들어봤다.

다섯손가락이 그룹으로 활동했던 기간은 3년이 채 안 됐다. 그룹 앨범은 1집과 2집이라고 할 수 있다. 멤버들이 하나둘 군 입대를 하고 임형순이 솔로로 전향을 하면서 그룹은 사실상 해체됐다. 이두헌 혼자 다섯손가락 이름으로 3, 4집을 냈지만 솔로음반이나 다름없었다. 활동 기간은 짧았지만 다섯손가락은 1980년대 젊은이들의 낭만을 대변했다. 2집에 실렸던 노래 ‘풍선’은 2006년 동방신기의 리메이크로 또다시 전국에 울려 퍼졌고 요즘에도 수요일만 되면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이 이곳저곳에서 흘러나온다.

무대에서 ‘다섯손가락’은 사라졌지만 멤버들은 여전히 음악 속에서 살고 있었다. 임형순씨는 두원공대 실용음악과 학과장으로 후배들을 키우고 있고, 최태완씨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멤버로 활약하면서 역시 두원공대 실용음악과 교수로 있다. 이두헌씨는 경희대 국제교육원 겸임교수로 있으면서 자신의 밴드와 함께 음악을 계속하고 있다. 국내 최초로 ‘비틀스론’ 강좌를 개설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각자 자신의 이름으로 활동을 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이름 앞에는 ‘다섯손가락’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오는 데뷔 30주년 기념콘서트를 여는 장소는 250석 규모의 작은 소극장이다. 이두헌씨는 “다섯손가락의 첫 데뷔 공연 장소도 작은 소극장이었다. 그때의 추억을 그대로 살리고 싶어 소극장을 택했다”고 말했다. 30년 전 첫 공연 장소는 파고다소극장, 입장료는 2500원이었다. 관객이 몇 명이나 왔냐고 물었다.

“5명쯤 됐나?”

“에이, 5명은 더 온 것 같은데.”

‘다섯손가락’ 1집 앨범
‘다섯손가락’ 1집 앨범

두 사람의 기억이 엇갈리긴 했지만 숫자는 그다지 의미가 없어 보였다. 친구들이 채운 좌석이었기 때문이다. 멤버들은 모두 고교 친구 사이였다. 1977년 시작된 대학가요제를 중심으로 꿈을 키우는 학생 밴드들이 유행처럼 생겼고, 그중 다섯손가락 멤버들은 음악 좀 한다고 소문난 친구들이었다. 그들에겐 음악이 전부였다. 한 이불 덮고 붙어 다니면서 눈만 뜨면 음악 이야기를 했다. 아마 꿈도 오선지를 배경으로 꾸었을 것이다. 음악하는 선배들 연습실에서 눈칫밥을 먹다 대학에 들어간 후 처음으로 마련한 연습실이 상도동에 있는 한 석유집의 허름한 지하실이었다. 난방이 안 돼 한겨울이면 담요로 출입구를 막고 장마 때 물이 차서 악기를 피신시키느라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그들에겐 천국이었다. 라면에 밥만 말아 먹어도 행복했다. 함께 연주를 할 때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두 사람이 말을 보태가며 당시를 회상했다.

“코드 하나만 새롭게 알아도 그 느낌 때문에 곡이 하나 만들어졌어요. 시청 앞 지하철역에만 내려도 가사가 저절로 나오던 때였어요. 가장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죠. 그때 만든 노래는 지금 들어도 잘 만든 것 같아요. 하하”

“자극의 차이인 것 같아요. 그땐 감성이 스펀지 같았어요. 세상이 그대로 스며들었어요. 지금은 현실적인 고민들이 많고 생각이 많다 보니 감정이 무뎌졌어요.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거죠.”

실력파로 소문이 나면서 대학축제 등 여기저기 불려다니다 보니 음악평론가들 귀에도 들어갔다. 이름값하는 평론가들이 지하 연습실까지 찾아왔다. 공식 데뷔 무대는 송승환·왕영은이 진행하던 KBS 음악프로그램 ‘젊음의 행진’이었다. 왕영은씨와는 지금도 자주 얼굴을 보는 사이다. 라디오를 통한 첫 전파는 KBS FM 프로그램 황인용의 ‘영팝스’였다. 70대가 된 황인용씨는 지금도 만나면 당시 이야기를 한다.

데뷔곡인 ‘새벽기차’가 선풍적 인기를 끌면서 공연 때면 발이 땅에 닿지 못할 정도로 팬들이 많아졌다. 음반 판매는 공식 발표만 1집이 70만장, 2집이 70만장이었다. 당시에 숨은 판매도 많아 100만장씩은 팔린 것으로 봐야 한다. 돈은 좀 벌었느냐고 묻자 그땐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확실치 않던 때라 가수들에게 돌아오는 음반 수입은 많지 않았단다. 계약금 외에 음반 판매량이 아무리 많아도 보너스가 전부였다. 요즘처럼 기획사에서 관리를 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지방 공연도 버스 타고 기차 타고 다녔다. 지방 공연 끝내고 새벽녘 서울역에 내리면 자신들의 노래 ‘새벽기차’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다섯손가락’은 평생 가자는 생각으로 붙인 이름이다. 공연을 앞두고 연습시간을 맞추기도 어려울 만큼 다들 바쁘게 살지만 몇 년 만에 만나도 어제 만난 듯 편한 친구들이라고 했다. 이두헌씨가 말했다.

“죽을 때까지 같이가는 친구들이죠. 얼마 전 형순이, 태완이와 한 무대에 선 적이 있어요. 전주가 나오는데 울컥 해서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어요. 아무리 잘 부르는 가수가 부른다 해도 순수했던 그 시절 우리들이 부른 그 감성과는 다르죠. 실력을 떠나 임형순표 ‘새벽기차’는 카피가 안 되는 거죠. 이번 콘서트는 7080세대를 위한 추억의 공연이지만 우리에게도 선물 같은 무대입니다.”

앞으로도 기회가 될 때마다 ‘다섯손가락’이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서겠다고 했다. 응답하라 1985! 그들이 불러낸 ‘추억 기차’가 30년 전 감성을 싣고 다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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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순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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