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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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인 임백천의 ‘복면가왕’ 출연은 역대급 반전이었다. 지난해 12월 27일 MBC TV에서 방영된 ‘복면가왕’에서 ‘종’님이 가면을 벗는 순간, 판정단은 전원 기립했다. 객석 방청객들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흔한 탄성 ‘대~박!’이 여기저기에서 터져나왔다. 가수 유영석은 눈물을 글썽이며 “제가 선배님 노래를 들으며 자랐는데”라며 말끝을 잇지 못했다.

‘종’님은 1라운드에서 큰 표 차로 탈락했지만 승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1990년대를 주름잡던 ‘가수 출신 국민MC’의 가수로서의 귀환에 시청자들은 그저 반가웠다. 종이접기 아저씨 김영만의 귀환에 추억이 돋듯,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부른 임백천의 부드러운 음성은 1990년대 추억을 소환했다. 임백천은 그날 포털사이트 ‘네이버’와 ‘다음’ 실시간 검색순위 1위에 올랐다.

방송이 끝난 30분 후, 임백천씨가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방송을 봤는지 먼저 묻더니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편집돼서 아쉽다”며 기사에 넣어줄 수 있느냐고 했다. 기자는 복면가왕 방영 나흘 전 임백천씨를 인터뷰했다. KBS2라디오 ‘임백천의 라디오 7080’ 5주년을 맞아 7080세대의 감성을 조망한 인터뷰였다. 당시 그는 “이번 주 일요일 방영되는 복면가왕에 나온다.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는 정도만 언급하고 말을 아꼈다. 출연 이유에 대해서는 무대 위에서 충분히 밝혔다고 생각한 듯했다. 그런데 본인이 언급한 ‘출연의 진짜 이유’가 방송에서 편집되자 먼저 전화를 걸어온 터였다.

“이 땅의 중장년들이 힘들잖아요. 아래 세대로부터 치받히고, 윗세대는 봉양해야 하고. 그래서 송호근 교수는 베이비부머의 슬픈 자화상을 절절하게 담은 책 ‘그들은 소리내 울지 않는다’를 쓰기도 했죠. 젊은 친구들도 취업전쟁 때문에 힘들지만 중장년들도 힘들긴 마찬가지예요. 중장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싶었습니다. 보신 분들이 ‘저 사람은 나이가 많은데도 저런 데 나와서 젊은 사람들과 겨루는구나’를 느끼면 충분합니다. 애초 복면가왕 섭외를 받고 거절하다가 두 가지 이유에서 승낙했습니다. 하나는 중장년들을 위해서, 또 하나는 가족을 위해서예요.”

1라운드 탈락이 아쉽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탈락을 예상했다”며 이렇게 답했다. “통과할 이유도 없고, 안 될 것이라고 예상했어요. 물론 무대 위에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노래 경연은 37년 만이거든요. 무대 위에서 노래한 것도 참 오랜만이고. 요즘 젊은 친구들과는 경연으로 이기기 어려워요. 창법 자체가 우리 세대와 달라요. 영양 상태가 좋아서 기름져 있다고 할까요? 우리 세대의 목소리가 흑백이라면 요즘 아이들은 컬러 같아요. 거침없이 쭉쭉 뽑아대죠. 아예 다른 인류 같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그는 복면가왕 방송 직후 여기저기에서 축하와 격려가 쏟아지고 있다고 했다. 대부분 후배 가수들이다. 정작 그를 봐 주길 원했던 중장년들로부터는 피드백이 거의 없었다고.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세대는 원래 표현 잘 안 하잖아요. 그저 ‘멋졌다’는 문자 몇 개 정도죠.” 그는 1958년생 개띠다. 삶의 치열한 격전지에서 살아온 베이비부머 중에서도 가장 치열한 경쟁의 무대를 겪어냈다.

7080세대의 문화 전달자

임백천. 젊은 세대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그는 1990년대를 주름잡던 베테랑 MC였다. 편안한 음색과 동네 아저씨 같은 푸근한 웃음, 자기를 낮추고 상대방에게 녹아드는 자연스러운 진행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유재석이나 강호동 인기 못지않은 간판격 MC였다. MC보다 먼저 그는 가수였다. 1978년 제2회 대학가요제에서 장려상을 수상했고 가수로 활동하면서 감성 발라드 ‘마음에 쓰는 편지’로 히트쳤다.

7080세대에게 그는 ‘세시봉’ 감성의 계승자로 꼽힌다. 조영남, 이장희,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으로 구성된 음악그룹 ‘세시봉’은 뒤늦게 출현해 대중문화의 한 축으로 자리잡았는데, 임백천은 7080세대의 상징 격인 ‘디제이(DJ·디스크자키)’의 마지막 세대다. 턴테이블에 블랙디스크를 올려놓고 판을 직접 틀면서 진행하던 디제이. 이 세대의 감성과 추억을 소비하는 세대에게 ‘임백천의 라디오 7080’은 팍팍한 삶의 단비 같은 존재다. 치열한 삶의 무대에서 살아남은 중장년들을 향해 그동안 힘겨웠으니 잠시 20여년 전 추억을 나누자고 끌어들인다.

‘임백천의 라디오 7080’이 올 1월 1일 5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해 크리스마스 맞이 특별 생방송을 진행하는 스튜디오를 찾았다. 지난해 12월 23일 여의도 KBS 본관 라디오 스튜디오 2층. ‘ON AIR’ 빨간불이 켜진 스튜디오 안은 꽉 차 있었다. 이치현, 김복경, 다섯손가락의 이두헌·임형순·한상옥씨 등과 함께한 특별 생방송이었다. 임백천은 통기타를 치면서 ‘실버벨’을 불렀다. 이치현과 김복경도 라이브로 캐럴을 불렀다. 7080감성의 대표주자들이 한자리에 모이자 청취자들은 열광했다. 한 청취자는 “약속을 미루고 라디오 앞에 앉았어요”라는 실시간 댓글을 올렸다. 임백천은 클로징 멘트를 이렇게 남겼다. “1월 1일이면 ‘임백천의 라디오 7080’ 5주년입니다. 여러분 덕분에 저는 안 잘리고 살아 남았습니다. 청취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생방송이 끝나고 마주 앉은 그는 자신을 ‘7080세대의 문화 전달자’로 소개했다. “1월 1일 5주년 특집방송 제목은 ‘10년만 더 한다고 전해라!’입니다. 7080 중장년 문화가 지속된다면 살아 남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내일 당장 없어질 수 있는 프로죠. 저는 매일 ‘오늘이 마지막 방송이다’라고 생각하고 방송합니다. 요즘 뛰어난 진행자 얼마나 많습니까? 김구라, 유재석, 강호동씨 보세요. 아이돌들도 진행을 참 잘합니다. 제가 지금껏 라디오 진행자로 살아 남은 것은 제 세대의 이야기라서 공감대가 넓어서입니다. 청취자들이 그걸 알아봐 주시는 것 같아요.”

그의 MC 경력은 30년이 넘는다. 1979년 대학 재학 당시 ‘하나둘셋 임백천 왕영은입니다’를 진행하면서 MC계에 발을 디뎠고, 이후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누비며 진행자로서의 입지를 굳혀왔다. 대학 졸업 후 6년간 건설회사에 다닌 경력을 빼도 MC 경력 31년이다. 오랫동안 MC로 사랑받아온 것에 대해 그는 “제가 잘해서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고, 라디오는 PD의 예술입니다”라며 공(功)을 PD에게 돌렸다. 편안한 진행의 비결에 대해서는 “남들은 편안하다고들 하는데, 저는 참 불편해요. 할수록 어려워요”라고 답했다. “라디오 진행은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컨디션으로 청취자들과 만나야 하는 직업입니다. 쉬운 일이 아니죠. 20년 넘게 같은 프로그램을 한 최유라씨나 배철수씨에게 제가 그럽니다. ‘참 대단하다. 20년간 실형을 산 거다’라고요.”

임백천은 7080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교 역할을 자처한다. 이번 복면가왕 출연에도 그런 의미가 있다. “7080세대의 문화가 아무리 좋더라도 청년 시절에 들었던 음악만 고집하면 안 됩니다.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않으면 도태됩니다. 트렌드를 알아야 젊은이들과 소통이 되죠. 안 그러면 뒷방으로 물러나야 해요. 7080세대 분들께 젊은 세대의 트렌드도 소개하려 노력해요. 제 말은 잘 들어주시더라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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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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