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수가 지난 1월 14일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에서 열린 드라마 ‘시그널’ 제작발표회에서 미소를 짓고 있다. ⓒphoto CJ E&M
김혜수가 지난 1월 14일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에서 열린 드라마 ‘시그널’ 제작발표회에서 미소를 짓고 있다. ⓒphoto CJ E&M

그녀는 사뭇 야위어 보였다. 장기 미제사건 전담반 차수현 팀장 역을 위해 살을 뺐을까? 두 볼은 홀쭉했지만 눈빛은 날카롭게 빛났고 움직임은 빨랐다. 시간이 흐른다고 사건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공소시효가 지났다고 범인에게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사람을 죽인 범인의 죄는 인간이 정한 시간에 맞춰 사라질 수 없다.

내 가족이 왜, 어떻게, 무슨 이유로 죽었는지 알 수 없기에 피해자 가족들은 치유되지 않는, 치유될 수 없는 아픔을 끌어안고 산다. 그래서 범인은 반드시 잡아야 한다. 그를 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왜 그렇게 했는지, 사건의 진실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드라마 ‘시그널’(tvN)은 현재의 힘으로 풀어내기 힘든 미제사건을 과거와 연결해 풀어간다. 그 연결 고리에 배우 김혜수가 있다.

예상했던 대로 그녀의 존재감은 만만치 않았다. 과학적으론 설명할 수 없지만 고장난 무전기 하나로 연결된 시간, 통제할 수 없는 교신에 의지하여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가야 하는 그녀는 침착하게, 그러나 민첩하게 범인의 뒷덜미를 낚아채야 한다. 사건을 종횡(縱橫)으로 장악하고 어딘가 있을 빈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게다가 자칭 프로파일러라며 자신의 자료에만 의존하는 후배 형사에겐 팀워크가 어떤 것인지 알려줘야 하고, 조직의 목표보다 자신의 안위가 우선인 선배에겐 따끔한 일침도 빠뜨릴 수 없다. 30년차 배우 김혜수는 이미 15년 경력의 베테랑 형사와 하나가 되어 있었다.

여형사가 주인공이었던 드라마는 종종 있었다. 한국 최초의 여성 강력반장 차수경 역(役)을 했던 고현정의 ‘히트’(2007), 경찰대 출신 강력반 반장 유민희 역을 했던 김선아의 ‘복면검사’(2015), 강력반 팀장 최영진 역을 했던 김희애의 ‘미세스 캅’(2015). 고현정은 털털했고, 김선아는 로맨틱했고, 김희애는 따뜻했다.

‘시그널’의 김혜수는 어떤가. 그녀는 진지하다. 쉽게 웃지도 않는다. 범인을 쫓아 달리고 또 달린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도 범인을 잡기 전에는 멈추지 않는다. 잔인한 살인 현장일수록 작은 단서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보고 또 본다. 얇고 투명한 피부에 커다란 눈망울,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와 깨끗한 옷매무새는 강력 미제사건을 다루는 형사의 일반적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듯하지만, 그것이 바로 배우 김혜수가 보여주고 싶은 차수현의 진정성 있는 모습이다. 흐트러지지 않는 것.

김혜수 연기엔 공소시효가 없다

보통의 신인들은 영화나 드라마, 또는 CF 등 어느 한 분야에 집중하지만 김혜수는 달랐다. 중3이던 1985년 CF로 데뷔한 그녀는 무대를 가리지 않았다. 그녀의 첫인상은 감미로웠다. 감성적 CF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초콜릿 광고, 체크무늬 셔츠에 하얀색 스웨터를 어깨에 두른 채 한 조각 초콜릿을 입에 넣고 사르르 눈을 감을 때, 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흔들렸다. 다른 브랜드의 초콜릿 광고에 등장한 여러 여배우 중 단연 최고였다.

‘깜보’(1986)는 그녀의 첫 영화다. 앳되고 발랄한 겉모습과 달리 범죄조직과 연결된 나영이었다. 검고 큰 두 눈을 깜박이며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깜찍하게 말하던 그녀는 이 영화로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생각지도 않은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을 받아 흥행엔 실패했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영화와 달리 TV에서의 그녀는 성숙했다. ‘TV문학관-젊은 느티나무’(1986)가 시작이었다. 부모의 재혼으로 가족이 된 오빠를 사랑하는 여동생 숙희였다. 아름답고 순수한, 그러나 가슴 아픈 첫사랑의 감정을 하나하나 차분하게 그려냈다.

그녀는 다른 아역배우들과 달리 곧바로 성인 연기자가 되었다. ‘사모곡’(1987), ‘순심이’(1988), ‘세노야’(1989), ‘잃어버린 너’(1991)로 이어지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녀는 인생 역경을 이겨낸 여인이었다. 상대 배우는 한참 선배인 연기자들, 그들과의 호흡이 잘 맞았던 것을 보면 연기에 있어서 그녀는 겁 없었음에 틀림없다. 그런 어른스러움이 한동안 그녀의 작품 세계를 지배했다. 다분히 애어른 같았다.

능청스러운 어른 연기는 스무 살을 넘어서며 자연스럽게 옅어졌다. 생애 첫 여우주연상의 기쁨을 안겨준 영화 ‘첫사랑’(1993), 스무 살 첫사랑의 설렘을 그녀보다 아름답게 그려내긴 쉽지 않을 것이다. 국내 최초의 항공드라마 ‘파일럿’(1993)에서 그녀는 지적이고 쿨한 신세대 전문직 여성이었다. 일찍 어른이 된 그녀는 자신만의 청춘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젊고, 발랄하고, 솔직하고, 독특하고, 때로는 짜릿한 모습으로 20대를 질주했다.

데뷔 이후 연기만큼 꾸준히 활동한 분야는 방송 진행이다. 1980~1990년대 최고의 인기 쇼 프로그램이었던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진행자가 된 것은 1992년. 배우 최민수와 공동 MC였던 그녀는 노래와 춤, 말솜씨까지 갖춘 종합 엔터테이너로서의 매력을 한껏 보여주었다. 더 이상 그녀는 지고지순한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말을 잘했다.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하여 표현하는 데 능했다. 상대의 마음을 여는 특유의 마력도 갖고 있었다. 분위기에 맞춰 흥을 돋우는 재주도 뛰어났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도 능수능란하게 대처하니 방송 진행자로서 이보다 더 탐날 순 없다. 몇 년 뒤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건 토크쇼 ‘김혜수의 플러스 유’(1998) 주인공이 되고 이후 3년간 방송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관능적이라고 한다. 많은 작품에서 과감한 노출과 거침없는 몸짓을 보여주긴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청룡영화제 사회자 김혜수가 더 관능적이다. 1994년부터 2015년까지 딱 한 번만 제외하고 연속하여 사회자로 무대에 올랐다. 그녀가 어떤 드레스를 입고 등장할 것인지 화제가 된 지 오래. 그녀의 드레스는 노출이 심하다.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모를 만큼 파격적이다. 무대를 가득 채운 그녀의 자신감과 관객을 사로잡는 카리스마야말로 “나 김혜수야”라고 온 몸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그것이 바로 김혜수의 힘이다. 자신을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솔직함, 예측할 수 없는 연예계에서 최고 배우로 30년간 정상을 지킨 힘이다.

그녀의 존재만으로 작품이 꽉 찰 수 있는 배우, 그녀가 아니면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신만의 확실한 영역을 구축한 배우, 자신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정확히 아는 배우. 욕망의 화신 ‘장희빈’(2003), 정체성 혼란의 극과 극을 보여준 경계성 인격장애자 ‘얼굴 없는 미녀’(2004), 노름판의 정 마담 ‘타짜’(2006), 패션잡지 편집장 ‘스타일’(2009), 전설의 금고털이 ‘도둑들’(2012), 자발적 비정규직 최고 능력자 미스 김 ‘직장의 신’(2013), 기미 낀 얼굴에 풀어놓은 밧줄 타래 같은 거친 헤어스타일의 잔혹한 뒷골목 보스 ‘차이나타운’(2015)까지 그녀는 항상 파격적인 도전으로 대중의 기대를 뛰어넘었다. 그럴 때마다 대중들은 그녀가 아니고는 그 역을 할 배우는 없다고 생각했다.

‘시그널’에서 그녀는 20대와 30대를 오가며 연기한다. 신임 경찰의 풋풋함이 어색하지 않고, 노련한 형사의 능숙함이 낯설지 않은 것은 그녀의 연기 폭이 그만큼 넓고 깊기 때문이다. “이대 나온 여자”가 “에지 있게” 범인을 쫓으니 누가 따라오겠는가. 그녀에게 공소시효는 처음부터 없었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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