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의 신’의 한 장면 ⓒphoto KBS
‘장사의 신’의 한 장면 ⓒphoto KBS

천봉삼으로 살았던 지난 몇 달 동안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구한말, 붕괴되어가는 봉건사회의 끝에서 새로운 시대를 꿈꿨던 보부상을 통해 진정한 장사꾼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던 장혁. ‘장사의 신-객주 2015’(KBS)는 지난 2월 18일 막을 내렸고, 장혁은 사극지존(史劇至尊)으로 남았다. 그는 자신처럼 장사꾼이 되고자 하는 아이들에게 말한다. “장사로 백성을 이롭게 하고, 힘겹고 어려울 때 동패들 간에 서로 도와 물화를 끊임없이 유통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보부상의 정신인 것이야.”

반항기와 아웃사이더의 거

몇 년 전 자신의 이야기를 엮어냈던 에세이집 ‘열혈남아’에서 “연기란 같이하는 배우들과의 유기적인 작업”이라며 팀워크와 조화를 강조했던 대목이 떠올랐던 대사였다.

그의 웃음은 어떻게 보면 어색하다. 과도하게 크고, 각져 있다. 소리로는 웃는데 얼굴은 웃는 것인지, 웃는 척하는 것인지 구별이 안 될 때도 있다. 얼굴엔 반항기가 가득하고 아웃사이더의 거이 있다. 소망하는 그 하나를 품기 위한 집요함과 목숨마저 던질 수 있는 배짱을 갖고 있는 상남자다.

데뷔작인 ‘모델’(1997)에서부터 영화 ‘짱’(1998), 연기자들의 등용문이었던 ‘학교’(1999)까지 그의 처음은 항상 날 선 불만을 표출해내고 있었다. 어른들의 시선에서 쏟아내는 충고와 조언은 답답했다. 아픈 실패가 있다 하더라도 자유롭게 세상을 달리고 싶었다. 체육교사가 되고 싶었으나 부모님은 반대하셨다. 꿈이 꺾인 청년은 방황했고, 그러다 찾은 길이 연기였기에 그는 그런 청춘의 대변자가 되고 싶었다.

드라마 속 장혁은 로맨틱하거나 액션적이다. SBS 연기대상 최우수 남자연기상의 기쁨을 안겨준 ‘명랑소녀 성공기’(2002)에서 그는 초기의 거친 이미지에서 선회할 수 있었다. 독불장군, 안하무인, 유아독존, 고집불통에 불같이 급한 성격을 가진 재벌 2세지만 어딘가 헐렁헐렁하여 피식피식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상대역은 로맨틱코미디의 강자 장나라였다.

본방송 1주일 전에 촬영이 시작되었고, 방송 당일 촬영과 비현실적인 판타지 구성이라는 부정적 여론에도 불구하고 시청률 44%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배우들 몫이 컸다. 장혁은 반항적 이미지의 틀은 갖고 있었지만 그 안에 순정과 사랑과 유머를 담아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 냈다. 12년이 지난 뒤 장혁과 장나라는 ‘운명처럼 널 사랑해’(2014)에서 다시 호흡을 맞췄다. 십 년을 훌쩍 뛰어넘는 세월이 무색할 만큼 두 사람의 호흡은 척척 들어맞았고, 로맨틱코미디의 맛과 멋은 한층 성숙해졌다. 장혁의 달콤한 연기도 그 시간만큼 성장해 있었다.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장혁 또한 연기의 폭을 확장하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했다. 반항적 청춘물에서 로맨틱코미디를 거쳐 출연한 ‘대망’(2002)은 첫 사극이었다. 시대의 냉혹함에 적응하지 못하고 마음 가는 대로 살지만 덕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상인 박재영이 된 그는 정말 하고 싶었던 역이라 캐스팅된 후 역사 및 사극 연기 공부를 꾸준히 했다고 한다. 세상에 공짜가 없듯 연기의 지평도 그냥 넓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뿔난 고등학생 같았고, 잠들지 못하는 청춘의 상징 같았던 장혁은 들판에 풀어놓은 망아지처럼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종횡무진 달렸다. 시청률도, 관객수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 사이에 ‘TJ Projet’란 이름으로 가수 활동도 했다. 첫 앨범이자 아직까지는 유일한 앨범인 ‘일월지애’에 수록된 대부분의 곡은 뮤직비디오로 제작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전지현, 이나영 등과 함께 출연한 뮤직비디오는 곡마다 한 편의 영화 같았다. 그러나 래퍼가 되어 무대에 오른 그는 낯설었다. 노랗게 물들인 머리에 한껏 멋이 들어간 의상,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게 낮은 목소리로 쏟아내는 랩, 느리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는 춤. 좋게 보자면 시대를 앞서갔고, 존재감 강한 배우 장혁의 밑거름이 되었지만, 신인급 배우의 변신은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능청스러움과 너스레

가수 활동은 이내 주춤해졌고, ‘명랑소녀 성공기’로 정상에 오른 듯했으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정용준(장혁의 본명)보다는 배우 장혁이 되고 싶었던 이십대의 그는 모든 미디어를 장식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고, 서른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군에 입대했다. 그는 뒤돌아선 후회보다 앞설지언정 나아감을 선택하는 스타일이다. 입대 후 군생활에 최선을 다했고, 사단장 표창을 받을 만큼 우수한 군인이 되었다. 자신을 다잡기 위해 독서와 운동을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만기 전역을 한 그는 이전과는 다른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복귀작은 ‘고맙습니다’(2007). 상처 입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희망과 기적이 되어주었던 동화 같은 드라마였다. 제목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최적의 선택이었다. 내면의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힘과 그것을 차분하게 안배하는 조절력이 돋보였고, 두서없이 앞서가려는 서두름이 사라졌다.

그를 가장 강렬한 이미지로 기억하게 해 준 것은 당연히 ‘추노’(2010)의 대길이다. 병자호란 때, 첫사랑이었던 노비 언년이가 오랑캐에게 잡혀갔다. 살려달라 울부짖는 그녀를 쫓아가 구해냈으나 반상(班常)의 구분이 엄했던 시대, 언년이는 치도곤을 당했고 이를 지켜보던 언년의 오라비는 대길의 집에 불을 질렀다. 창졸지간에 부모를 비롯한 식구 모두를 잃고 집안마저 폐가가 된 그는 언년이와 그 오라비를 잡기 위해 추노꾼이 되었다.

‘추노’의 장혁을 보고 명불허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순간순간 변하는 그의 눈빛 때문이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양반집 도령이 언 손 녹여가며 일하는 여종을 위해 화롯불에 돌멩이를 달궈줄 때는 더없이 순수했다. 도망친 노비를 잡으러 달려갈 때는 먹이를 발견한 야수 같았고, 그런 생활이 10여년 흐르니 노회한 맹수처럼 흔들리지 않는 잔인함으로 번쩍였다. 하지만 복수도 사랑도 모두 부질없는 것임을 알게 된 순간 “이 지랄 같은 세상 바꿔 보고 싶다”던 그의 눈 안엔 되돌릴 수 없는 허무함만이 가득했다. 고달픈 추노꾼의 삶을 그는 그렇게 잊혀지지 않는 눈빛으로 보여주었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임금을 암살하려는 노비 출신 겸사복 관원 채윤의 ‘뿌리 깊은 나무’(2011)는 ‘추노’에서 어쩌다 명연기를 보여준 것이 아닐까 하는 대중들의 의심을 남김없이 씻어주었다. 뛰어난 무술 솜씨와 목적한 바를 향해 돌진하는 강인함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보여주었다. ‘빛나거나 미치거나’(2015)에서는 저주의 낙인이 찍힌 왕건의 아들 왕소가 되었다. 어떤 때는 능청스러움과 너스레로 허파에 바람 든 사내가 되었다가, 어떤 때는 치밀하고 대범한 결단력을 가진 왕자가 되었다. 마치 1인2역을 하듯 운명과 도전 사이를 날아다녔다.

‘일밤? 진짜 사나이’(2013)에 출연한 장혁은 누구보다 모범적이었다. 훈련 현장이든 내무반이든 어디서든 최선을 다했다. 오랜 시간 절권도로 단련된 몸의 근육은 완벽했다. 배우로서, 남자로서 업그레이드된 매력을 충분히 발산한 그는 “나름대로 열심히 연기했고, 이 정도면 되지 않았나 싶었던 순간”이 있었지만 그것이 배우 인생에서 가장 큰 장애물임을 일찍 알았다고 한다.

“가슴을 데인 것처럼, 눈물에 베인 것처럼” 지워지지 않는 이름 ‘배우 장혁’, 불혹의 벌판에 들어선 그는 어디를 향해 달려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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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희정 드라마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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