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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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여전했다. 호피 무늬 옷을 즐겨 입어 쌍문동 치타 여사로 불리며 ‘응답하라 1988’(tvN) 성공의 주역이던 때가 몇 달 전인데, 이젠 하늘나라 리라이프(relife) 센터 매니저 마야가 되어 ‘돌아와요 아저씨’(SBS)의 감초로 동분서주 중이다. 데뷔 12년차 배우 라미란, 단역배우였던 그녀는 이제 기다리는 작품이 줄을 설 만큼 인기 배우가 되었다. 자신만을 주인공으로 한 개인 기자간담회도 했다. 게다가 미모의 여배우들만 한다는 화장품 모델, 그것도 유명한 글로벌 브랜드 모델이 된 그녀는 지금 한껏 빛나고 있다.

2015년 그녀는 바빴다. ‘국제시장’ ‘워킹걸’ ‘미쓰 와이프’ ‘대호’ ‘히말라야’ 등 영화 5편, ‘막돼먹은 영애씨-시즌 14’ ‘응답하라 1988’ 등 드라마 2편, 광고 6편까지 종횡무진 세상을 누볐다. 여길 봐도 라미란, 저길 봐도 라미란, 세상이 라미란이 나온 작품과 아닌 작품으로 구분되는 듯했다. 잦은 출연에 식상해질 만도 한데, 모두 다른 라미란을 만난 듯 신선했다.

데뷔작은 ‘친절한 금자씨’(2005). 간통죄로 구속되어 악명 높은 교도소 마녀에게 온갖 괴롭힘을 당하는 오수희 역이었다. 등장부터 범상치 않았다. 욕조 속 엉덩이 노출신으로 세간에 화제가 되었지만, 그보다는 참아내기 힘든 역겨운 상황에서도 살아야겠다는 인간의 본심을 잘 보여준 점이 인상적이었다. 금자의 도움으로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 출소하게 된 그녀는 금자의 복수를 도와준다. 교도소 시절과 달리 깔끔한 쇼트커트 헤어스타일과 세련된 옷차림의 그녀가 뱉은 한마디 “그 새낀 찾았어? 죽였어?” 섬뜩했다.

명품 조연이나 감초 연기 달인들의 공통된 경력 중 하나는 오랜 시간 연극 무대에서 배우로 활동해 왔고, 꺼지지 않는 연기에 대한 열정을 주체하지 못해 생활고에 시달려도 배우라는 이름을 품고 살았다는 점이다. 라미란 역시 그러하였다. 1년 내내 연기를 해도 수입은 몇백만원 수준, 심할 때는 몇십만원에 그친 적도 있다고 한다. 남편은 가수 매니저. 음반시장이 휘청거리면서 그녀의 남편은 매니저를 그만두었고, 노동을 업으로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녀는 그런 남편의 직업을 당당히 밝혀 ‘개념 배우’라 불린 적도 있다. 자신의 능력에 맞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어떠냐는 그녀의 반문에 오히려 그녀의 체면을 앞서 걱정했던 사람들은 머쓱해졌다.

“하고 싶은 일이 배우이고, 배우는 나의 직업”이라 말하는 그녀이기에 단역이든 조연이든 주어진 인물에 최선을 다했다. ‘괴물’(2006)에서 그녀는 괴물에게 쫓기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하늘색 티셔츠에 청색 면바지를 입은 그녀는 아이를 구해달라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는 엄마였다. 딱, 35초 출연했다. 지금이야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지만 ‘괴물’이 개봉되었을 당시만 해도 단역인 그녀를 기억할 수는 없었다. 이어 ‘음란서생’(2006), ‘잘살아보세’(2006), ‘마을금고 연쇄 습격사건’(2007), ‘그녀는 예뻤다’(2008), ‘미인도’(2008) 등에 연이어 출연했지만 그녀의 존재를 기억하기엔 부족했다. 심지어 그녀는 극중 이름도 없이 부인1, 맞선녀2로 출연하기도 했다. 누가 해도 크게 상관없을 만큼 작은 단역이었다.

“배우로서 지금이 행복하다”

그러나 꾸준한 것에는 장사가 없다고 했다. 데뷔 이후 지금까지 그녀가 출연한 작품은 영화가 40편, 드라마가 19편이다. 단역과 조연이 대부분이지만, 잠시도 멈추지 않고 연기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시간이 오늘날 배우 라미란을 있게 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의 연기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작품은 ‘댄스타운’(2010)이다. 첫 주연작이기도 했다. 제15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상 여자배우상 수상의 영광을 안겨준 이 작품에서 그녀는 탈북여성이 남한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한국 영상물을 봤다는 이유로 이웃에 의해 신고되자 탈북을 결심한 여자 이정림, 믿을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자신의 생각과 다른 형태로 맺어지는 관계들은 뿌리내리지 못한 그녀의 삶을 쉼 없이 흔들어 놓았다. 저런 인생이 있을까 싶을 만큼 건조하고 메마른 일상 속에서 그녀가 감당해야 할 고통을 배우 라미란은 담담하고 적나라하게 펼쳐보였다. 너무 현실적이어서 다큐멘터리가 아닌가, 저 여자는 배우가 아니라 진짜 탈북녀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소원’(2013)을 통해 제34회 청룡영화제 여우조연상을 거머쥐었다. 아동 성폭행 사건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에서 그녀는 소원이 엄마의 친구 영석 엄마로 나왔다. 있을 수 없는 일을 겪은 친구 곁에서 묵묵히 응원자가 되어 마음으로 전한 진실함이 돋보였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아보면서 감동과 재미를 줄 수 있는 직업인 배우가 자신에게 잘 맞는다는 것에 감사한다는 그녀답게 텔레비전에서도 그녀는 현대극, 시대극, 사극을 넘나들며 다양한 인물이 되었다. 자신의 이름 그대로의 역으로 출연한 ‘막돼먹은 영애씨’(2013)에서는 개성 있는 연기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국내 최장기 시즌제 드라마이기도 한 ‘막돼먹은 영애씨-시즌 12’부터 합류하여 시즌 14까지 끝낸 그녀는 낙원종합인쇄사에서 15년을 일하고 한순간에 쫓겨나 회사 동료였던 영애와 함께 회사를 차린 디자이너 라미란이었다. 구두쇠로 온갖 쿠폰 다 모아 갖고 다니며 쿠폰살이를 하고, 사방팔방 참견을 멈추지 않는 ‘오지라퍼’이다. ‘시간 또라이’라 불릴 만큼 시시각각 감정은 롤러코스터를 타고, 때로는 서슴없이 비굴해지기도 하지만 쑥스러워하지도 않는다. 너무나 능청스럽고 억척스러웠지만 대놓고 미워할 수도 없는 묘한 매력을 보여주었다.

‘응답하라 1988’에서도 그녀의 극중 이름은 라미란이었다. 시원시원하고 화끈한 여장부로 골목 아줌마들의 큰형님인 그녀는 작은 것이라도 나누지 않으면 마음 불편해 하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한때는 쌍문동 골목에서 가장 어렵게 살았지만, 복권 1등에 당첨되어 번듯한 집도 사고 전자대리점도 열어 떵떵거리며 산다. 극중에서 전국노래자랑 예선전에 참가하는 장면이 있었다. 반주 테이프가 바뀌어 노래를 할 수 없게 되자 입반주로 노래 부르고 현란한 춤으로 부족한 점을 메워나갔던 그녀.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선 앞뒤 가리지 않고 몰입하는 쌍문동 치타 여사이자 배우 라미란 그 자체였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출연한 두 편의 드라마를 통해 그녀는 배우로서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다. 영화 ‘국제시장’으로 천만배우 그룹에 합류한 배우. 평범함과 편안함이 장점인 그녀를 보고 있으면 긴장이 풀린다. 다음 작품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지금이 배우로서 참 행복하다는 그녀는 많은 작품에 연속 출연함으로써 연기력이 소진될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에게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배우이고 싶다고 한다. 비슷한 역할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대중들의 기대에서 ‘조금’만 틀어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친숙하면서 다른 모습을 만들어가는 그녀만의 지혜이다.

그녀가 꼭 해보고 싶은 것은 멜로드라마라고 한다. 짜릿하고 격정적인 멜로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보여줄 수 있는 진한 멜로. 왠지 생활 연기의 달인 라미란표 멜로는 오랜 여행에서 돌아온 집처럼 편안한 감동이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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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희정 드라마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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