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변호사 조들호’에서 연기하는 배우 박신양.
‘동네 변호사 조들호’에서 연기하는 배우 박신양.

검정고시 출신 검사 조들호에게 돈과 힘을 주겠다고 검사장이 다가왔다. 정의사회 구현을 위한 투철한 사명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검사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어둠을 거둬낼 수 있어 좋았다. 자신을 알아봐준 검사장이 고마워 지시하는 일은 무엇이든 다 해냈다. 무죄를 유죄로 만들어도 필요한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초고속 승진, 대한민국 최고 로펌 대표 딸과의 결혼, 미래는 보장된 듯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았을 때, 그는 자신을 선택해준 돈과 힘으로부터 처절하게 버림당했다.

‘거래, 음모, 위증이 오가는 법정 안에서 온몸이 발가벗겨진 단 한 명의 의뢰인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변호사 조들호는 얼핏 보면 변호사인지 깡패인지 사기꾼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다. 좌충우돌,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종잡을 수가 없는 그는 종횡무진 자신만의 방법으로 힘 없는 사람들의 변호를 시작했다. 한때 “나 하나쯤” 눈 감아도 세상은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나 하나쯤”이란 괴물의 역습을 받아 세상이 비뚤어지는 것을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동네 변호사 조들호’(KBS)의 조 변호사는 배우 박신양과 닮아 보였다. 한번 마음먹은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한 철저한 준비와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것, 될 수 있다는 긍정적 생각과 어떤 위기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배짱, 그리고 ‘함께’라는 가치에 대한 믿음까지.

3년간의 러시아 유학 생활

원숭이띠인 배우 박신양은 올해 마흔아홉이다. 그의 이력엔 특이한 것이 있다. 러시아 유학. 보통의 연기 지망생과 같이 대학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그는 그곳에서 인생을 바꿔놓을 만큼 훌륭한 스승을 만났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한 후 어느 날 자신을 돌아보니 “하잘것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는 것도 없는 너무나 심각한 사람”이었다. 딱 한 분의 스승만 더 만날 수 있다면 이런 갈증이 풀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스승을 찾아 1992년 러시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3년간의 러시아 유학 생활은 쉽지 않았다. 끼니를 거르며 연기에 몰입했던 그는 체력이 저하되어 사경을 헤맬 만큼 아팠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무모했지만 오로지 연기 하나만을 향한 열정을 아낌없이 불태웠던 시절이었다. 1809년 설립된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쉐프킨연극대학에서 연기를, 1914년 설립된 슈킨연극학교에서 연극이론과 연출을 공부하고 돌아온 그는 영화 ‘유리’(1996)에 출연하며 배우로의 본격 활동에 들어갔다.

‘유리’는 난해한 원작에도 불구하고 삶과 죽음이라는 화두를 힘 있게 그려낸 작품으로 기존의 영화 관습을 벗어버린 새로운 형식의 영화라는 평을 받았다. 수도승 유리였던 박신양은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좇아 온갖 기행과 살인마저 서슴지 않는 기이함을 보여주었다. 컬트와 아트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만큼 그의 도전은 격정적이었다. 칸영화제 초청작이기도 했던 ‘유리’로 제17회 청룡영화제 신인남우상과 제33회 백상예술대상 신인연기상을 수상한 그는 단박에 영화계 관심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파격적인 데뷔작과 달리 한동안 그는 달달한 멜로물에 집중했다. TV 첫 작품이었던 ‘사과꽃 향기’(1996)에선 선배를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간직한 기자였고,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애절한 사랑으로 물들였던 ‘편지’(1997)에선 죽음을 앞두고 혼자 남게 될 아내에게 눈물의 편지를 써내려간 뇌종양 환자였다. “니가 걸을 땐 너의 발을 부드럽게 받쳐줄 흙이 되고, 니가 앉을 땐 넓고 편평한 그루터기가 되겠다”는 그의 편지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가. 그에게 청춘스타라는 수식어를 달아준 ‘내 마음을 뺏어봐’(1998), 정통 멜로를 표방했던 ‘화이트 발렌타인’(1999)을 거쳐 “이 남자가 내 남자다, 왜 말을 못하냐”고 소리 지르다가도 “애기야 가자”라며 더없이 감미로운 웃음을 보여주며 여심을 저격했던 ‘파리의 연인’(2004)에서 멜로의 정점을 찍은 그는 연기 변신을 시작했다.

‘범죄의 재구성’(2004), 화려한 입담의 사기꾼 최창혁이 된 그는 외모부터 말솜씨, 눈빛까지 완벽하게 달라졌다. 변치 않는 순고한 사랑의 화신은 온데간데없고 속내를 알 수 없는 포커페이스가 되어 신명 나는 사기극을 펼쳤다. ‘쩐의 전쟁’(2007), ‘바람의 화원’(2008), ‘싸인’(2011), ‘박수건달’(2013)로 이어가며 그의 카리스마 연기는 단단해졌다.

장르물은 그로 하여금 연기를 위한 준비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게 했다. 배우 박신양이 아닌 작품 속 인물이 되기 위해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고 현장을 찾아갔다. 법의학자가 되기 위해 부검의들과 여러 날을 함께했고, 박수 무당이 되기 위해 굿판을 들락거렸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배우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항상 그렇게 철저히 준비했다.

연기지망생 장학회를 통해 후원

요즘 그는 배우학교 교장이 되었다. 예능프로그램이지만 다큐멘터리 같기도 하고 교육프로그램 같기도 한 ‘배우학교’ (tvN)에서 연기를 가르치고 있다. 얼굴을 보면 알 만한 배우와 개그맨들이 그의 학생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묻는다. 왜 연기를 하고 싶은지, 연기는 무엇이고, 연기자란 무엇인지, 그리고 당신은 누구인지. 대답하는 학생들은 자기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채 얼버무렸고, 박신양은 끝없이 질문했다. 왜, 어떻게, 무엇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지 말하라고 했다. 연기라면 너무 리얼하고, 사실이라면 너무 혹독한 수업은 회를 거듭하면서 연기가 어떻게 발전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연기 수업 쇼’가 아닌 진정한 ‘연기 수업’을 하자”는 그는 한순간도 연기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지 않았다. 잠시 쉬는 시간에도, 밥을 먹으면서도, 운동장을 걸으면서도 어떻게 하면 참된 연기자가 될 것인지 고민했다. “연기는 살아있지 못하면 연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그 앞에서 몇 년 안 된 초보 연기자부터 20년 넘은 중견 연기자까지 아무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내가 왜 연기를 하려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수없이 반복하게 하는 ‘배우학교’는 마치 왜 사느냐고 끊임없이 묻는 철학자의 공간 같았다.

사실 박신양은 연기지망생들을 후원하는 장학회를 통해 연기 지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미 실천하고 있다. 2008년 설립한 FUN 장학회는 “오랫동안 연기 생활을 하며 비뚤어지지 않을 정직하고 솔직한 소양을 지닌 지망생”을 선정하여 지원하고 있다. 꿈을 향해 가는 길에서 넘어지고 일어서길 수없이 반복할 때 한번쯤 따뜻하게 손잡아 주고, 응원해 줄 수 있는 선배가 되고 싶었던 그에게 딱 맞는 일이다. 실질적인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과 평생 멘토링을 통해 ‘연기 나눔’을 실천하는 그가 좀 멋져 보였다.

배우로 30년 가까운 시간을 보낸 그는 항상 절실함을 생각하며 산다. 절실하면 길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믿기에 항상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얼마나 절실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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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희정 드라마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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