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4일 서울 양천구 목동 SBS에서 열린 주말드라마 ‘미세스 캅 2’ 제작발표회에서 배우 김성령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4월 4일 서울 양천구 목동 SBS에서 열린 주말드라마 ‘미세스 캅 2’ 제작발표회에서 배우 김성령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속편 주인공에게 성공한 전작(前作)은 당연히 부담스럽다. 최근 ‘미세스 캅 2’(SBS)에서 강력계 형사 고윤정으로 맹활약한 배우 김성령은 전편과 다른 형사가 되기 위한 고민이 깊었을 것이다. 극중 인물이란 작가와 감독이 만들지만 배우에게 꼭 맞지 않으면 빌려 입은 옷처럼 어색하고 불편하다는 것을 잘 알기에 대본이 그녀에게 넘어온 후 고윤정을 만들어가는 것은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한 킬힐에 와인색으로 물들인 머리, 검은색 매니큐어, 세련되다 못해 화려한 옷은 어느 패션쇼장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왔다. 그것이 김성령표 형사의 외형이었다. 다혈질에 감정기복도 심하고, 직설과 독설이 입에 밴 그녀는 별종 중 별종이었다. 하지만 같이 살고 있는 친정아버지 앞에선 투정부리는 딸이고, 아들에게는 장난기 많은 친구 같은 엄마다. 경찰대학 출신으로 미국에서 행동심리학을 공부한 만큼 촉이 발달한 그녀의 두뇌 플레이는 뛰어났다. 팀장으로 팀을 장악하는 포스 또한 강렬했고 날렵한 몸매만큼 빠른 행동은 현장에 출동해도 후배들에게 뒤처지지 않았다. 겉모습만 본다면 그녀가 자주 해왔던 강남 부잣집 사모님 모드이고, 딱 부러진 말투 또한 우리에게 익숙한 ‘차도녀’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범인과 몸싸움을 벌일 때의 격렬함이나 민첩함, 냉혈한과 심리전을 펼칠 때의 날카로움은 그녀가 경찰청 소속 형사로 완벽하게 변신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출발은 화려했다. 미스코리아 진에 포토제닉상까지 거머쥔 2관왕이었다. 1988년 올림픽이 열리던 해,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는 국가적 이벤트라 불릴 만큼 온 국민의 관심사였고, 연예인의 등용문이었던 시절이다. 오월의 여왕이 된 김성령은 단번에 별이 되었다. 미의 사절로 한국의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 알리는 일뿐만 아니라 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 홍보까지 그녀는 분주했다. 그리고 그해 말 ‘연예가중계’ 제7대 진행자로 안방극장에 입성했다.

여담이긴 하지만 김성령이 ‘연예가중계’ 진행자가 될 때 그 자리를 넘겨준 사람이 김희애였다. ‘미세스 캅 2’의 전작에서 강력계 형사 최영진으로 활약한 것도 김희애였다. 사사건건 전편과 속편의 주인공을 비교하며 드라마 성패가 오롯이 주인공의 몫인 양 호들갑 떨기 좋아하는 대중에게 두 사람의 인연은 흥미로웠다. “이번에도 김희애에게 물려받았네”라는 말이 김성령에게는 또 다른 짐이 되었겠지만, 그녀는 자기 스타일의 형사를 만드는 데 성공한 듯하다.

하지만 29년 전의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멋진 배우가 될 줄 알았을까. 대학 졸업 후 불투명한 미래 앞에서 길을 찾지 못하던 그녀는 막연히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다. 답답한 마음에 엄마 친구인 의상실 디자이너를 찾아갔고, 그분이 소개해준 미용실 원장님 추천으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출전했다.

나이 마흔에 연극영화과 입학

유난히 똑 부러진 말투가 인상적인 그녀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연예가중계’ 마이크를 잡았다. 아나운서는 아니었지만 진행자라는 자리가 은근히 좋았다. 의욕은 넘쳤고 꾸밈은 과했지만, 진행 솜씨는 나쁘지 않았다. 가끔은 너무 솔직한 질문으로 초대손님을 당황하게 했지만 그런 솔직함이 오히려 신선했다. 연기자로의 데뷔는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1991)였다. 정치 스릴러라는 만만치 않은 장르였고, 상대 배우는 박근형과 안성기였다. 방송사 유명 앵커이자 야당 대통령 후보자인 박근형의 숨겨진 연인으로 진실 앞에 고민하는 언론인 역을 진솔하게 보여준 그녀는 그해 대종상영화제, 백상예술대상, 춘사영화상의 신인상을 휩쓸었다. 세상은 그녀가 갖고 있는 재능 이상으로 배우 김성령을 평가해 주었다. 영화, 드라마, 연극까지 그녀의 일상은 제철 만난 꽃처럼 피어났다.

하지만 화무십일홍 인불백일호(花無十日紅 人不百日好)라고 했듯이 그녀를 향했던 스포트라이트는 슬그머니 사그라졌다. 데뷔작으로 신인상을 휩쓸었던 만큼 차기작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두 번째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다. 이후 15년 동안 그녀는 영화와 담을 쌓았다. 드라마도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주인공의 자리는 멀리 있었다. 그래도 연기를 쉬진 않았다. 조금씩 연기의 폭도 넓혀갔다. 어느 때는 폐비 윤씨, 중종의 후궁인 경빈 박씨, 태종의 후궁인 효빈 김씨 등 왕의 여자도 되었고, 또 어느 때는 기품 있는 양반집 마님이나 요염한 기생이 되었다. 그녀는 의외로 사극에 잘 어울렸다. 현대극과 다른 발성과 움직임도 무난히 소화해 냈다.

그런데 어느 날 천년만년 조연만 할 것인가, 그래도 배우인데 대표작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자기를 알아봐 주지 않는 세상이 야속했는데 어느 날 돌아보니 자신의 연기가 그만큼밖에 되지 않음이 보였다고 했다. 마흔의 나이에 그녀는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단련된 쇠는 달랐다. 서서히 그녀의 연기에 새로운 발동이 걸리더니 ‘추적자’(2012), ‘야왕’(2013), ‘상속자들’(2013)에 연달아 출연하면서 그녀는 거부할 수 없는 존재감을 대중에 각인시켜 갔다. 재벌 회장의 딸로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오만함과 별이 되고 싶었던 오페라 가수의 꿈, 그리고 그 내면에 깃들어 있는 주체할 수 없는 고독으로 힘겨워했던 ‘추적자’의 서지수, 차갑고 도도하지만 운명처럼 다가오는 사랑을 거부하지 못했던 비극의 주인공 ‘야왕’의 백도경, 재벌 회장의 숨겨진 여자로 언젠가 자신의 아들이 그룹 후계자가 될 것을 꿈꾸는 여자, 욕망만큼이나 행동에 거침이 없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았던 ‘상속자들’의 한기애. 그녀는 작품 속 인물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어떻게 연기해야 다른 배우들이 넘볼 수 없는 자신만의 인물이 되는지 방법을 터득한 듯 보였다.

이어 칸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초청되어 호평을 받은 영화 ‘표적’(2014)에선 털털한 형사가 되었고, 같은 시기에 개봉한 영화 ‘역린’(2014)에서는 혜경궁 홍씨가 되었다. 더 이상 출연 분량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존재만으로 영화와 드라마는 무게가 달라졌고, 메시지는 살아났다.

스스로 재능도 없고, 학벌도 별로이고, 자신감조차 없는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하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다. 배우를 직업으로 택한 이상 대중 앞에서 작아지지 않기 위해 매일매일 자기 자신을 점검하고 또 점검한다. 예측할 수 없는 또 다른 자신으로의 변신을 즐기기 위해 자신을 고정시키는 끈을 풀어놓을 줄도 안다. 세상이 생각보다 쉽게 자신의 손에 들어와서 그랬는지 젊은 시절의 그녀는 오만해 보이기도 했지만, 세상을 알게 된 지금의 그녀는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는 오래된 친구처럼 든든하다. 한없이 도도할 것만 같고, 얼음보다 차가워 보이는 그녀가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엉뚱한 모습을 보여줄 땐 이런 면도 있었나 싶을 만큼 귀여워진다.

마흔이 넘어 세상을 진심으로 유혹했고, 세상은 그녀를 보며 흔들렸다. 대세배우 김성령, 스스로 인생작이라 말하는 ‘미세스 캅’을 끝낸 그녀를 우리는 ‘미세스 톱’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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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희정 드라마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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