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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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그것도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 겹치기 출연한 배우 전광렬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렬했다. 전옥서(현 교도소)에서 태어난 다모 옥녀의 이야기를 그린 ‘옥중화’(MBC)에서 그는 체탐인(현 정보원) 박태수였다. 20년째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그는 전직 조선 최고의 체탐인. 풀어헤친 산발머리에 누더기 옷을 입고 있지만 한 줄기 빛에 비쳐진 그의 눈빛엔 아직도 날이 서 있었다. 비록 7부에서 죽음으로 퇴장했지만 그는 50부작 ‘옥중화’가 무게중심을 잡는 데 톡톡히 기여했다. 이병훈 감독과의 인연으로 겹치기 출연이지만 특별출연했다는 그는 말 그대로 ‘특별’했다.

또 하나의 전광렬은 왕좌(王座)를 향한 치열한 욕망을 그린 ‘대박’(SBS)에서 비단 도포 자락 휘날리는 이인좌이다. 자신의 무리가 득세하지 못하면 세상 밖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조선의 부조리함을 보며 반란을 꿈꾼 그는 숙종과 일전을 치르고 있다. 자신의 계획대로 세상을 움직이기 위해 벌이는 그의 행적은 피의 광기로 물들어 있었다. 섬뜩했다. 자식처럼 여긴 제자를 잃고 그에 대한 복수로 왕의 아들을 잔인하게 죽일 때 떨리던 그의 시선과 핏발 선 눈,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휘둘렀던 칼은 이인좌의 분노를 전하기에 충분했다.

가상의 인물인 박태수와 실존인물인 이인좌는 외모부터 달랐지만 몇 겹의 포장을 걷어내고 나면 그 안엔 배우 전광렬이 있었다. 누가 되었든 세상을 향한 고뇌는 깊었고, 목표한 바를 향해 돌진하는 발걸음은 포효하는 사자 같았다.

‘허준’으로 명예 한의학 박사까지

그는 현대극보다 사극에 더 어울린다. 그를 스타 반열에 올려준 ‘허준’(2000)의 아우라 덕분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서출 신분을 극복하고 선조와 광해군의 어의에 오른 허준의 일생을 그는 진솔하게 그려냈다. 전광렬 이전에 허준을 연기한 배우는 ‘집념’(1975)의 김무생, 영화 ‘집념’(1976)의 이순재, ‘동의보감’(1991)의 서인석이 있었다. 1대 허준이라 할 수 있는 김무생은 선 굵은 연기로, 이순재는 깐깐함으로, 서인석은 단단함으로 의술을 통해 휴머니즘을 실천한 허준을 그렸다. 모든 작품이 나름 성공했다.

그런 허준을 또다시 드라마로 만든다고 했을 때, 배우는 당연히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2000년의 ‘허준’은 달랐다. 한의학 거장으로서의 허준이 아니라 역경을 딛고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굳건한 심지를 갖고 있는 인물이며 어떠한 세파에도 흔들리거나 좌절하지 않아야 했다. 심지어 무술까지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런 허준을 전광렬은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해냈다. 마음껏 펼쳐지 못했던 배우의 꿈, 데뷔 20년 만에 만난 허준은 그렇게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전광렬은 ‘허준’으로 MBC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경희대학교 명예 한의학 박사 학위까지 받으며 대중적 인물이 되었다.

그에게 의사 역이 처음은 아니었다. 파란만장한 침술사의 삶을 통해 동양의학의 진가와 참 인술을 보여준 ‘거인의 손’(1994), 레지던트의 수련과정을 통해 의사의 삶과 병원의 일상을 보여주었던 ‘종합병원’(1994). 특히 외과 레지던트 1년 차 백현일이었던 ‘종합병원’에서 그는 다정다감하기보다는 환자의 완치를 위해 차가운 이성을 우선시하는 의사였다. 의사라는 전문직을 세밀하게 그려낸 최초의 의학드라마라는 평가를 받는 만큼 ‘종합병원’의 배우들은 의사가 된 듯 수많은 의학 용어와 의료 행위에 익숙해져야 했으니 그중 하나였던 전광렬이 허준을 연기하는 것은 어쩌면 운명이기도 했다.

‘청춘의 덫’으로 스타덤

그러고 보니 그를 사랑의 히로인으로 만들어주었던 ‘청춘의 덫’(1999)에서도 대선배 박근형이 했던 노영국 역(役)을 다시 연기했다. 입신과 영달을 위해 헌신적이었던 여인과 자신의 딸마저 버리고 떠난 한 남자에 대한 복수극이었던 ‘청춘의 덫’. 겉으로는 한량 같지만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는 영국은 아픈 과거의 상처를 안고 있는 윤희를 진실된 사랑으로 보듬어 줌으로써 여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청춘의 덫’은 1978년 첫 방송될 당시 혼전동거와 임신, 무차별적 배금주의 등을 이유로 조기 종영된 작품이었다. 작가를 비롯하여 제작진에게 아쉬움이 남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래서 1999년판 ‘청춘의 덫’은 더욱 화제였다. 박근형이 풍부한 감성으로 부드러운 재벌 2세인 영국을 보여주었다면 전광렬은 다소 무뚝뚝하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항상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키다리 아저씨 같은 모습으로 20년 후의 영국을 차별화해냈다. 허준이든 노영국이든 이미 대중들이 알고 있는 인물을 새롭게 만들어내야 했던 그에게 1999년은 도전의 해였고, 배우 전광렬로 한 단계 올라선 해였다.

그의 데뷔는 1980년 6월, 격변의 시대 앞에 서 있던 TBC의 특채 탤런트였다. 대학에선 바순을 전공했지만 그의 마음은 배우의 길에 와 있었다.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에 바순을 부숴버리는 것으로 답했던 그는 배우가 되었지만 TBC가 없어지면서 배우로서의 그의 일상은 녹록하지 않았다. 날개는 펴보지도 못한 채 단역과 말단 조연을 전전하며 10년을 보낸 뒤, ‘여명의 그날’(1990)에서 김일성으로 때를 만난 듯했다. 그러나 운명은 아직 그의 편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획을 그었던 인물을 인간적이면서도 카리스마 있게 그려낸 그는 선배 배우들과 팽팽한 균형을 보여주는 데는 성공했지만 드라마는 13회 만에 중단되었다. 광복전후사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배우인 그에게도 영향을 미쳤던 시절이었다. 최선을 다한 그의 연기가 있었기에 대중들은 그의 부재(不在)를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주연이든 조연이든 자신에게 주어진 인물로 완벽하게 변신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초심을 다시 한 번 다진 때이기도 했다.

배우 전광렬을 빼고 사극을 논할 수 없을 만큼 사극에서 그의 존재는 독보적이다. 숙종으로 나왔던 ‘장희빈’(2002), 부여 금와왕이었던 ‘주몽’(2006), 내시부 수장 조치겸이었던 ‘왕과 나’(2007), 조선 제일의 검객 김광택이었던 ‘무사 백동수’(2011), 조선 최고의 사기장 이강택이었던 ‘불의 여신 정이’(2013) 등. 착한 역이든 악한 역이든 그에게 주어진 선택은 항상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타협이란 없었다. 극단의 선택, 그것이 그의 몫이었다. 그러다 보니 조연이어도 주인공을 압도할 만큼의 무게감으로 자신만의 아우라를 뿜어낼 수밖에 없었다.

거부할 수 없는 존재감은 현대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의사, 프로파일러, 대기업 회장, 강력반 형사, 공안검사뿐만 아니라 지방 출신 국회의원으로 비열한 욕망의 화신을 완벽하게 소화해낸 ‘빛과 그림자’(2011)까지, 그는 한순간도 가벼웠던 적이 없다. 무언가 결정하는 순간의 그는 비장한 눈빛 하나만으로도 상대를 제압하기에 충분했다. 발음은 정확했고, 목소리는 보통보다 한 단계쯤 낮았다. 문장은 길지 않았다. 미간엔 얕은 주름이 잡히고, 두 눈은 상대방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상대와 기싸움을 할 때 그의 입은 작게 움직였다.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지만, 한번 터져 나온 분노는 아무도 잠재울 수 없었다.

배우 전광렬을 볼 때 가끔은 비장한 카리스마 너머엔 어떤 모습의 그가 있을까 궁금하다. ‘리멤버 아들의 전쟁’(2015)에서 보여준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버지의 순박한 모습, 모든 것을 내려놓은 그의 다른 모습이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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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희정 드라마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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