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또!오해영’ 공식 사이트
ⓒphoto ‘또!오해영’ 공식 사이트

이번엔 급이 달랐다. 일할 땐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그녀이지만 퇴근하고 나면 술과 함께 나사가 느슨해진다. 풀어헤친 머리 때문에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 구별도 안 되고, 비틀거리며 걷다가 담벼락에 기대 앉아 펑펑 울 때는 반쯤 정신도 나가 보인다. 뜬금없이 하늘을 쳐다보며 프랑스어로 뭐라 뭐라 떠들기도 한다. 졸다가 버스 의자에서 굴러떨어져도 잽싼 몸놀림으로 폼 나게 자세를 잡는다. 낮은 목소리로 짧고 명료하게 이어가는 대화는 상대를 제압하는 힘도 있어 보이지만, 떠나간 사랑을 잊지 못해 매일매일 술을 찾고 아침이면 1.5리터 생수를 숨 몇 번 쉬지 않고 마셔버리는 것이 그녀의 민낯이다.

‘또! 오해영’(tvN)에서 외식사업본부 이사 박수경으로 출연 중인 배우 예지원은 패션이면 패션, 말투면 말투, 움직임이면 움직임 모두 예사롭지 않다. 특히 프랑스 여행 갔다 대책도 없이 어학원에 등록하고 열 달 동안 배웠다는 프랑스어가 수경이가 된 그녀를 통해 이렇게 빛을 발할 줄 몰랐다. 제대로 봉인이 풀려버린 그녀의 예측할 수 없는 행보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1980년대 한껏 인기를 끌어 모았던 토속적 에로티시즘이 슬슬 주변부로 자리 이동하던 때 영화 ‘96 뽕’으로 데뷔했다. 생존을 위해 남편이 있는 몸임에도 불구하고 동네 남자들에게 몸을 팔던 안협댁 역이었다. 이미 1985년 배우 이미숙이 주연한 ‘뽕’이 공전의 히트를 쳤고 이후 ‘뽕2’ ‘뽕3’가 이어졌지만 동일한 노선을 반복할 뿐이었기에 ‘96 뽕’ 또한 그리 큰 기대는 없었다. 흥행을 위해 농도 짙은 정사신을 추가해도 흥행성적은 역시나 별 볼 일 없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주인공이 된 신인배우 예지원의 당찬 노력은 물거품이 된 듯했고 오직 에로적 이미지만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영화 ‘96 뽕’에 대해 “빛나는 걸작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배우로 있게 한 의미 있는 작품”이라 했다.

이어 그녀는 ‘MBC 마당놀이 황진이’(1996)에 주연으로 발탁되었다. 노래와 춤, 연기의 삼박자를 갖추어야 하고 영화나 연극과는 또 다른 마당이란 무대에서 관객들과 살아있는 호흡을 나눠야 한다는 점에서 신인에게는 떨리는 무대였지만 그녀는 잘해냈다.

그녀가 보여준 당참은 ‘오디션 女’라고 불릴 만큼 수없이 응모했던 오디션에서 길러진 배짱 때문인 듯했다. 영화 ‘96 뽕’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1억원 상금의 신인배우 공모전이었다. 그녀는 1256 대 1의 경쟁을 뚫고 주인공이 되었다. ‘마당놀이 황진이’에선 524 대 1의 경쟁을 뚫었고, 무희 가네코였던 영화 ‘아나키스트’(1999)에선 100 대 1의 경쟁을 뚫었다고 한다. 치열했던 경쟁률만큼 배우에 대한 그녀의 열정도 뜨거웠다.

작품 속 그녀는 섹시하거나 4차원적이거나 때로는 순수하다. 다소는 불안한 목소리와 잘해내야겠다는 다짐이 감춰지지 않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안하게도 하지만 그런 배우 예지원을 관통하는 것은 솔직함이다.

반전의 매력 뿜어내는 배우

그녀의 솔직함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영화 ‘생활의 발견’(2002)에서 그녀는 춘천에 살고 있는 무용가 명숙이었다. 무반주 무용이 어색할 만도 한데 그녀는 전혀 그런 기색 없이 춤을 추었다. 그녀의 춤사위는 애절했다. 소주잔 앞에 놓고 부르는 샹송은 센강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듯 매혹적이었다. 상대배우인 김상경과의 격한 정사신도 그저 에로틱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그 순간의 절실함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이후 영화 ‘하하하’(2010)와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3)에서는 유부남을 사랑하는 연주로, ‘우리 선희’(2013)에서는 술집 아리랑의 주인 주현으로 변신하면서 홍상수 감독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적확하게 연기했다.

그녀의 TV 입문작은 ‘꼭지’(2000)였다. 봄날 벚꽃처럼 스물두 살의 아리따움이 한껏 피어났지만 지능 수준은 8살 어린아이인 정희가 된 그녀는 탐욕과 거짓, 계산과 위선에 물들지 않은 맑고 천진하고 순수한 존재 그 자체였다. 말끔하게 빗어넘긴 머리에 반짝이는 까만 두 눈을 깜빡거릴 땐 영락없는 천사였다. 그녀의 얼굴 어디에서도 안협댁이나 황진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후 그녀는 자신 안에 숨겨진 다른 모습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1970~1980년대 여고생들의 이야기를 그린 시트콤 ‘여고시절’(2001)에서는 유쾌한 불량 여고생 지원이었다. 치마 걷어붙이고 침 찍찍 뱉으며 말괄량이 기질을 한껏 뿜어낸 그녀는 시청률 상승의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녀를 대중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당연히 ‘올드미스 다이어리’(2004)이다. 늘 눈치 없고 소심하고 때로는 왈가닥스러운 별 볼 일 없는 성우 최미자는 서른이 넘도록 가슴 콩닥거리는 사랑을 꿈꾸지만 현실은 정반대. 노처녀라 찬밥 취급하는 세상이 야속하다. 그래도 썸 탈 수 있는 사람이 있어 좋았는데 그것도 뜨뜻미지근하자 그녀는 “단둘이 술 마시고 만나주고 그랬으면 사랑하지 않아도 그냥 사랑해줘야지. 그게 예의야”라며 썸남 앞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얼마나 속이 탔으면 확성기까지 들고 그 말을 하는지,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명장면이었다. ‘올드미스 다이어리’는 동명의 영화까지 제작될 정도로 성공했다. 영화의 주인공도 당연히 예지원. 그녀는 미자가 통장에 돈이 쌓여가는 것을 보고 좋아했던 장면에서 무언가 차근차근 이뤄가고 인정받아가는 자신을 보는 것 같아 코끝이 찡했다고 한다. 미자가 지원이고, 지원이 미자였던 작품이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녀의 성격처럼 웃긴가 싶으면 진지해지고, 평범한가 싶으면 특이해지던 그녀는 ‘프로듀사’(2015)에서 또 한 번 반전의 매력을 뿜어냈다. 방송사 행정국 직원으로 예능국 살림을 책임지는 무소불위의 권위자 고양미는 피디부터 작가, 심지어 국장까지 제압하는 마력을 갖고 있었다. 영수증 하나하나를 깐깐히 검사하고 복사용지 사용을 칼같이 단속하는 그녀이지만 사랑 앞에서는 마냥 ‘수줍은 여자’가 되는 예측할 수 없는 변신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내는 그녀는 배우일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태어났음에 분명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그녀는 남달랐다. 얌전하게 ‘홍콩 아가씨’를 부르다가 머리 풀어헤치고 무대를 활보하며 ‘배반의 장미’를 불러대던 모습은 반전 그 자체였다. 그 반전에 힘을 더한 것은 예지원의 진지함과 열정이었다. 웃자고 하는데 다큐로 답을 하니 시청자는 그 이율배반에 뒤집어질 수밖에. 정글 속 뜨거운 생존기 ‘정글의 법칙’(2014)은 남자도 쉽지 않은 도전인데 그녀는 할 수 있다는 긍정의 마음 하나로 거침없이 진격했다. 독서 프로그램 ‘비밀 독서단’(2015)에서도 행간에 숨어 있는 의미를 찾아가는 탐험가처럼 그녀는 매회 진지하게 책을 읽고 토론했다. 그녀에게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법이었다.

가상 연애 프로그램 ‘로맨스의 일주일’(2015)에서 프랑스 영화감독 매튜와 일주일 동안 연인이 되었던 그녀. 프랑스어는 느렸지만 능숙했고, 느린 만큼 상대방은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데뷔 이전부터 지금까지 프랑스를 동경했던 배우 예지원, 그녀가 프랑스 영화의 주인공이 될 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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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희정 드라마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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