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와이프’의 전도연 ⓒphoto 뉴시스
‘굿와이프’의 전도연 ⓒphoto 뉴시스

영화 ‘무뢰한’(2015)에 이어 ‘굿와이프’(tvN)에서도 김혜경이다. 여자 이름으로는 평범하고 흔할 수 있는 이름이지만 그녀는 범상치 않았고, 함부로 넘볼 수 없었다. 그녀는 배우 전도연. 텔레비전 화면은 그녀를 담아내기에 좁았다.

‘굿와이프’는 전업주부가 15년 만에 변호사가 되어 일을 통해 자아를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칸의 여왕인 그녀뿐만 아니라 상대역인 유지태 또한 텔레비전에선 쉽게 만날 수 없는 인물이기에 처음부터 화제가 된 드라마다. 원작은 미국 CBS의 인기 드라마 ‘더 굿 와이프(the good wife)’. 2009년 9월에 시즌1이 시작되어 지난 5월 시즌7로 종영되었고, 시즌1 때는 전미 시청률 1위라는 놀라운 기록을 갖고 있다. 더구나 국내 첫 미드 리메이크 드라마이기에 원작의 틀 안에서 한국적 정서를 어떻게 담아낼지 제작진의 부담이 컸다고 한다.

“‘굿와이프’는 나에게 새로운 도전입니다.” 그녀에게 쏟아지는 세상의 관심은 대단했다. ‘굿와이프’ 제작발표회인지, 배우 전도연의 드라마 복귀 기자회견인지 모를 만큼 제작발표회장의 시선은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말은 느렸지만 하고 싶은 말을 남기지 않았다. 습관처럼 모든 답변에 “○○○인 것 같아요”라며 소극적 표현으로 일관했지만, 그 뒤엔 누구 앞에서도 기죽지 않는 당당함이 있었다.

승승장구하던 검사 남편의 불륜 현장이 전국에 방송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아내. 스캔들과 부정부패 의혹을 받고 있는 남편에 대한 배신감과 아들과 딸을 지켜야 한다는 본능적 모성이 꿈틀거렸다. 나는 누구인가, 지금껏 어딜 향해 살아왔나,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스스로의 삶을 점검해야만 하는 어느 시점에 이른 혜경은 깊숙이 넣어두었던 변호사 자격증을 꺼냈다.

사법고시 합격과 연수원 과정은 이미 오래전에 마쳤지만 변호사로 법정에 서 본 적은 없다. 연수원에 강의 나온 남편과 사랑에 빠졌고, 그와의 결혼으로 충분했다. 전업주부가 천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삶은 예측하지 못한 ‘선물’을 그녀에게 주었고, 그녀는 나이 많은 신입 변호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연수원 동기의 배려가 없었다면 대형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함께 일하는 젊은 변호사들은 패기가 넘쳤고, 경력 쌓인 변호사들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패기는 어설플지언정 참과 거짓을 외면하지 않는 용기이고, 이치를 안다는 것은 눈감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구별해내는 세속적 지혜였다. 그러나 사회 초년생인 그녀는 어설프지 않은 용기와 타협하지 않는 지혜를 갖고 있었다. 진실을 알면 다음이 있지만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보는 시선 자체가 달랐다. 남편이 관여된 사건은 새내기 변호사인 그녀를 끊임없이 흔들었고 때로는 장애물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말아야 하고 뛰어넘어야 하는 혜경을 전도연은 보여줘야 했다.

‘접속’으로 진정한 배우가 되다

그녀의 목소리는 항상 약하게 떨린다. 20대에는 그 목소리가 콧소리와 섞여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경쾌한 짜릿함으로 뭇남성들의 마음을 흔들어놓기도 했다. 그때와 비교하면 목소리 톤은 한결 낮아졌고 호흡은 길어졌다. 단조 같은 느낌으로 툭툭 내뱉는 말은 건조하지만 혜경의 복잡한 심정을 정확하게 드러냈다.

움직임은 느렸다. 부와 힘을 누리는 상류층 여자의 움직임이 빠를 필요는 없었다. 차기 검찰총장감이라 불리는 남편은 승승장구, 아이들은 말썽 없이 똑똑하고 건강했다. 남편의 사건으로 살던 곳에서 이사해야 했고, 남편 대신 가장이 되어야 했고, 무너질지도 모를 자신을 지켜야 했기에 그녀는 세상으로 나갔다. 처음으로 직접 맞서야 하는 세상은 낯설었다. 사자 무리 한복판에 서게 된 사슴처럼 동공은 커졌고, 출구를 찾으려는 듯 눈빛은 흔들렸다.

그러나 겁먹지 않고 지금을 직시하면서 시선을 높고 멀리 두었다. 그렇게 그녀는 혜경이 되어갔다. 마른 몸매이기도 하고 유난히 얇은 피부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는 불필요한 어떤 것도 갖고 있지 않아 보였다. 배우 전도연은 오로지 김혜경이었다.

베이비로션 CF 모델로 데뷔했던 때가 1990년, 그녀는 고등학생이었다. ‘깨끗해요’라는 광고 문구처럼 그녀는 투명했다. 드라마 데뷔는 ‘우리들의 천국’(1993). 대학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고 기뻐하는 그녀의 등장은 평범했다. 익숙한 듯 낯선 얼굴은 신선했지만, 연기는 다듬어야 할 것이 많았다. 발랄하고 사랑스러웠을 뿐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후 쉬지 않고 드라마에 출연했다. 주연도 했고, 조연도 했다. 오락 프로그램에도 자주 얼굴을 내밀었고, 방송 진행자로도 활동했다. 대중의 눈에서 벗어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렇다 할 주목도 받지 못했던 시절이다.

그런데 영화 ‘접속’(1997)에서 그녀는 달라져 있었다. 친구의 애인을 짝사랑하는 수현의 심리 변화를 차분히, 욕심내지 않고 그려냈다. 그녀는 여러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연기를 하고 이 자리에 있게 해준 첫 영화가 ‘접속’이다. ‘접속’이 없었으면 계속 영화를 찍고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만큼 ‘접속’은 배우 전도연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다.

발견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시골 학교 선생님을 향한 열일곱 살 초등학생의 짝사랑을 그린 ‘내 마음의 풍금’에서는 더 없는 순수함의 결정체였지만, 농도 짙은 정사신과 파국적 결말로 치정극의 한 장을 장식한 ‘해피엔드’에서는 끓어오르는 욕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여인이었다. 1999년 봄과 겨울에 연이어 개봉한 이 두 영화에서 대중은 전혀 다른 얼굴의 배우 전도연을 보았다. 그때 어렴풋이 알았다. 그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배우가 될 것을.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연기의 맛을 알게 된 그녀는 거침없었다. 싸워야 할 때는 과감히 몸을 던져 화끈하게 싸워냈고, 달려야 할 때는 곧 심장이 터진다 해도 멈추지 않을 기세로 달렸다. 사랑을 할 때는 누구보다 뜨거워서 보는 것만으로도 달아오른 몸은 식을 줄 몰랐고, 흔들린 마음의 가닥은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영화 ‘밀양’으로 제60회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칸의 여왕’이 되었다.

사람들은 여왕이 된 그녀를 어려워했다. ‘굿와이프’의 이정효 감독은 김혜경 역에 전도연이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쉽게 출연을 결정할 것이라 생각하진 못했다고 한다. 당연히 거절당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흔쾌히 출연을 결정해서 오히려 전도연이 왜 그랬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그녀는 “그동안 너무 감정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들을 선택했기에 이번에는 상황을 따라가는 작품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결혼의 신뢰가 깨져버린 사이에서 좋은 아내가 된다는 것이 정말 좋은 결정인지, 부부간의 사랑은 회복할 수 있는지, 결혼과 사랑의 모호한 관계를 되짚어봐야 하는 2016년의 혜경도 만만치는 않아 보인다.

배우는 남에서 시작해서 나로 끝나는 직업이라고 한다. 남을 나로 만들기 위해 심연의 울음을 토해내고, 천상의 웃음으로 날아오른다. 끝없이 다른 나를 향해 가는 그녀의 도전은 여왕의 자리를 쉬이 내주지 않을 듯하다.

키워드

#방송
공희정 드라마평론가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