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7일 서울 목동 SBS 방송센터에서 열린 ‘끝에서 두 번째 사랑’ 제작발표회에서 배우 김희애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7월 27일 서울 목동 SBS 방송센터에서 열린 ‘끝에서 두 번째 사랑’ 제작발표회에서 배우 김희애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이번엔 로맨틱코미디다. 어떻게 저런 코믹성을 숨기고 살아왔을까 싶을 만큼 배우 김희애의 변신은 유쾌하다. 마흔여섯 골드미스의 좌충우돌 로맨스를 그린 ‘끝에서 두 번째 사랑’(SBS). 그녀는 지금 중년의 로코퀸(로맨틱코미디의 여왕)에 도전 중이다.

그녀가 얼마나 사랑스러워질지, 그녀의 로맨스는 어떤 설렘으로 다가올지 궁금했는데 의외로 제일 먼저 시선이 머문 것은 그녀의 짙어진 쌍꺼풀이었다. 얼굴 성형에 중독되어 표정 연기가 되지 않는 일부 여배우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워낙 우아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그녀이기에 짙어진 눈매가 낯설어 보였다. 땀에 흐려지고 물을 뒤집어써 지워진 화장 사이로 드러난 얼룩진 민낯 위에서 그 선은 더욱 짙어졌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에선 더 선명해졌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보다 더 현실적일 수 있나 싶다. 굳이 그렇게 민낯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을 것인데 화장으로 깔끔하게 가리지 않은 그녀의 용기, 또는 설정이 김희애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로맨틱코미디의 여주인공은 엉뚱 발랄하고 코믹한 성격에 귀여운 듯 애교스럽고 괴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아야 한다. 내숭보다는 솔직함이 빛나야 하는데 세상을 이미 많이 알아버린 중년의 사랑이 그런 로맨스를 좇다간 주책 맞아 보이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희애는 과감히 자신을 던졌다.

‘끝에서 두 번째 사랑’ 제작발표회 때 그녀는 “변화와 도전이 두려워지는 중년이지만 그들에게도 사랑은 여전히 가슴 뛰고 설레는 일임을 유쾌하게 그려낼 것”이라 했다. 여기서의 핵심은 ‘유쾌하게’이고, 필요한 것은 ‘두려움 없는 연기’였다. 늘어진 운동복 입고 팝송 ‘I’ll survive’에 맞춰 막춤을 추거나 분수대에 들어가 살짝 정신줄 놓은 여자처럼 빙빙 돌기도 하고, 번지점프를 하다 줄이 끊어져 괴성 지르며 추락하거나, 술에 취해 흐트러진 옷차림으로 팔자걸음을 걷기도 한다. 유쾌했고 거침없지만 아직은 쑥스러움이 가시지 않은 듯한 그녀는 이 시대 중년들의 작아져가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어른이 되면 지혜롭고 평온해질 줄 알았는데 끝없이 시험에 들게 하는 세상 앞에서 “내가 생각한 어른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라는 그녀의 독백은 짠하기까지 했다.

데뷔 후 첫 액션 연기라 화제를 모았던 ‘미세스 캅’(SBS) 출연이 결정되었던 때만 해도 워낙 완벽함을 추구하는 빈틈 없는 배우였기에 잘해낼 것이라 기대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걱정을 지울 수 없었다. 무늬만 형사가 아닌 제대로 된 형사 역을 소화해내려면 몸싸움도 해야 하고, 범인을 추격하기 위해 장소 불문하고 달려야 했다. 때로는 담도 뛰어넘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야 하고 심지어 총도 쏴야 했다. 득과 실을 저울질하기 쉽지 않은 작품 선택에 대해 그녀는 “40대 여배우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남편을 빼앗기거나 헌신적인 엄마가 되는 것”이기에 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했다. 익숙하지 않은 배역이었지만 그녀는 형사 최영진의 마음을 읽어갔다. 김희애표 형사는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대부분의 여자 형사들이 거칠고 날카롭기보다는 소박하고 털털하게 자신의 일을 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형사 옷을 벗고 한동안 소식이 없어 궁금해질 즈음, 그녀는 ‘무한도전’(MBC) 웨딩싱어즈 편에 출연했다. 노래하고 춤추며 시청자들을 쥐었다 놓았다 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데뷔 초기엔 연기뿐만 아니라 쇼 프로그램 MC도 하고 오락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나를 잊지 말아요’라는 노래로 가요 프로그램 정상 자리에도 올랐던 가수였지만 결혼 이후엔 좀처럼 예능 프로그램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긴 생머리에 분홍 선글라스를 쓰고 등장했다. 기억에 남는 결혼식을 위해 연예인들이 축가를 불러주는 이벤트였다. MC 유재석과 한 팀이 되어 결혼식장에 등장한 그녀는 밝고 경쾌하게 노래를 부르는가 싶더니 어느새 “대박 나서 아파트 한 채 빨리 마련하세요”라는 덕담과 함께 결혼식장을 무도회장으로 바꿔놓았다. 빠른 템포로 울려 퍼진 ‘아파트’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추임새를 넣으며 결혼식장을 누비는 그녀는 어딜 봐도 우리가 알던 배우 김희애가 아니었다. 무대가 갖춰진 곳이 아닌 일반 결혼식장에서 그녀는 신랑 신부 부모님들까지 춤추게 만들었다. ‘흥애(興愛) 누나’라는 새로운 별칭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궁지에 몰렸을 때 도약하는 힘 생겨”

도도함을 벗고 친근함으로 편안해져서인지 얼마 뒤 ‘런닝맨’(SBS)에 출연할 때는 오히려 예능 프로그램 속 그녀가 익숙해 보였다. 방송 내내 뛰고 달리고,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격한 몸싸움도 잘 해냈다. 가끔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들어했고, 때로는 김희애다운 특급 앙탈로 상황에 대처해나가기도 한 그녀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던 또 하나의 유리벽을 시원하게 깼다. 그리고 그 다음 행보가 ‘끝에서 두 번째 사랑’이었다.

배우 김희애를 생각하면 빈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이는 완벽한, 자기 주장이 명확해서 가끔은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똑 부러진 이미지가 떠오른다. 1983년 데뷔한 후 갓 스무 살이 되던 1986년, 일일연속극 ‘여심’(KBS)의 주인공 송다영이 되었다. 식민지배와 전쟁, 빈곤과 생존이라는 격동의 시대를 건너야 했던 한 여인의 10대부터 60대까지의 인생 이야기를 단단하게 그려낸 그녀는 신인답지 않게 당찼다.

이후 그녀가 일관되게 보여주었던 것은 누구누구의 딸이나 아내, 엄마가 아니라 인간으로 어떻게 자신의 삶을 만들어갈 것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을 갖고 있는 존재 그 자체였다. “무엇이든 결핍되고 궁지로 몰렸을 때 다시 성장하고 도약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게 아닐까 싶어요”라며 결혼 후 몇 년의 공백기를 지나 다시 텔레비전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김희애는 자신의 부족함 앞에 포기하지 않고 원하는 만큼의 성장을 이뤄내기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물을 연기했다.

아들과 차별받는 쌍둥이 딸이기도 했고, 장애인 아들을 키워야 하는 가슴 아픈 엄마이기도 했다. 연하의 재벌가 아들과 결혼했지만 불치병으로 그를 떠나보내야 했던 애절한 사랑의 주인공이기도 했고, 팜므파탈의 전형이 되어 친구의 남편과 위험한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그 모든 역을 관통하는 것은 당당한 자기애였다. 그 정점은 ‘밀회’(jtbc)였다. 19살이나 어린 배우 유아인과의 파격 멜로라는 면에서 대중의 호기심은 컸지만, “오직 저 자신한테만 집중하려고 합니다”라고 시작된 마지막 대사처럼 그녀는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해 겉만 화려했던 헛된 모든 것을 남김 없이 버린 주인공 오혜원을 우아한 감동으로 격렬하게 그려냈다.

김희애는 쉬이 변하지 않는 것과 끝없이 변하는 것을 동시에 갖고 있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어린이들의 치료비를 모으기 위한 기부 프로그램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MBC)을 23년째 진행하고 있다. “놓치지 않을 거예요”라며 변하지 않는 맑고 투명한 피부를 보여준 화장품 광고도 10년 넘게 그녀와 함께하고 있다. 하지만 “연기는 내 직업이자 생활 수단”이고 평생 배우로 살아갈 것이라는 그녀에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식상함 또는 정체됨과 같은 의미이기도 하다. 김희애가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되는 순간 현실은 뛰어넘을 것을 요구한다. 자기를 깨고 변해야 하는 것은 그녀의 운명이기에 그녀는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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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희정 드라마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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