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티드’의 최준구를 연기하는 이문식.
‘원티드’의 최준구를 연기하는 이문식.

그가 범인임을 알아채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어디로 보나 그는 치밀하고 거대한 계획을 용의주도하게 이끌어갈 인물은 아니었다. 그런 그가 아동학대, 가정폭력, 불법 임상실험, 가습기살균제 피해 등 사회 부조리를 조목조목 폭로하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단죄해 나갔다. 리얼리티 스릴러라는 독특한 장르 드라마 ‘원티드’(SBS)에서 PD 출신 방송사 국장 최준구로 나온 배우 이문식. 생각보다 주도면밀했다.

‘장르 드라마’는 의학, 범죄 수사, 정치, 사회 부조리 등 특정 주제에 집중한다. 사건의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얽힌 실마리를 찾아가는 과정은 예상치 못한 복선이 반전을 거듭한다. 반전은 시청자와의 두뇌 싸움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극의 구성은 치밀해야 하고, 배우들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계산된 만큼만 연기해야 한다. 자칫 무리수를 두다간 눈치 빠른 시청자들에게 꼬리를 잡힐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배우 이문식의 연기는 탁월했다.

‘원티드’는 국내 최고 여배우 정혜인의 아들이 유괴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범인은 열흘 동안 열 개의 미션을 완수해야만 아들을 살려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 과정은 생방송되어야 하고 진행은 정혜인, 매회 시청률은 20%를 넘어야 한다고 했다. 죄를 저지른 사람을 찾아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게 만드는 구조의 미션은 방송을 점점 더 자극적으로 이끌었다.

미션이 거듭될수록 대중들은 아이를 찾는 것보다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방송 총괄책임자인 최 국장은 방송을 중단해야 한다고, 이것은 방송의 역할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게 화를 낼 때만 해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동안 주연보다 조연에 익숙했던 배우였기에 평범해 보이는 인물 설정에 그러려니 했다. 동공이 흔들리거나 뜬금없는 행동으로 상황을 바꾸거나 떨리는 목소리로 문맥에 맞지 않는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기에 그는 범인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역시 이문식의 비중이 저 정도는 아닐 거라는, 혹시나 하는 짐작이 맞았다. 그는 아이를 유괴하고, 살인을 사주하고, 심지어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 죄에 대한 징벌을 단행하는 악인이었다. 7년 전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가 가습기살균제 때문에 죽었고, 그 죽음의 진실에 다가설수록 세상은 그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진실은 두꺼운 막으로 가려졌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그의 마지막 결심은 감춰진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 하지만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대중은 무관심했고 악의 실체는 쉽사리 무릎 꿇지 않았다. “뭘 해도 안 되는 것이었는데, 그 놈들 다 죽이고 사람들한테 소리쳐도 안 되는 것이었는데”라는 그의 최후 독백은 어떻게든 죄지은 자의 끝을 보고 싶었던 보통 사람의 간절한 외침이었다.

언제나 낮은 곳에 있는 배우

명품 조연이라 불리는 이문식. 그는 이렇게 조연 예찬론을 펼친다. “주연은 시나리오에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모두 나와 있지만, 조연은 그런 부분이 부족하다. 자신이 맛깔나게 살릴 수 있는 것도 많고 상상할 여지도 많기 때문에 연기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가 명품 조연의 반열에 오른 것은 2003년, 데뷔한 지 10년쯤 되었을 때이다. ‘거시기’라는 유행어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영화 ‘황산벌’에서 백제 계백 장군의 군사인 ‘거시기’였다. 꼬질꼬질하고 못생겼고 몸집은 작았다. 겁이 많아 싸움 앞에선 오금부터 저렸다. 고향에 두고 온 홀어머니 생각에 맨날 눈물 바람이지만 걸쭉한 입담 재주가 있어 신라군을 교란시키는 ‘욕 전사’로 뽑히기도 했다. 그가 뿜어내는 사투리는 오래 묵은 된장처럼 구수했고, 살얼음 잡힌 동치미처럼 시원했다.

퓨전 사극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다모’(MBC)에선 나루터 왈패로 살아가는 도망 노비 마축지였다. 다모 채옥의 든든한 심복이기도 했던 그는 하루 밥 세끼 먹으며 아이들 낳고 마누라와 알콩달콩 사는 것이 꿈이었다. 고달픈 천민의 삶이었지만 의리 하나는 분명했던 그는 좌포청을 도와준 대가로 양민이 되었다. 그것이 고마워 위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그 와중에 마누라가 죽임을 당했다. “참말로 멋있다고 한마디만 해보소”라며 대답 없는 마누라를 향해 눈물 흘리던 모습은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다모’의 명대사보다 더 진한 감동이었다.

‘황산벌’에서도 ‘다모’에서도 그는 뛰고 또 뛰었고, 맞고 또 맞았고, 울고 또 울었다. 그러면서 배우로서의 전환점을 넘었지만 그는 언제나 낮은 곳에 있었다. 양아치, 사기꾼, 인신매매범, 취객, 불량배, 택시강도, 말단 공무원, 스님 등. 삶은 팍팍했고, 세상이 자신만 돌봐주지 않는 것 같은 억울함에 욕도 해보고, 투정도 부려보았다. 때로는 사기도 치며 얍삽하게 살아보려고도 했지만, 계획은 언제나 한발 앞서 들통났다. 노력과 상관없이 일은 꼬였고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유혹 앞에선 쉽게 무장해제됐고, 후회와 반성은 항상 늦었다. 정말 뭘 해도 안 되는 그런 사람, 억세게 운 없는 사람이 주로 그의 몫이었다.

그 모든 인물은 하나인 듯 다르고, 여럿인 듯 하나였다. 그는 평소 보여지는 모습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이면의 것을 끄집어낼 때 정말 쾌감을 느끼거든요”라며 배우의 변신을 이야기했다. 변신은 완벽해야 하고, 이미지는 자신과 동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변신이 아니라 이문식답지 않다는 것이다. 그가 왕이 되고 재벌 회장이 된다 해도 이문식다워야 한다. 그런데 이문식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11대 종손으로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었으나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처음부터 배우를 꿈꾸지도 않았다. 이런저런 꿈의 실체를 좇다 보니 연극영화과에 진학했고, 순탄치 않았던 대학생활 끝에 배우가 되었다. 가난한 연극배우였지만 연기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시절을 지나 영화 ‘돈을 갖고 튀어라’의 ‘달수 친구 2’ 역을 시작으로 영화배우가 되었다. 이름도 없고 대사도 거의 없는 역이었지만 묘한 존재감이 있었다.

꽤 오래전 일이다. 그는 ‘일지매’(MBC)에 쇠돌이로 출연하면서 멀쩡한 이를 뽑았다. 배우들이 작품을 위해 삭발을 하거나 수염을 기르는 일, 또는 과도하게 살을 찌우거나 빼는 일은 있었지만 자신의 신체에 영원히 복구될 수 없는 변화를 가하는 경우는 없었다. “쇠돌이를 더욱 쇠돌이답게 연기하기 위해 그가 밥을 먹는 모습, 걸어가는 모습 등을 나름대로 상상하며 캐릭터에 대해 연구를 거듭했다”는 그의 변신은 성공적이었다. 익숙한 모습에 안주하지 않겠다는 배우로서의 자존심이 돋보였다. 사실 ‘일지매’에서의 그는 발치(拔齒)가 아니라 친아들이 아닌 두 아들을 위해 죽음으로 그들을 지켜낸 뜨거운 부성애 연기가 명품이었다. “짠한 놈들, 짠한 내 새끼들…. 내가 이 죄를 갚고 가야 쓸 거인디….”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사극과 현대극, 영화와 TV를 오가며 변신을 거듭하는 그는 8월 22일 시작된 ‘구르미 그린 달빛’(KBS)에서 카메오 연기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내시부 도자소 기능장이 된 그는 특유의 능청스러운 익살로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뭘 해도 되는 배우 이문식, 일등만이 주목받는 치열한 시대를 별것 아닌 것처럼 슬렁슬렁 걸어갈 수 있게 해주는 그의 웃음은 진정 이문식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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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희정 드라마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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