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의 출연진들. 뒷줄 맨 오른쪽이 차인표.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의 출연진들. 뒷줄 맨 오른쪽이 차인표.

오토바이 타고 온 왕자는 손가락 몇 번 흔들었을 뿐인데 20년 넘게 여심(女心)을 사로잡았다. 그렇게 설렐 것도 없었는데 색소폰 연주엔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그는 1993년 MBC 공채 22기 탤런트로, 데뷔 1년 만에 별이 된 배우 차인표다.

뜨거웠던 여름이 있었나 싶을 만큼 하루아침에 가을로 들어선 요즘, 그는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KBS)의 배삼도로 살고 있다. 한때 최고의 재단사였고, 몇 번의 양복점 사업 실패 후 아내와 닭집을 운영하고 있는 역할이다 보니 전통시장에서의 촬영이 많다. 사람들의 북적거림이 활기찬 부천시장에서 그는 검은색 민소매 러닝셔츠에 노란 앞치마를 두르고 닭을 튀긴다. 사람들은 닭집이 새로 문을 열었나 싶은 마음에 기웃거리다 차인표를 발견하곤 놀란다고 한다. 지난 9월 6일 촬영 중 잠시 짬을 낸 그와 전화 인터뷰를 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생기 넘쳤고, 시장의 소음은 정겨웠다.

월계수 양복점의 배삼도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냐는 첫 질문에 그는 거창한 인물론이 아닌 소박한 원론으로 답했다. “작가의 의도에 맞춰 충실하게 연기하는 것이 배우의 몫이죠”. 고아원에서 도망온 배삼도에게 집이 되어주고 청춘의 꿈을 키우는 산실이 되었던 월계수 양복점에서 재단사의 꿈을 다시 키워갈 그는 배우 차인표의 옷을 벗고 있었다.

그의 첫 등장은 유쾌했다. 닭들이 가득 실린 트럭을 운전하는 그는 콧소리 머금은 아내의 전화에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알통 가득한 팔은 화면을 가득 채웠고, 딱 벌어진 어깨와 가슴은 여전히 단단해 보였지만 도회적으로 잘생긴 얼굴의 그를 보면 웃음이 터져나왔다. 모습은 상남자인데 아내가 구워주는 장어 꼬리를 먹겠다고 입을 헤 벌리질 않나, 구멍 난 자신의 팬티를 입겠다는 아내를 보고 미안하다고 끌어안으며 훌쩍훌쩍 울기도 한다. 주거니 받거니 아내 역의 라미란과는 호흡이 척척 맞았다.

아직도 건장한 그의 몸매 또한 화제가 되었다. 보디빌더라 해도 손색없을 만큼 균형 잡힌 근육질 몸매에 대해 그는 말했다.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었어요. 40, 50대가 되었다고 해서 배가 나오고 몸이 둔해지라는 법은 없다.” 이는 작가가 원하는 배삼도의 모습이었다. 역시 원론에 충실한 배우였다.

그를 처음 본 것은 MBC 베스트극장 ‘하얀 여로’였다. 배우가 된 후 첫 주연작이어서 그런지 이 작품을 기억한다는 말에 그는 “와우, 그 작품을 기억하세요?”라며 격한 반가움을 표했다. ‘하얀 여로’는 ‘사랑은 그대 품안에’(MBC)에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후 촬영을 시작한 단막극으로 16부 미니시리즈를 위한 전초전과도 같았다고 한다.

친엄마를 찾기 위해 주한미군이 되어 한국에 온 입양아 패트릭이 된 그는 영어로 연기했다. 유창한 영어와 다소 어설퍼 보이는 연기가 어린 시절 입양되어 한국말과 문화를 잊어버린 패트릭을 연기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엄마를 찾았지만 탈영병에 폭행범인 그는 쫓기는 몸이었다. “난 누구에게 잡혀가야 하죠? 미군 헌병인가요? 한국 경찰인가요?” 단막극이었고, 이름조차 익숙하지 않은 신인이었지만 신인이라는 설익음을 입양아라는 상황으로 절묘하게 넘어선 그의 시작은 성공적이었다.

“배우는 대중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

사실 그가 미국에서 생활했던 기간은 십 년이 안 된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다 미국으로 유학 갔고, 대학 졸업 후 취직도 했다. 그러다 문득 “내 꿈이 무엇이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잊고 있던 꿈을 좇아 한국으로 돌아와 배우가 되었다. 스타가 되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라 할 만큼 신인 성공률이 낮은 연예계에서 그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공채 탤런트로의 출발은 안정적이었고, 출연자 명단에도 표시되지 않을 만큼 미미한 단역 시절은 고작 1년이었다.

‘차인표 신드롬’의 시작이었던 ‘사랑을 그대 품안에’는 1990년대를 대표하는 트렌디 드라마다. 젊은 도시인의 삶과 사랑을 감성적이고 경쾌하게 그려내기 위해 여자는 한없이 착하고 사랑스러우나 녹록지 않은 일상 속에서 고군분투해야 하고, 남자는 무뚝뚝한 재벌 2세이거나 능력자이지만 사랑 앞에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줄 아는 용기가 있어야 했다. 그런 면에서 어딘가 교민 냄새 나는 발성과 옅은 눈웃음, 주저없이 웃옷을 벗어 근육질 몸매를 보여주는 차인표는 새로운 트렌디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으로 딱 맞았다. 캐스팅은 완벽했고, 드라마는 최고 시청률 45.1%를 기록했다. 당시 언론은 그를 일컬어 “혜성처럼 나타난 대형 신인”이라 극찬했다. 짧은 연기 경력과 독특한 이력이 그의 스타성을 더욱 빛나게 했다.

한때 ‘차인표 분노 4종 세트’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홍콩 익스프레스’(SBS)라는 드라마에 출연한 그의 연기를 보고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양치질, 달리기, 푸시업, 댄스까지 수그러들지 않는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순간 집중력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린 연기였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오랫동안 패러디되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화제성 장면이 아니었다. 늘 주인공이었고, 언제나 정의로운 승자였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함의 표현이었고, 변신의 신호탄이었다.

올해로 연기 경력 24년째, 배우 차인표로서 어떤 작품에 가장 애착이 가냐는 질문에 그는 주저없이 영화 ‘크로싱’을 이야기했다. 북한 주민의 탈북 과정을 그린 이 영화에서 그는 가족의 식량과 아픈 아내의 약을 구하기 위해 탈북한 가장이었다. 드라마에서는 시청률 메이커였지만 영화와는 인연이 적었다. “흥행에 대한 부담이 컸기 때문에 쉽게 결정하지 못했지만, 약한 사람들을 돌봐야 한다는 신앙적 믿음이 있었기에 출연을 결심하게 되었다.” 영화를 찍는 동안 “탈북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저한테 먼저 생겼고, 결과적으로는 새로운 마음의 변화가 생겼다”고 한다. 누적 관객수는 90만(영화진흥위원회 집계)을 넘지 못했다. 흥행의 실패보다 이념을 넘어 인간 대 인간으로 사랑을 나눌 수 있음이 널리 전해지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단다.

올해 그는 오십이 되었다. 배우보다는 창작자로의 삶을 살기 위해 작년부터 새롭게 도전한 것이 영화감독이다. 첫 단편영화는 24분짜리 ‘50’이다. 오십 살이 된 남자의 이야기란다. 영화제를 목표로 했고, 아직 개봉 전이다. “굉장히 못 만들었어요”라며 수줍어하면서도 올해도 작품 하나를 또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도전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설레는 행복이 엿보였다. 그는 배우뿐만 아니라 가수, 방송진행자, 다큐멘터리 내레이터, 소설가, 광고모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이에 대한 차인표의 설명이다.

“배우라는 직업은 대중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인기라는 것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인기가 자신의 몫이 되었을 때 이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그 사람의 소명이 반영된다.”

그는 봉사와 기부의 아이콘이다. 보여주기라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배우는 직업이지만 나의 소명은 아이들이 올바로 자라고 도움을 받아 우리 자식 세대가 우리보다 훨씬 선하고 좋은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에게 봉사는 삶의 과정 중 하나다. 밥 먹는 것과 같이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일이 일상이 될 때 인생이 풍요로워질 것을 믿는 그의 다른 이름은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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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희정 드라마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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