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관 오늘은 ‘다가오는 것들’(감독 미아 한센-러브)을 하기로 하지. 오랜만에 프랑스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됐네.

배종옥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영화가 많이 나왔으면 해. 너무 자극적인 영화들만 만드는 것 같아. 우리 한국 사람들은 질문에 대해 정답만 찾으려는 경향이 너무 짙어. 프랑스 영화는 대부분 하나의 답을 제시하지 않거든.

신용관 비슷한 얘기지만, 우리는 은연중에 자꾸 주제를 찾으려는 버릇이 있어. ‘이 영화가 말하려는 바가 뭐지?’ 하면서. 중고교 국어 교육의 폐해가 되겠지. 굳이 뭘 말하고자 했는지 집착하지 말고, 마음을 열어놓고 느긋하게 감상하면 되는데 말이야.

배종옥 ‘다가오는 것들’은 제목에 그 실마리가 담겨 있는 듯해. 다가오는 것들이 아니라 도리어 ‘잃어버린 것들’이 아닐까? 주인공 여성의 삶에서 잃어버린 것들이면서 동시에 다가온 것들이겠지.

신용관 영어 제목은 우리말 번역대로 ‘Things to come’인데, 프랑스어 원제는 ‘L’avenir’야. 원래는 단순히 ‘미래(future)’를 뜻하는데, 영어 제목을 멋지게 붙였어.

배종옥 고교 철학교사인 여주인공 나탈리(이자벨 위페르 분)가 언급하는 여러 철학자들과 그 대표 저서들이 영화의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주요 모티브인 듯해.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도 언급되잖아. 독일 태생의 유대인 철학사상가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하였던. 나탈리 또한 젊은 시절엔 공산주의자였지만, 이제는 본인 말대로 “급진성을 논하기엔 너무 늙은” 중년 여성이니까.

신용관 하지만 영화에서 그려진 캐릭터와 별 상관이 없는 사상가와 저서들이 대부분이야. 대표적인 예가 이혼을 선언한 남편이 “내게 아주 중요한 책인데 안 보인다”며 애태우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대표작인 이 책의 주제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단지 표상(表象·representation)일 뿐이며, 표상의 세계 너머에 의지(意志·will)의 세계가 따로 있다는 거야. 그러나 관객은 남편 하인츠(앙드레 마르콩)에게서 그런 속성을 보지 못하거든.

배종옥 그래도 아도르노, 하버마스, 레비나스 등의 이름들이 잊을 만하면 나오잖아. 나탈리가 어머니 장례식 때 인용하는 것도 ‘팡세’의 한 구절이고.

신용관 별 복선(伏線) 없이 쓴 거 같아. 책 표지로 나온 레비나스(Emmanuel Levinas·1906~1995)만 해도, 기존 서양철학을 ‘자기중심적 존재론’이라 비판하면서 타자(他者)에 대한 책임을 우선시하는 윤리학을 주장한 철학자거든. 영화 내용과 아무 상관도 없어.

배종옥 현대 철학자들을 잘 아나봐.

신용관 내가 소싯적에 철학 공부 좀 했잖아.(웃음) 유일하게 영화와 관련 지을 수 있을 신은 나탈리가 제자 산장에서 책 하나를 들고선 “레이몽 아롱이라, 칫” 하며 비웃는 장면이야.

배종옥 언제 그런 장면이 있었대? 꼼꼼히도 봤네.

신용관 레이몽 아롱(Raymon Aron·1905~ 1983)은 ‘지식인들의 아편’ 같은 책을 통해 좌익 지식인들을 비판하는 등 일생을 반(反)마르크스주의의 위치에 있었던 프랑스 사회학자야. 1980년대 한국의 대학생들도 우습게(?) 본 지식인이지. 하지만 구소련 몰락 이후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예언한 사상가로서 재평가되었지. 나탈리가 그런 아롱에게 코웃음을 친다는 건, 내가 볼 땐 그녀가 여전히 관념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지.

배종옥 하긴 애제자가 “선생님은 책이나 쓰면서 자족하고 있다”고 지적하자 나탈리가 움찔하는 신이 나오지. 일종의 ‘아킬레스건’을 찔렸다고 여긴 장면으로 나는 봤어.

신용관 잔잔한 영화라는 공통점이 있음에도 이 영화는 우리가 다뤘던 영국 영화 ‘45년 후’(감독 앤드루 헤이)와는 확연히 달라. 거기엔 그나마 기승전결이 있고, 엔딩의 반전(反轉)도 인상적이었지. 하지만 ‘다가오는 것들’은 그런 게 없어. 내 눈엔 승(承)도 전(轉)도 없이 ‘기(起)기기기’만 있는 거 같아.

배종옥 아니야. 내겐 나름의 기승전결이 느껴졌어. 무엇보다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잖아. 가령, 남편의 외도 고백을 들은 직후의 장면. 여자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안 하잖아. 관객도 덩달아 생각을 하게 되는 거지. 그러곤 그러잖아. “난 당신이 영원히 날 사랑할 줄 알았어”라고. 할리우드식 영화에 길들여진 관객들에겐 모호하고 밋밋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이런 영화야말로 내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는, 35세 넘은 여성들은 한 번쯤 봐야 할 그런 영화 같아. 음악도 좋고.

신용관 이 영화는 영화라는 장르가 활용할 수 있는 모든 기법을 완벽하게 거부(?)하고 있어. 슬로모션, 클로즈업, 부감(俯瞰·high angle), 아무것도 없어. 카메라는 시종일관 완벽하게 인물들 옆에 서 있는 제3자의 시선을 취하고 있어. 내겐 그것이 감독의 고집, “난 우리의 일상(日常)에 대해, 어떤 일상의 묘사를 통한 한 여성의 일생(一生)에 대해 말하고 싶다”라는 집요함이라고 봐. “어때, 이런 인생도 괜찮지 않아?”라고 묻는 거 같아.

배종옥 맞아. 너무나 일상적인 장면들이어서 오히려 나는 더 집중할 수 있었어. 근데 이자벨 위페르, 너무 늙었더라. 관리 좀 하지 말이야. 충격적이었어.

신용관 1953년생이니, 만 63세. 난 서양 여배우들 주름 자글자글한 게 훨씬 보기 좋던데. 현실감 있고.

배종옥 물론 보톡스로 땡땡한 거보다야 낫지만 그래도…. 나는 위페르보다는 덜 늙어 보였으면 해, 나이 먹어서.(웃음)

신용관 고양이의 이름이 ‘판도라’였다는 점이 일종의 상징이 아니었나 싶어. 그리스 신화에서 판도라는 절대 열지 말라는 항아리를 호기심 때문에 끝내 열고야 말잖아. 금기(禁忌)를 깬 거지. 하지만 나탈리는 고양이 판도라를 제자에게 줘버리고 말지. 마치 심야극장에서 자신을 따라온 남자를 단칼에 거부하듯이.

배종옥 그 에피소드는 좀 이상하더라. 프랑스 애들 가끔 웃기는 데가 있어. 아니, 한밤중에 따라온 스토커한테 키스를 당하고도 왜 내버려두는 건데?

신용관 그러게. 어쨌든, 내 별점은 ★★. 한 줄 정리는 ‘영화 본 뒤 달라진 건 배가 고파졌다는 것’.

배종옥 난 ★★★. ‘한참을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

신용관 조선뉴스프레스 인터넷뉴스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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