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2 ‘구르미 그린 달빛’은 시청률 20%를 넘기며 종영했다.
KBS2 ‘구르미 그린 달빛’은 시청률 20%를 넘기며 종영했다.

효명세자는 역사가 잊은 이름이다. 조선 22대 왕인 정조(1752~1800)의 손자이자 순조(1800~1834)의 아들이었던 그는, 스물둘이라는 짧은 생을 살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실록을 보면 ‘그가 조금만 더 살았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절로 든다. 그가 조선 최고의 꽃미남 왕세자여서만은 아니다. 실제로 헌종은 조선시대 손에 꼽히는 미남 군주였는데, 그의 아버지인 효명세자는 더한 미남이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효명세자(1809~1830)를 주인공으로 한 로맨스 사극이 ‘구르미 그린 달빛’이다. 원작자인 작가 윤이수씨는 “역사에 가정이라는 건 무의미하지만, 효명세자의 이른 죽음은 나라 전체를 두고 봤을 때 안타까운 장면”이라고 했다. 정조 이후 왕위에 오른 순조, 헌종, 철종, 고종은 조선의 역대군주 중 최약체였다. 이들이 다스린 107년간 나라 밖으로는 아편전쟁으로 청나라가 문호를 개방했고,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일으켰다.

나라 안에서는 외척을 등에 업은 세도정치가 민생을 파탄에 이르게 했다. 속절없이 쇠망해가는 조선에 한 줄기 빛으로 등장했다가 아스라이 사라진 게 효명세자다. 순조실록은 그를 ‘잠자고 식사할 겨를도 없이 대리청정의 직분을 수행했고, 전국 각지에서 보고되는 문서와 상소문을 일일이 확인했다’고 기록한다. 실제로 그가 실질적인 군주 역할을 했던 3년 동안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어느 정도 견제를 받는다.

SBS 월화드라마 ‘달의 연인’은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SBS 월화드라마 ‘달의 연인’은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역사 속에서 호출된 인물들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과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가 방영되는 월요일, 화요일 밤이면 포털 검색어에 이들의 이름이 올랐다. ‘효명세자’ ‘홍경래’ ‘광종’…, 이미 수백 년 전 세상을 떠난 이들이 야심한 밤에 호출되는 건, 역사가 이 드라마의 스포일러이기 때문이다. 박보검(효명세자)과 김유정의 사랑이 이루어질지, 이준기(광종)의 순애보를 아이유가 받아줄지 역사를 보면 대략의 짐작이 가능하다.

실제로 방송이 끝난 뒤 SNS에는 ‘구르미 그린 달빛’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봤다는 내용이 다수 올라온다. 원래는 ‘역사 무식자’였는데, 드라마를 보며 순조시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고 ‘홍경래의 난’에도 관심이 생겼다는 것이다. 순조 시대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은 당시 지배층의 전횡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드라마에서 여자 주인공 김유정은 이 홍경래의 숨겨둔 딸로 등장한다. 역사에 허구와 상상력을 빚어 만든 드라마이지만 효명세자(박보검)와 홍라온(김유정)의 사랑이 왜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이 경향은 출판계에서도 두드러진다. 교보문고가 올해 1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 한국사 분야의 판매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판매량이 20만권을 넘어서며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 특히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은 7주 연속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한국사를 바탕으로 한 웹소설이나 웹툰도 꾸준한 인기다. 실록을 바탕으로 한 ‘조선왕조실톡’은 현재 가장 화제성 높은 웹툰 중 하나로, 작가인 무적핑크는 그 인기에 힘입어 MBC ‘무한도전’ 웹툰작가 특집에 출연하기도 했다.

드라마에서 시작된 궁금증은 역사에 대한 고증으로 이어진다. 사실(fact)과 허구(fiction)가 교차되는 팩션 사극임을 감안하더라도,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작가의 상상력인지를 알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구르미 그린 달빛’의 세자인 박보검은 “왜 남색 곤룡포를 입는가”란 궁금증은 ‘뿌리 깊은 나무’(SBS)에서 태종의 세자였던 송중기는 붉은색 곤룡포를 입었고, ‘화정(MBC)’의 광해군 차승원은 흑색 곤룡포를 입었다는 기억으로 이어진다. 본래 왕과 세자는 같은 붉은 곤룡포를 입었다. 다만 흉배에 그려진 용의 발톱의 수로 차이를 두었다. 그러나 선조(1567~1608) 시기, 아들 광해군을 마뜩잖게 여긴 선조는 ‘세자는 검은색 옷을 공식석상에서 입을 수 있다’는 기록을 찾아내 세자의 곤룡포를 바꾸었다. 조선 후기의 세자인 박보검의 곤룡포가 네이비톤인 이유다. 집단지성을 통해 알아낸 깨알 같은 지식이다.

베스트셀러 7주 연속 1위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
베스트셀러 7주 연속 1위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

집단지성의 발현

사극이 인기를 끌면 교양 프로그램의 시청률도 덩달아 올라간다. ‘역사저널 그날’은 ‘역사스페셜’의 연장선인 역사 토크쇼다. 소통이 일방적인 다큐 형식이 아니라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자유로운 대화 형식으로 기획된 이 프로그램은 한때 시청률 10%를 기록하며 KBS1에서 제작하는 교양 프로그램 중 인기 프로그램으로 떠올랐다. 특히 효명세자를 다루었던 83회에서는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조연으로 머무른 세자의 아내 ‘신정왕후’에 주목했다. 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에도 60년의 수절 끝에, 결국 세도정치의 핵심이던 비변사를 해체시킨 공로다.

이들은 국사 교과서에서 한 줄 안팎으로 다루거나 거의 언급되지 않던 인물들이다. 드라마는 이들에게 혼과 생기를 불어넣어 잊힌 인물을 현재로 소환한다. 윤이수 작가는 “역사 속 인물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그 선택에는 분명한 동기가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동기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드라마 ‘달의 연인’에서 배우 이준기가 연기하는 고려의 광종은, 폭군으로 알려진 왕이다. 실제로 재위 중반부터 공신과 왕실에 대한 ‘피의 숙청’을 단행해 이후 유학자들은 그를 ‘광기의 왕’ ‘피의 군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그의 형인 2대 황제 혜종과 3대 황제 정종이 건드리지 못한 호족 세력들과 맞섰다. 개국공신을 정리하는 것은 황제로서도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실제 고려의 기틀을 세운 것은 광종이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고려 949년부터 975년까지 약 26년 동안 재위하며 노비안검법, 과거제도, 관복 제정 등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드라마는 그가 이렇게 개혁군주가 될 수 있었던 비밀의 괄호에 사랑을 적어 넣는다. 몰락한 귀족 가문의 딸, 궁중의 무수리가 된 해수(아이유)에 대한 사랑이 그로 하여금 노비의 해방을 꿈꾸게 한 것이 아니었겠느냐는 짐작이다.

물론 해석의 여지는 다양하다. 중요한 것은, 물음표로 남은 역사의 여백에 흥미를 가지고 상상력을 발휘하거나 실록을 뒤져 보는 시도다. ‘역사 예능’을 표방하는 tvN의 ‘시간탐험대’조차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신채호의 격언을 구호로 삼는다. 톺아볼 역사가 반만년이 있는 민족이라는 것만으로도, 한국은 풍성한 데이터베이스를 가진 나라다. 실제로 드라마를 보다 보면 마치 현재를 보는 듯한 기시감이 드는 장면이 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팩션 사극으로 일어난 역사에 대한 관심과 활기가 반가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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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슬기 조선pub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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