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관 오늘은 특별한 방식으로 대담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초대 손님을 모신 것인데요. 영화에 대해 큰 애정을 가진 분을 가끔 모셔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 합니다. 첫 손님으로 출판사 ‘마음산책’ 정은숙 대표님과 함께합니다.

배종옥 정 대표님, 반가워요.

정은숙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용관 마음산책은 ‘박찬욱의 오마주’ ‘마더 이야기’ ‘클린트 이스트우드’ 등 명감독 열전 시리즈를 낸 중견 출판사입니다. 정 대표는 1주일에 2편, 1년에 100여편의 신작 영화를, 그것도 꼭 개봉관을 찾아 관람하는 영화 매니아지요. 오늘 대담 아주 기대가 큽니다.

정은숙 아무 부담 없이 오면 된다고 하더니.(웃음) ‘똘똘한’ 발언을 해야 할 텐데….

배종옥 본인의 감상(感想)에 충실하면 됩니다. 오늘은 배우 윤여정씨의 화제작 ‘죽여주는 여자’(감독 이재용)를 하기로 했지요. 제목을 잘 지었다는 얘기부터 하지요. 탑골공원 노인들을 상대로 ‘죽여주는’ 테크닉을 지닌 여성이면서, 죽을 수 있게 도와달라는 호소에 실제 ‘죽여주는’ 여자이지요.

신용관 영어 제목이 ‘The Bacchus Lady’로 이 또한 잘 붙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야 이른바 ‘박카스 아줌마’로 받아들일 것이고, 외국 관객들은 로마 신화에 나오는 술의 신, 즉 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에 해당하는 ‘바쿠스’를 떠올리겠지요.

배종옥 한마디로 배우 윤여정의 연기력이 돋보이는 영화라고 봐요. 외국의 한 매체가 ‘윤여정의, 윤여정에 의한, 윤여정을 위한 영화’라 했다더군요. 전적으로 공감해요.

정은숙 기대가 커서 그랬는지, 저로선 이재용 감독의 연출력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 영화였어요.

신용관 오, 확 치고 들어오시네요.(웃음)

정은숙 이 코너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건데 ‘쎄게’ 나가지요, 뭐.(웃음)

배종옥 오늘 아주 흥미롭네.(웃음)

정은숙 독거노인, 빈곤층 등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을 다 건드리는데, 묵직한 맛이 떨어지는 거 같아요. ‘중요한 메시지는 분명 있는 듯한데, 섬세함이 부족하다’고 할까요. 특히 주인공 소영(윤여정 분)이 ‘박카스 할머니’에서 살인자로 넘어가는 부분에서 연결고리가 부드럽지 못한 것이 설득력을 떨어뜨리고 있어요.

배종옥 나도 그 부분엔 동감해요. 갑자기 살인자로 둔갑하는 거 같아서 영 개운치 않더라고.

신용관 난 그럴듯하다고 봤는데. 그 장면 앞에서 묘사된 할머니의 인생을 돌이켜보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나요? 그냥 ‘꾸역꾸역’ 살아온 인생이잖아요. ‘산송장’이라고나 할까. 죽음 같은 건 두려워 할 이유가 전혀 없지요. 어차피 가진 게 없어 더 이상 아무 잃을 것도 없으니.

정은숙 의상과 소품은 굉장히 마음에 들었어요. 윤여정이 초반에 청재킷과 꽃무늬 바지 차림으로 나오잖아요. ‘예쁘게’ 보여야 하는 늙은 매춘부로서 나름 멋을 부린 거지요. 애교도 있고. 첫 살인을 저지른 후엔 급격히 어두운 차림으로 나오는 등 의상의 디테일이 아주 좋았어요.

배종옥 ‘정사’(1998)를 보면 알지만, 원래 이재용 감독이 미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에요.

신용관 하지만 이번 영화는, 소재와 주제 때문에도 필연적이었겠지만, 미장센을 아예 포기한 듯이 찍었습니다. 싸구려 여관방은 물론, 그들의 집과 마당도 그렇잖아요. 빗자루, 세숫대야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배종옥 나는 이게 진짜 미장센이라고 봐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정은숙 여관에서 몸을 파는 장면은 정말 리얼했어요. 특히 윤여정의 표정이 압권이었지요. 하기 싫어 죽겠으면서 상대방을 만족시키기 위해 일부러 표정도 지어야 하는. 극도의 모멸감을 느끼면서도 그 모멸감을 감추려 애를 쓰는…. 배우 윤여정이 아니었으면 이 영화가 과연 가능이나 했을까 싶어요.

영화 ‘죽여주는 여자’의 장면들.
영화 ‘죽여주는 여자’의 장면들.

신용관 여관방 윤여정의 표정엔 실제로 불쾌감이 어려 있습니다. 어렵게 촬영을 했더니 이 감독이 “한 번만 더 가자”고 했고, 윤여정이 “아니, 이 짓을 또 하란 말이야?”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고 해요. “여관방 특유의 역한 냄새에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는 윤여정의 인터뷰 기사를 보니 “배우가 싫어하는 일을 강요해야 하니 ‘감독도 못할 짓이구나’라고 느꼈다”고 그러더군요.

정은숙 그래서일까요. 배우 윤여정의 ‘자의식’이 유난히 돋보였어요. 윤여정의 그 복잡다단한 연기 덕분인지 영화가 끝난 뒤에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어요.

신용관 영화에서 남자 셋을 죽이는데, 나머진 그렇다 치고 두 번째 남자(조상건)의 살인 장면이 이해가 되나요? 산에서 밀어 죽이는 일을 왜 굳이 여자에게 시키지요? 전무송 자신이 하면 되잖아요. 산꼭대기에서 혼자 뛰어내려도 되고. 이미 사람 하나 죽여 봤으니, 당신이 마저 해라?

배종옥 전무송의 입장에선, 차마 친구를 제 손으로 죽일 수 없어서였겠지요. 그렇다고 혼자 뛰어내릴 만큼 강단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신용관 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받아들이는 윤여정의 모습에서 일종의 ‘성녀(聖女)’의 이미지를 봤어요. 정말 인류애로 가득한 여성 아닙니까?(웃음)

배종옥 이 영화에 대한 호불호(好不好)를 떠나 여러 가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라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어요.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든, 노년의 삶에 대해서든 자연스럽게 관객들이 각자 스스로를 대입시켜 생각해 보게 만들잖아요.

정은숙 하지만 저는 감독이 너무 많이 ‘머리를 굴려서’ 실패한 경우 같아요. ‘사회적 메시지’를 담겠다는 영화적 욕심, 연출자로서의 의지가 너무 앞섰던 것이지요. 사회적 화두를 던져놓기만 하고 채 수습을 못한 꼴이니까.

신용관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물론 이 영화에는 매춘부(윤여정), 절단 장애인(윤계상), 트랜스젠더(안아주), 가난한 노인, 코피노(Kopino·한국인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자녀) 등 이 사회의 마이너리티들이 총출동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양공주’ 출신의 늙은 매춘부가 세 들어 사는 집에 멀쩡한 주민이 이웃해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게다가 탑골공원에 출근(?)하다시피 하는 노인이 전국 노인의 몇 퍼센트나 될까요? 그중에서도 또 돈으로 성을 사는 남성의 비율은? 다시 말해, 이 영화는 극도의 소수자를 다루고 있을 뿐입니다. 한줌의 인물들로 사회 비판을 하기엔 역부족이라는 얘기지요.

배종옥 하지만 영화는 명백히 노인빈곤 문제, 안락사 문제를 다루겠다는 의지를 보였지요. 이는 감독도 ‘연출 의도’로 밝힌 것이고.

정은숙 트랜스젠더 집에서 함께 지내는 ‘없이 사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삶, 즉 일종의 ‘연대감’을 화면에 담잖아요. 사회적 메시지를 명백히 전하려 했어요.

신용관 그렇다면 물어보겠습니다. 같이 미군부대에서 몸을 팔았던 ‘해피’(예수정 분)는 왜 등장시켰을까요?

배종옥 소영으로선 자신의 삶을 더욱 비관적으로 보게 된 계기가 됐겠지요.

신용관 영화는 민들레 한 송이를 비추면서 시작합니다. 첫 살인을 저지른 후 갖는 매매춘 장면에서도 민들레가 나오지요. 택배 일로 용돈을 버는 전무송은 버스에서 헤어지며 꽃 한 송이를 윤여정에게 주지요. 영화는 110분 내내 잊을 만하면 소영이라는 인물이 철두철미 ‘혼자’라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해피’는 비록 청각장애인과 살지만 혼자가 아니지요. 저는 이 영화가, 감독의 연출 의도와 달리, 소영의 인생을 통해 인간 본연의 외로움, 인간 존재의 ‘쓸쓸함’을 잘 묘사했다고 봅니다. 교도소에서도 혼자 볕 쬐고 혼자 밥 먹지요. 체포된 차 안에서 영화가 끝나질 않고, 67세 여성의 뼛가루 상자를 보여주면서 끝나잖아요.

배종옥 난 그런 생각이 자주 들어요. 인생의 쓸쓸함도 좋고 사회적 소외도 좋은데, 왜 굳이 우리나라 영화엔 ‘새드 엔딩(sad ending)’이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어요. 일본 다큐멘터리 중에 ‘요코하마 메리’(감독 나카무라 다카유키)라는 작품이 있어요. 항구도시 요코하마에서 50여년 간 매춘생활을 해온 여성이 주인공이지요. 항상 가부키 배우처럼 하얗게 얼굴을 칠하고 중세풍 드레스를 입는 할머니인데, 그렇게 비극적인 인생을 다루면서도 해피 엔딩으로 처리해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할머니를 다른 도시에서 찾아내는데 그녀가 그래요. “요코하마 시절은 내 인생의 절정기였다”고. 비참한 인생을 다룬다고 영화도 우울하게 만들 이유는 없거든요.

정은숙 ‘해피 엔딩은 세상의 진실과 거리가 멀다’라는 편견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 영화 꼭 보고 싶네요. ‘죽여주는 여자’는 다큐의 형식을 띤 덕택에 가령 산부인과 의사와 간호사 묘사가 그랬듯, 있는 그대로 삶의 한 풍경을 담담하게 담아서 좋았어요. 특히 개인적으로 ‘자유 죽음’, 저는 ‘자살’이라는 말 대신에 오스트리아 작가 장 아메리(Jean Amry·1912~1978)의 철학적 글에서 따온 이 표현을 좋아하는데, 그 자유 죽음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주는 영화였어요.

신용관 맞아요. 저도 앞으로 ‘존엄사’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게 될 것 같아요.

배종옥 내 별점은 ★★★. 한 줄 정리는 “윤여정 연기를 보는 재미가 쏠쏠한 영화.”

정은숙 저는 ★★★☆. “누구도 다른 이의 삶에 쉽게 돌을 던지면 안 된다는 것.”

신용관 난 ★★★★☆. “물기 하나 없이 톡 치면 바스스 가루가 될 듯 건조한 화면, 영상보다 더 메마른 존재 본연의 쓸쓸함.”

신용관 조선뉴스프레스 인터넷뉴스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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