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고호의 별이 빛나는 밤에’의 한 장면. ⓒphoto SBS
드라마 ‘고호의 별이 빛나는 밤에’의 한 장면. ⓒphoto SBS

“아이고 미스 고, 나 오는 건 어떻게 알고 이렇게 환영을 해줘? 미스 고 평소에 그렇게 안 봤는데 품 안에 안기는 감촉이 쫄깃쫄깃하다.”

이는 지난 주말 방송된 드라마 ‘고호의 별이 빛나는 밤에’의 한 장면이다. 그 후 미스 고(권유리 분)는 어떻게 됐을까. 미스 고를 짝사랑하는 김 팀장(김영광 분)이 나타나 광고주의 팔을 꺾어주어 상황은 일단락될 수 있었다. 광고주는 “내가 누군지나 알고 이래?”라고 소리를 질렀고 미스 고는 가까스로 직원 회의실로 대피한다. 로맨스드라마의 외피를 쓰고 소녀시대 유리, 모델 출신 배우 김영광 등을 캐스팅한 이 드라마는 처음 ‘웹드라마’로 제작을 고려했을 정도로 트렌디한 청춘물이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의 에피소드를 쌓아가는 방식은 진부하다. 더구나 명백한 성폭력의 장면을 남자 주인공의 패기를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한 것은 진부함의 가장 안 좋은 예다. 비슷한 상황은 최근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질투의 화신’에서도 연출된다. 극중 기상캐스터에서 아나운서가 된 표나리(공효진 분)는 여전히 계약직이다. 그런데 그와 함께 아침 뉴스 앵커를 하고 있는 박 기자는 공공연하게 이런 말을 던진다.

“아파서 언제 그만둘지도 모르는 유방암 앵커가 정규직이 될 수 있을까.”

사색이 되는 건 피해자인 표나리다. 이 역시 남자 주인공인 이화신(조정석 분)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다가와 “뭐야, 무슨 일 있어? 박 기자 너는 네 일이나 열심히 해”라고 윽박을 질러 상황을 종료시킨다.

방송인 유세윤이 만든 공익 광고.
방송인 유세윤이 만든 공익 광고.

일상화된 성폭력

최근 SNS상에서 ‘#문단_내_성폭력’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몇 년간 홀로 속앓이를 하던 피해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성폭력이 일상화된 집단 분위기와 ‘문단 내에서 등단하지 못하거나, 앞길이 막힐지 모른다는 협박과 불안’ 때문에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고 한다. 이들의 증언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위계(位階)에 의한 성폭력’이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는 ‘강사와 학생’이거나 ‘스승과 문하생’ 혹은 ‘작가와 팬’이었다.

앞서 언급한 드라마에서도 여주인공과 가해자의 관계는 광고주와 대행사라는 갑을 관계이거나, 선배와 후배라는 상하 관계였다. 이렇게 수평적이지 않은 관계는 피해자가 피해를 예방하거나 피해를 당한 후에도 이에 대해 입을 열 수 없게 만든다. 문단에서는 숱한 문인들이 가해자로 호명되어 집필 활동을 중단했다. 이들은 처음에 자신의 행동을 부인하다가 피해자의 증언이 이어지고 SNS에 메시지나 사진 등 증거물이 공개되자 자신의 부적절한 행동에 대해 사과했다. 한바탕의 홍역 같은 공방전이 지난 후, 전문가들이 이에 대한 분석을 내놓았다. 허민숙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는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성폭력은 성폭력 가해자가 아니라, 성폭력이 용인되는 분위기에서 일어난다”고 했다. 성폭력이 용인되는 분위기는 일상화된 성폭력을 만든다. 그리고 여기에 대중매체의 영향은 크다. 일상적으로 노출되는 TV, 드라마, 예능프로그램, 뮤직비디오 등에서 여성을 대상화하고 데이트폭력을 로맨스로 둔갑시키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10월 초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는 SBS 주말극인 ‘우리 갑순이’가 안건에 상정됐다. 남자 주인공인 갑돌(송재림 분)이 이별을 통보하는 갑순(김소은 분)의 팔을 잡고 으슥한 골목에 끌고 간 뒤 벽에 밀치고 입을 맞췄다. 갑순은 “싫다”는 의사를 표시하며 거부했지만 갑돌은 “너랑 못 헤어진다. 나는 널 사랑한다”며 완력을 행사했다. 이 장면은 방송심의규정 제27조인 품위유지, 제30조인 양성평등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심의를 받았다. 심의의 결론은 ‘문제없음’이었다. ‘이 정도는 작가가 가진 표현의 자유이자, 사회상규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네티즌의 의견은 달랐다. “해외에서는 한국 드라마에 여자 주인공을 벽에 밀치고, 강제로 스킨십을 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해외 언론사 사이트인 ‘버즈피드’에서는 한국 드라마에만 등장하는 이상한 장면 일곱 가지를 꼽았다. 이 중에는 ‘여자 주인공의 팔을 억지로 끄는 장면’과 ‘강제로 하는 키스 장면’ 등이 포함돼 있었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지난 9월 12일부터 21일까지 만 18세 이상 성인 여성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여성 응답자 1017명 중 61.6%는 데이트폭력을 경험했다고 한다. 심지어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2011년부터 2015년까지 애인 관계에 있는 사람을 살해하거나 폭행치사해 검거된 사람이 296명에 이른다. “둘 사이의 일이니 둘이 해결하라”고 하기에는 ‘사랑보다 깊은 상처’를 남기는 게 데이트폭력이다. 경찰 측은 “데이트폭력은 재범률이 높고 상습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개인 간의 단순한 사랑싸움 문제라 여기고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방송인 유세윤은 최근 자신이 설립한 광고회사를 통해 ‘공익’ 광고 한 편을 제작했다. 직접 출연한 유세윤은 영상 속에서 여자친구의 특정 신체부위만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이에 여자친구가 “내 눈을 보며 이야기하라”고 하자 “여자는 때로 자신의 몸에도 질투를 느낍니다”라는 자막이 뜬다. ‘연애를 하면서 겪게 되는 남녀의 심리를 유쾌하고 기발하게 그렸다’는 광고의 취지에 시청자들은 “여자는 자신의 몸을 질투하는 게 아니라 인격체로 대해 달라고 하는 것이다. 전혀 유쾌하지 않다”고 답했다. 광동제약에서 제작한 ‘야관문 야왕’ 광고도 마찬가지다. CF의 메인 문구는 “마셔라, 열릴 것이다”인데 야왕 음료를 마시는 배우 김광규의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면, 여성들이 치마를 펄럭이며 초점 잃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거나 문 앞에 ‘OPEN’이라는 표시를 걸고 그를 바라보고 있다. 광동제약은 “주 타깃인 남성 소비자에게 음료의 콘셉트를 직관적으로 전달했다. 이 CF가 조회수 200만건을 기록하며 화제가 되고 있다”고 자화자찬했지만 누리꾼의 반응은 싸늘하다. ‘남성 건강음료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길 가는 여성들이 모두 내 것이 되리라’는 메시지 자체가 왜곡된 성의식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심지어 여성을 주 타깃으로 한 ‘맑은 티엔’ 음료 CF에도 몰카와 SNS 스토킹 장면이 등장한다. 이를 본 여성의 87%는 ‘소름 끼친다, 광고에 문제가 있다’고 답했다.

중앙대학교 성평등위원회는 ‘이것은 썸도 데이트도 아니다’라는 세미나에서 “영상에 등장하는 폭력적 장면들은 ‘여자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여성은 이런 일을 겪으면 섬뜩한 공포를 느낀다. 여성에게 강제키스를 하고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는 나쁜 남자는 멋있는 남자도 매력적인 남자도 아니다. 나쁜 남자에게 필요한 것은 미화가 아니라 치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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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슬기 조선pub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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