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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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석을 깔아주었을 때 제대로 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조정석은 멍석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는다. 보는 이도 신나게 만든다. 이는 끼나 순발력이 아닌 연습과 훈련의 결과다. 수목 드라마 1위를 놓치지 않고 종영한 ‘질투의 화신’은 조정석이 멍석 위에서 얼마나 잘 놀 수 있는 배우인가를 보여준 드라마다. ‘1시간짜리 조정석 쇼’라는 시청자의 평에 많은 이들이 공감했다. 뉴스룸에서 그는 똑 부러지는 앵커였고, 병원에서 그는 홀로 신음하는 유방암 환자였다. 그 와중에 한 여자를 만나 3년 짝사랑에도 꿈쩍 않던 철벽남에서 질투의 화신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연극·영화계에서 그는 이미 블루칩이었지만, 드라마는 그의 재발견이었다. 안방극장에서 그를 처음 본 이들은 “저 배우 누구야?”라고 묻기 시작했고, 그의 진가를 익히 알던 이들은 “드라마까지 이렇게 씹어 먹을 줄이야”라고 답했다. 사실 2012년 ‘건축학개론’의 ‘납득이’가 그를 날아오르게 한 것 같지만 그는 이미 날개를 가진 배우였다. 1980년생인 그는 삼수 끝에 서울예대 연극과에 들어갔다. 2004년 ‘호두까기 인형’으로 무대에 선 이래 한 번도 무대 아래로 내려온 적이 없었다. ‘헤드윅’ ‘트루웨스트’ ‘블러드 브라더스’ 등의 뮤지컬에서 그는 이미 탄탄한 매니아층을 보유하고 있었다. 조정석은 말한다. “공연 12년 차인데, 어떤 공연은 쫄딱 망하고 어떤 공연은 대흥행했다. 실패는 이미 많이 맛봤다. 성패에 상관없이 언제나 도전하는 자세를 가져야 다음 작품을 할 수 있다.”

어떤 공연은 흥했고 어떤 공연은 망했지만 무대의 경험은 그를 ‘놀 줄 아는 배우’로 만들었다. 제대로 놀려면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는 먼저 이 이야기가 어디에서 출발해 어디를 향해 가는 작품인지를 파악한다. 지난해 조정석 주연의 ‘특종’을 연출한 노덕 감독은 “조정석의 출연 장면을 모아 보면, 그가 얼마나 치밀하게 계산하고 연기에 임했는지를 보고 놀란다”고 했다. “전체의 그림을 위해 그는 카메라 구석에서도 연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질투의 화신’ 마지막 방송이 있던 주, 영화 ‘형’의 개봉을 앞두고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조정석을 만났다. 영화를 마치고 인터뷰를 할 때 그는 영화의 캐릭터 영향을 많이 받는다. 지난해 ‘시간이탈자’를 마치고 만났을 때 그는 주인공 영민처럼 수줍어 보였다. 그런데 ‘형’의 고두식처럼 많이 까불고, 웃고, 우는 역할을 맡았을 때 그는 활달해진다. 무대인사를 할 때도 그렇다. 영화 속 캐릭터가 되어 관객을 맞는다. 홍보를 하는 순간에도, 그는 자신의 역할을 잊지 않는다.

“작품에 들어가면 퍼즐을 하나씩 맞추는 기분입니다. 어떨 때는 숲을 먼저 펼치고 그 안의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찾기도 하고요, 나무의 가지를 치면서 숲을 만들기도 해요. 처음을 잘 쌓으면 후반에 힘이 생기거든요. 그렇게 매 장면을 만들었죠. ‘형’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느낌이 굉장히 좋았어요. 영화를 보니까 그때 받은 느낌 그대로예요.”

멍석이 깔리면 신나게 놀 수 있도록

시나리오 책에 어떤 이야기가 쓰여 있었고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는 그에게 무척 중요하다. 먼저 그가 납득이 되면, 보는 이도 설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든다. 그가 관객을 설득하는 방법은 역설적으로 ‘시나리오를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상대배우들이 조정석의 ‘애드리브’ 때문에 웃음을 참지 못해 NG를 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소 오해가 있다.

“저는 애드리브를 좋아하는 배우가 아닙니다. 시나리오에 적혀 있지 않은 것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제 연기의 목표는 제가 시나리오에서 받은 그대로 관객들도 공감하게 만드는 거예요.”

이 미스터리는 ‘형’의 파트너였던 배우 도경수를 만나 풀렸다. 그는 조정석과 호흡을 맞추면서 “이렇게 대본에 충실하면서, 이렇게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다니” 감탄했다고 한다. “형이 하는 말이 애드리브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대사조차도 실제로 하는 말처럼 들리게 하기 때문”이라면서. 결국 ‘시나리오라는 기본에 충실’했다는 교과서 같은 말이 조정석 연기의 정석이었다.

“무대에서의 경력이 도움이 됐죠. 대본에 충실해야 장면 하나하나를 제대로 꾸려 나갈 수 있어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결국 연기는 호흡이에요. 이 호흡을 하는 이유가 명확해야 해요. 만약에 대본에 적힌 호흡이 안 나오면 그 호흡을 할 수 있는 동기를 스스로 만드는 거죠.”

떨어진 펜을 하나 주워도 거기에 이유를 담으려고 한다. 매번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지만, 감성이나 감정이 소진되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연기는 육체노동인 동시에 감정노동입니다. 감정노동을 하는 노동자로서 저는 연기가 재밌어요.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사람으로 치유하는 것처럼 연기로 받은 상처는 연기로 치유받아요. 작품이 쌓인 만큼, 또 다음 작품에서는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커졌다는 걸 느끼고요.”

평소에 그는 말이 많은 편이 아니다. 대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들을 관찰하면서, 어떻게 이야기를 했을 때 더 잘 전달이 되고 더 잘 들리는지를 본다.

“제가 과묵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늘 재기 넘치지도 않아요. 대신 많이 관찰하고 많이 연습합니다. 승부욕이 좀 있는 편이거든요. 제가 제 자신에게 놀라는 점은, 이게 될까 싶은데 될 때예요. 신체적인 능력도 한계에 자꾸 부딪히면 키워지는 거 같아요. ‘뭐든지 자신 있게 하자’는 게 제 평소 생각이고요. 제가 저를 믿지 못하면 보는 사람한테도 들키거든요.”

그가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제대로 준비했기 때문이다. 그는 “준비물을 안 갖고 학교에 가면 주눅 들지 않나, 촬영장에 갈 때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기자 역할이던 영화 ‘특종’에 앞서서는 뉴스를 보며 리포팅을 연습하고 야외와 스튜디오의 차이를 익혔다. ‘질투의 화신’에서 프리스타일 랩을 선보이기 전에는 음악 프로그램인 ‘언프리티 랩스타’를 꼼꼼히 챙겨 봤다. 20대에 쌓인 무대의 경험이 그에게 남긴 것은 ‘꼼꼼히 준비하는 습관’이다. 20대 때 그는 “20대는 무조건 열심히 하고 30대에는 잘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20대 못지않게 ‘열일’하고 있는 서른여섯의 지금은 어떤 마음일까.

“30대의 중반을 지나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서, 잘 살고 있나 생각하면 감사하게도 ‘너무너무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이루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잘하고 있는 듯합니다. 돌이켜봤을 때 ‘내가 뭐하고 살았나’란 생각은 안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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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슬기 조선pub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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