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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0호] 2017.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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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뉴요커’로 돌아간 뮤지션 한대수

“아버지 되니 또 다른 인생 시작되더라”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삑. 당신의 생각은 틀렸다. 오해다. 외양 탓일지도 모르겠다. 젊었을 때부터 내키는 대로 살다, 70대가 돼서도 기어이 살고 싶은 대로 사는 운 좋은 딴따라라 생각하고 있지 않나. 한때 기자도 같은 의심을 했다.
   
   2003년, 14년 전 기자가 대학생이던 때다. 신촌 오피스텔에서 한대수 부부를 만났다. 정확히 표현하면, 원룸 오피스텔 싱크대 옆에서 한대수씨와 인터뷰를 했고, 부인 옥사나씨는 그 옆에 누워 있었다. 영어를 몹시 잘하는 괴짜 히피라 생각하며 건물을 나선 기억이 있다.(영어 인터뷰였다.)
   
   지난 8월 4일 다시 신촌에서 한대수 부부를 만났다. 미국에서 잠시 귀국한 참이다. 마침 딸 양호의 여름방학인데다 뮤지컬 ‘할리우드의 피터와 늑대’에 출연한단다. 내레이터 역할이다. 한국에선 초연이다. 한씨는 지난해 뉴욕으로 이주했다. 이유는 딸 양호.
   
   “양호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니까 방과 후에 같이 놀 친구가 없더라. 다 학원으로 흩어졌다. 그렇다고 양호를 학원에서 학원으로 돌리며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거기서 두 손을 들었다. ‘이건 아니다’. 내가 10살 때 뉴욕 간 게 생각났다. ‘가자.’”
   
   - 왜 하필 뉴욕이었나. “딸을 강하게 키우고 싶다. 뉴욕같이 터프한 도시가 어디 있나. 천재도 많고 기회도 많다. 뉴욕에서 살아남으면 어디 가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그는 10대에 뉴욕으로 건너가 40대까지 그곳에 살았다. “1950~1960년대 뉴욕은 안전하고 사람들이 착했다. 학교 다니며 ‘세렌디피티3’라는 레스토랑에서 조수로 일했다. 게이 3명이 사장이었다. 1년 반 있었는데 음악 창작에 많은 영감을 줬다. 존 레넌이 식사하러 오면 일부러 식탁 옆으로 지나가면서 말을 걸기도 했다. 오노 요코랑 손잡고 산책하는 존 레넌과 마주치기도 했다. 앤디 워홀은 은색 가발을 쓰고 다녔다. 눈에 안 띌 수가 없었다. 지금도 뉴욕 토박이들은 스타들이 지나가도 안 괴롭힌다.”
   
   - 양호는 적응 잘하나. “너무 잘해 피곤할 정도다. 1년밖에 안 됐는데 뉴욕 영어로 말한다. 뉴욕 영어는 다른 지역의 영어보다 발음을 굴리고 감정 표현이 더 풍부하다. 퀸스에 살고 있는데 월세가 비싸다. 평균 3000달러. 중산층은 일자리 하나로는 버티기 힘들다. 나도 막노동을 한다. 같이 사진작가하던 친구가 건물 개조 일을 한다. 양탄자 뜯어내는 일을 하며 돕는다.”
   
   밥 딜런스러운 발성과 유창한 영어 때문일까, ‘한대수는 군 면제자 혹은 미국 국적자’로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주변에 몇 명인가 있었다. 그러나 군필이다. 해군으로 복무했다. 군 시절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싶었다.
   
   “1971년부터 군복무를 했다. 미국-베트남전이 절정인 시기였다. 기합이 셌다. 신병훈련소에서부터 맞기 시작했다. 오마이갓. 쇠몽둥이로 때리더라. 너무 아파서 한 방 맞고 기절했다. 키가 크고 영어를 잘해 양호한 축으로 분류됐는지 기함 ‘충무함’에 배치받았다. 구축함이다.”
   
   - 보직은 어떤 걸 맡으셨나. “해군 참모총장실로 발령받았다. 참모총장이니 매일 외국에서 손님이 온다. 영어 연설문을 매일 썼다. 발음도 지도했다. ‘웰컴은 웰에 악센트를 주십쇼.’ 양호한 날들이었다. 참모총장실 오기 전엔 자살하고 싶더라고. 해군 동기들과 지금도 가끔 연락한다. 모임은 별로 안 좋아해서 안 나가고.”
   
   임시로 머무르는 레지던스에서 인터뷰를 계속 하려했으나 자리를 옮겨야 했다. 레지던스의 청소 시간이었다. 부근의 카페로 걸어가며, 부인 옥사나가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양호가 학교를 졸업하면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다는 요지였다. 한대수 가족의 재정 상황에 대한 몇 가지 설명과 함께. 듣고 있는 한 씨의 표정이 묘했다.
   
   - 뉴욕행을 후회하신 적은 없나. “현재의 뉴욕은 과거의 로마와 같다. 도시 자체가 영원한 관심거리다. 양호를 그런 도시로 데려간 걸 전혀 후회 안 한다. 역사가 있는 도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는 건 특혜다. 내가 양호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다. 편안함을 포기하고 데려간 이유다. 주말에 손잡고 미술관, 박물관에 다니며 보람을 느낀다. 세계적인 문화를 흡수하려면 초등학생 때 가야 한다. 강남 사모님들이 고등학생 때나 대학생 때 유학 보내지 않나. 완벽한 코스모폴리탄이 되려면 초등학교 때 가야 한다.”
   
▲ 뮤지컬 출연을 위해 한국을 찾은 한대수와 아내 옥사나.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 미국에도 문제는 있지 않나. “가장 큰 문제는 국민건강보험이 없다는 거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거다. 메디케어, 메디케이드가 있지 않냐고? 메디케이드 조항 해석하는 데만 하루가 걸린다. 1950년대에 전 국민 의료보험 체계를 만들었어야 했다. 지금은 못 한다. 그러니 삶의 질이 나쁘다. 한국은 국민건강보험 도입을 정말 잘한 거다. 우리 국민들은 불평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요즘 특히 한국 청년들이 뉴욕에 대해 허상을 품고 있더라. 조선일보 칼럼(‘사는 게 제기랄’)이나 팟캐스트(‘한대수의 마이뉴욕’)로 벌거벗은 뉴욕을 보여주려 한다.”
   
   생각지 못하게 엄청난 ‘딸바보’가 된 왕년의 히피에게 딴지를 걸어봤다. “아이 낳은 걸 후회하신 적은 없나.” 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하늘의 선물이라 고맙게 받았지만, 아이를 낳는 건 생각도 못 했다. 사는 게 고통 자체 아닌가. 그런데 아버지가 되니 또 다른 인생이 시작되더라. 아이를 키운다는 건 고통과 행복이 섞인 사도마조히즘적 경험이다.”
   
   ‘뮤지션은 돈 얘기를 하고, 사업가는 음악 얘기를 한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다. 한대수는 2015년에 데뷔 40주년 기념 앨범을 냈다. 크라우드펀딩, 대중에게 투자를 받는 방식으로 돈을 모았다. 돈 얘기를 꺼내자 한대수의 말이 빨라졌다. “남자 여자 빨리 연애해서 인구를 늘려야 한다. 2억명만 되면 문제없다. 뉴욕에선 시간이 많다. 한국 로큰롤 쪽엔 왜 성공한 전국투어가 없나, 앉아서 고민을 해봤다. 인구 1억명 이하 나라에선 공연이 안 된다.”
   
   - 음원 수입은 어떤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다. 물론 음원 수입이 많은 뮤지션들이 있다. 아이돌 음악 작곡가 서너 명 정도. 옛날 히트곡 한두 곡으로는 월세도 못 낸다. 앨범 만드는 데 적어도 2000만원이 든다. 그 정도 걱정은 안 해야 창작음악이 발전한다. 외국 아티스트들은 한 달에 100만달러씩 음원 수입이 들어온다. 전 세계가 시장이니까.”
   
   - 인구가 문제라면 세계인을 대상으로 음악활동을 하면 되지 않나. K팝 열풍이 시장을 넓혀놓지 않았나. “3년 전에 빅뱅이 뉴저지 축구장에서 공연을 했다. 6만명이 왔다. 60~70%가 미국인이었다더라. 한국의 대형 기획사들은 자본이 있지 않나. 그 안에 아이돌 그룹 파트와 함께 록 파트를 두면 얼마나 좋을까.”
   
   - 싸이가 그런 면에선 큰일을 했다. “아시아의 잠재력을 보여줬다. 두서너 곡 이어갔다면 일정한 영향력이 생겼을 텐데 아쉽다. 한국은 아일랜드와 비슷하다. 세계적인 뮤지션이 탄생할 수 있다. 역사에 공통점이 있어서인지 비슷한 정서가 있다. ‘한’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만 해외무대로 나와야 한다. 데이비드 보위, 로드 스튜어트, 조지 마이클 등 영국 뮤지션들도 런던에서 성공해 봤자 소용없다. 그들이 뉴욕으로 온 이유다.”
   
   - 양호가 뮤지션이 되겠다면 지원하시겠나. “솔직히 벌써 그런 기미가 있다. 재능도 있다. 친구들끼리 밴드도 결성했다. ‘다이아몬드 걸스’. 개인적으론 안 했으면 좋겠다. 꼭 하겠다면 할 수 없고. 가장 좋은 직업은 양호한 남자와 결혼한 양호한 전업주부다.”
   
   한대수는 책도 열심히 쓴다. ‘바람아 불어라’ ‘사랑은 사랑 인생은 인생’ ‘영원한 록의 신화 비틀스 vs 살아있는 포크의 전설 밥 딜런’. 직접 찍은 사진과 글을 곁들였다. 광고 사진작가로 일했던 적이 있어서인지 그의 사진은 세련되고 흥미롭다. 앵글에 윤기가 흐른다고 할까. 그의 조부 한영교 박사는 언더우드와 함께 연세대학교 설립자다. 연세대 신학대학 초대 학장을 맡기도 했다. 지금도 연세대가 교내 행사를 열면 한대수를 명예동문으로 초청하는 이유다. 한영교 박사의 형제들도 만만치 않다. 부산 최초의 양의(洋醫)이자 독립운동가 한흥교 선생, 부산 최초의 고아원 ‘애린원’ 원장이었던 ‘고아의 아버지’ 한정교 선생 등이다. 집안 배경을 한씨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세브란스병원에 가면 정중한 예우를 해준다. 옥사나가 무척 좋아해.”
   
   - 외국인으로 태어났으면, 싶은 때가 있었나. “그럼 된장찌개 못 먹잖아. 꿈은 꾸지만 몽상가는 아니다. 젊었을 때 그런 적은 있었다. 뉴욕에서 펑크밴드를 조직했는데 아무리 노래를 부르고 다녀도 픽업이 안 돼. 미국 연예산업은 유대인이 꽉 잡고 있지 않나. ‘데이비드 한스타인으로 개명해 볼까’ 근데 얼굴이 완전 동양인이라 실행에 못 옮겼지. 한국에서 태어난 걸 최대한 고맙게 생각하고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일 뿐이다. 유대인이 큰손인 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이돌 그룹에 유대인 멤버를 포함하면 미국 진출이 더 쉬워지지 않을까.”
   
   - 시간 흐름을 비껴가신다. 건강관리 어떻게 하시나. “서울 와서 TV 보니 광고의 절반 이상이 건강에 관한 제품들이다. 이건 좀 심하다. 몇 년 살겠다고 이렇게 난리인가. 음모가 있는 거다. 나는 매일 잠 8시간 자고 물 7컵 이상 마신다. 사실 먹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건 ‘동반자’다. 독거노인이 되면 안 된다. 악처도 좋고 악한 남편도 좋다. 고독이 사람을 빨리 죽게 한다.”
   
   한대수는 옥사나와 양호에게 저녁 밥을 차려줘야 한다며 일어섰다. ‘양호’한 가장의 뒷모습이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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