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어느 날 눈 떠보니 ‘국민언니 김미경’은 ‘국민 표절녀 김미경’이 돼 있었다. 무명의 강사에서 인생 최고의 정점에 오르기까지 21년이 걸렸지만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2013년 3월 20일, 김미경(49·아트스피치 원장)의 인생은 조선일보에 ‘논문표절 의혹’ 기사가 실린 ‘그날’을 기준으로 의미가 달라졌다. 그날, 그는 평생 먹을 욕을 다 먹었다.

그가 돌아왔다. 첫 에세이집 ‘살아 있는 뜨거움’을 최근 출간했고, 3월에 시작되는 종편 프로그램 진행자에 이름을 올렸다. 1년 전 비바람에 벚꽃 지듯 우수수 떨어졌던 강연은 다시 그의 일정표를 빽빽하게 채우고 있다. 지난 2월 18일 서울 마포구 홍대 인근에 있는 집필실에서 그를 만났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그는 얼굴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는 인터뷰가 끝나는 대로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사고로 사망한 부산외대생 조문을 가봐야겠다며 부산행 비행기 시간을 알아보느라 분주했다.

그는 “부산외대생들이 눈에 밟혀 만사 제쳐놓고 조문을 다녀오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고 말했다. 조문을 위해 이날 예정했던 아주 특별한 이벤트도 취소했다. 자신을 기다려준 팬들에게 고맙다는 마음을 전하기 위한 ‘호프 번개’ 모임이 계획돼 있었던 것.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플러스친구를 통해 지난 1년 동안 그에게 응원을 보내준 팬들이 1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들 중 선착순 450명을 초대해 맥주 한 잔씩 대접하고 밀린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는데 부산외대생들을 생각하니 도리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이날 초대한 사람들에게 행사 취소를 알리느라 그의 사무실 전화기는 불이 났다.

부산외대와는 그가 2개월 전 강연을 다녀온 인연이 있다. 그렇다고 꼭 조문을 갈 이유는 없을 터였다. 그는 “작년 3월 20일 이전 강의와 이후의 강의는 나한테 완전히 의미가 다르다. 그 전엔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는 강의였다면, 그 후는 내가 기다리는 강의가 됐다. 하루에 강의가 2~3건이고 내 스케줄도 모른 채 뛰어다니다 일주일에 2~3건이 고작이라고 생각해봐라. ‘당연히 환호하겠지’가 ‘과연 환호해줄까’가 됐다. 그런 마음에서 받는 환호는 감동이 다르다. 부산외대 강연을 갔는데 학생들이 내가 기가 빠질까봐 박수를 두 배로 쳐주는 것이 느껴졌다. 강의가 끝난 후 학생들이 ‘힘내라’면서 줄을 서서 안아주는데 그때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달려가서 힘이 돼주고 싶다”고 말했다.

누구든 인생의 굴곡이 있게 마련이지만 그처럼 급격한 롤러코스터를 경험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인생에 큰 충격이 올 때는 마치 시나리오가 만들어진 것 같더라. 5층 높이에서 떨어진 것과 100층 높이에서 떨어진 것은 충격이 다르다.” 그의 말처럼 스스로도 아찔할 만큼 높은 곳에 올라갔다가 떨어진 것은 ‘큰 바위가 찍어 누르는 아픔’이었고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고 한다. 그에게 닥친 불행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세상에 다시 나올 용기를 냈을까. ‘독설 언니’ 김미경식 ‘운명 대처법’이 궁금했다.

대폭발 다음에는 수많은 충격의 파편들이 이어진다. 그도 역시 자책·원망·분노·불안·절망 등 온갖 감정의 회오리에 휘말렸을 것이고 예측불허의 일들이 꼬리를 물었을 것이다. “사무실로 기자들이 몰려오고, 강의가 취소되는 바람에 환불 소동이 벌어지고, 직원들은 절반을 내보냈다. 20년 넘게 쌓아올린 회사가 반토막이 되는 데 불과 한 달이 안 걸리더라. 회사가 조금씩 커질 때마다 한 명씩 들어와 가족처럼 지내던 직원들이 하루아침에 실직을 했다. 애써 웃으며 안아주고 보내려 했는데 장례식장이 따로 없었다. 통곡하는 직원들을 보며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사람 도리를 못했다는 자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직원들을 떠나보낸 날 그는 마포 사무실에서 차를 끌고 나와 경기도 문산까지 자유로를 저녁 내내 뱅뱅 돌았다. 우는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었다. “여기서 다 울고 가자. 오늘로 눈물은 끝이다”는 생각으로 운전대를 붙들고 엉엉 울었다. 스무 번쯤 돌다보니 더 이상 눈물이 안 나오더란다.

그는 일이 터지자마자 그의 이름을 건 케이블방송 tvN의 ‘김미경쇼’를 하차했다. 주변에선 “너답지 않게 너무 빨리 포기한 것 아니냐”고 말렸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강의는 신뢰가 중요하다. ‘원장님 강의 듣고 4시 반에 일어나기 시작했다’ ‘일터를 꿈터로 만들라는 말을 듣고 회사를 때려치우려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등등 강의를 들은 사람들을 만나면 나도 깜짝 놀랄 정도로 내 말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논문표절 의혹은 논문으로 먹고사는 교수들의 표절보다 더 큰 실망이었을 거다. 그것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강사와 청중은 1대 다수가 아니라 1대 1의 관계이다. 그들에게 더 이상의 실망을 주기 전에 멈춰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멈춰 선 다음 집필실에 쭈그리고 앉아 고민에 들어갔다. 하루에도 마음은 수십 번 지옥을 넘나들었다. 감정기복이 심한 그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 직원들이 24시간 돌아가며 지켰다. “기왕에 생긴 일, 수습하자고 생각했다. 김미경이 사라질 수 없듯이 논문표절이라는 꼬리표는 70살이 돼도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거다. 평생 끌고 가야 할 수레라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유를 알아야 했다. 해석을 해야 데리고 살 수 있지 않겠나. 그러려면 논문을 다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지난해 3월 9일 경희대 평화의전당에서 있었던 ‘드림온’ 토크콘서트. 4500명의 청중 앞에서 김미경 원장이 강연을 하고 있다.
지난해 3월 9일 경희대 평화의전당에서 있었던 ‘드림온’ 토크콘서트. 4500명의 청중 앞에서 김미경 원장이 강연을 하고 있다.

그는 인생을 순식간에 폭파시킨 폭탄의 뇌관을 들췄다. 그는 “문제가 된 재인용 부분을 보니 얼마나 소홀하고 허술했는지 나도 웃음이 나오더라. 올 것이 온 거였다. 운명을 순리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일이 다 꼬인다. 순리로 받아들이고 일주일 꼬박 들어앉아 원문을 찾아가면서 논문을 고쳤다. 내 실수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했다”면서 “내가 생각해도 기특한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문제를 들여다본 이후 그가 내린 해결책은 ‘공부’였다. 그동안 꿈만 이야기하면서 호통 치는 ‘독설언니’에 스스로도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3개월 일정으로 미국 어학연수를 떠났다. 그는 “30년 가까이 죽어라고 벌었지만 나를 위해 돈 쓸 기회가 없었다. 평생 꿈이었던 미국 유학의 기회가 온 것이다. 사람마다 아껴놓은 이벤트가 있다. 운명의 시계가 울릴 때가 오더라”고 했다.

3개월 동안 학원 다니고 과외수업 받고 숙제하고 2~3시간 자면서 고3 수험생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 방 안 사방 벽에 전지 붙여놓고 영어단어 써가며 외웠다. 덕분에 뉴욕의 기억은 학원 오가며 타고 다닌 지하철의 지린내밖에 없다. 뉴욕을 독서실로 만든 덕분에 어느 날 미국 드라마 ‘프렌즈’를 틀어놓고 설거지를 하는데 대사가 귀에 쏙쏙 들어오더란다. 너무 좋아 방에서 혼자 펄쩍펄쩍 뛰었다. 그가 영어공부에 매달리는 이유는 베트남, 필리핀 등 꿈이 필요한 나라 밖 젊은이들에게도 강연을 하고 싶어서다. 그는 “3개월이 3년 같은 시간이었다”면서 “일생의 사건이 일생의 꿈과 연결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면서 그는 꿈과 운명은 결국 같은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인생을 견뎌야 할 때는 꿈으로 오고, 나를 다스려야 할 때는 운명으로 온다. 인생은 결국 해석에 달렸더라. 아들이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자신에게 맞는 음악공부를 찾아 일본으로 떠났다. 자퇴라는 운명으로 세게 맞았는데 어느새 꿈으로 바뀌어 있더라. 내가 두드려 맞은 운명도 10년 후엔 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고여 있던 콘텐츠를 큰 충격으로 흐르게 한 셈이니 오히려 약이 되고 고마운 일이 됐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나이 50살에 꿈만 이야기하고 있을 뻔했는데 꿈과 운명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게 돼 이런 다행이 없다. 지금은 내 기사를 쓴 조선일보 기자에게 밥이라도 사주고 싶은 마음이다.”

삶이 순환하는 이치를 알고 싶어 미국에서 돌아와 직원들과 함께 명리학도 공부했다. 그는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울 때, 자신의 의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는 공부를 해라. 마음을 해석할 수 있는 힘이 생기면 마음을 바꿀 수 있다”면서 “마음을 내려놓는 것과 내려앉는 것은 다르다. 마음을 비우고 집착을 내려놔야 하는데 보통 사람들은 집착은 놔두고 자신을 내려놓더라”고 말했다.

그도 마음을 내려놓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위로의 말들 중에 특히 “김 원장, 다 내려놔”라는 말에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려놓으라’는 말이 ‘내려앉으라’는 말처럼 들렸다. 그동안 쌓아온 커리어, 자존심, 방송¡¦ 하나라도 없어지면 죽을 것 같던 것들이 전부 무너졌는데 더 이상 뭘 내려놓으라는 건가. 그런데 아니었다. “내려놓을 것인가, 내려앉을 것인가는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천지차이다. 스스로 내려놓으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고 끝을 알 수 있지만 끌려 내려가다 보면 끝을 몰라 불안하고 두려움에 갇힌다. 다 내려놓아도 ‘나’와 ‘시간’은 남지만 불행이라는 감정에 붙잡혀 있으면 시간마저 없어지더라. 그때 비로소 내려놓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막상 내려놓고 두 손에 움켜쥔 것을 놓고 보니 자유로워진 손으로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김밥으로 허겁지겁 때우던 끼니 대신 가족끼리 오붓하게 밥을 먹고 있었고, 그토록 하고 싶던 영어공부도 했고, 마음을 어지럽혔던 감정을 거르고 난 자리엔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무엇보다 마음고생한 시간들은 새로운 콘텐츠가 돼서 머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것만 사랑했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내려놓고 나서야 알았다”고 했다. 값비싼 수업료를 치렀지만 계산기를 두드리자면 그는 남는 장사를 한 셈이다.

힘들었을 때 그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말은 뭐였냐고 물었더니 “우리 아버지가 카톡으로 보낸 메시지였다”고 답했다. 문자도 못 보내던 아버지가 딸 때문에 카카오톡에 가입하고 메시지 보내는 법을 배웠더란다. 아버지의 메시지는 짧았다. ‘미경아, 댓글 보지 마라. 내가 다 봤다. 어제랑 똑같다.’

“그래도 상처받으면서 댓글을 보게 되더라. 아픈 말도 들어야지 피해 다니면 비겁하다. 인욕정진(忍辱精進)이라고 자꾸 보다 보니 그것도 괜찮아지더라. 그런데 진짜 아버지 말씀대로 어제랑 똑같더라.” 그가 호탕하게 웃더니 덧붙였다. “옛날에는 좋은 것만 보고 싶었는데 지금은 나쁜 것도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트윗에 누군가 ‘법륜 스님, 김미경 강사, 강신주씨 모두 내게는 굉장히 폭력적인 사람들이다. 호통으로 깨달음을 주는 현명한 어른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호통이나 깨달음은 필요 없고 내 문제에 대한 존중이나,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무관심이 낫다’고 써놨더라. 이 직업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고민하게 한 글이었다.”

“호되게 당하고 나면 다른 길을 모색해 볼 법도 한데 돌아오고 싶었느냐”고 묻자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나는 강연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타고난 것 같다. 현장에 서면 청중들의 마음을 한 시간 이내에 다 느낄 수 있다. 화두를 던진 후 깨달았다는 느낌이 오고 박수가 터지면 울컥하면서 그렇게 신날 수가 없다. 죽을 때까지 좋은 선생으로 강연 무대에 서고 싶다. 그것이 바로 ‘나’다.”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무대 위에 활개를 치며 나타난 ‘스타강사 김미경’을 기억하지만 사실 그는 노력파다. 개그맨 뺨치는 엄마의 입심과 낙천성을 물려받고, 엄마의 양장점에 모인 아줌마들의 수다로 내공을 쌓았지만 피아노학원을 운영하다 강사가 되겠다고 나섰을 때는 무모한 모험이었다. 20여년 전 그는 강의 계획서를 만들어 모든 기업에 제안서를 냈다. 한 기업에서 노력을 가상히 여겼는지 “한번 해봐라”는 연락이 왔다. 밤새 강의내용 달달 외우고 몸짓 발짓 연습한 첫 강의는 다행히 반응이 좋았다. 그렇게 한 계단씩 오르다 보니 어느 순간 자신도 부담스러운 정도로 높이 올라가 있었다. “사실 나도 불안한 느낌이 왔다. 너무 열광하면 기대가 커지고 거품이 있게 마련이다. 조그만 것에도 터지게 돼 있었던 것이다.”

“복귀에 대한 부담은 없었냐”는 질문에 그가 잠시 멈칫하더니 “어차피 넘어야 할 고비라고 생각한다. 1년간 내가 부딪쳤던 시간을 책으로 쓰면서 나에게 온 운명에 대해 해석하고 정리했다. 책이 완성이 안 되면 안 나오려고 했다. 어설프면 사람들에게 들키게 돼 있다. 쓰다 보니 내 상태가 괜찮더라. 작년 12월 31일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나에게 1년 동안 수고했다’고 말해줬다. 살아 있어서 가능했던 거라고, 살아 있는 것만큼 뜨거운 것은 없다. 써놓고 보니 멋있어서 책 제목(‘살아 있는 뜨거움’)으로 하게 됐다”고 답했다.

책에서 그는 운명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시계추가 왼쪽과 오른쪽을 오가듯이 우리들 각자에게는 불행과 행복 사이를 수없이 왔다갔다 하는 운명의 추가 매달려 있다. 운명의 추는 어디서 보느냐가 중요하다.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추의 끝에 매달려 있으면 제대로 볼 수 없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의 상황만 좌우로 움직일 뿐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운명이 움직일 뿐 내가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오늘도 나는 내 운명의 추의 꼭대기에서 좌우로 움직이는 추의 흐름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한다. ‘지금의 현재는 다음에 올 것의 반대 경험일 뿐이다.’”

그도 한때는 운명의 추에 따라 흔들렸지만 이제는 추의 정중앙에서 추의 움직임을 내려다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불행과 상처는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지나가도록 놓아두는 것이라고 말했다. 돌아온 그를 맞는 여론의 추가 어느 쪽으로 움직일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불행과 상처의 시간을 녹여 자산으로 만들어낸 ‘언니’는 더 강해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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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순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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