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페레스 전 이스라엘 대통령이 지난 1월 12일 예루살렘 의회에서 친구였던 샤론 전 총리의 시신이 담긴 관 앞에 조화를 놓고 있다. ⓒphoto 신화
시몬 페레스 전 이스라엘 대통령이 지난 1월 12일 예루살렘 의회에서 친구였던 샤론 전 총리의 시신이 담긴 관 앞에 조화를 놓고 있다. ⓒphoto 신화

올 초부터 이스라엘 특파원으로 있으면서 시몬 페레스(91) 대통령을 공식석상에서 몇 번 마주할 기회가 있었다. 구순(九旬)의 노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그의 연설은 힘이 있었고 사람들을 주목시켰다. 홀로코스트(2차 대전 유대인 대학살) 생존자 가족들을 만나거나 일선 부대를 방문해 젊은 군장병들을 위로하던 페레스 대통령의 얼굴은 늘 온화한 미소로 일관하며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보여주곤 했다.

7월 말 7년 임기를 끝내는 페레스 대통령에 대한 원고를 주간조선으로부터 청탁받은 것은 꽤 오래전이었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이스라엘의 대표적 온건파 정치인이 살아온 법에 대해 써달라는 주문이었다. 하지만 뜻밖의 변수가 생겼다. 7월 8일부터 이스라엘 정부는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무장조직 하마스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고 전쟁은 현재 진행 중이다. 점점 격화되는 양측의 유혈충돌을 취재하는 사이 TV와 신문에는 강경파인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나 모셰 얄론 국방장관, 이스라엘 방위군(IDF) 사령관 같은 실세들의 얼굴이 도배되다시피 했고 어느 순간부터 온건파 페레스 대통령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지난 7월 24일 예루살렘에 있는 의회 크네셋에서 페레스 제9대 대통령의 이임식과 레우벤 리블린 제10대 대통령의 취임식이 열렸다. 텔아비브 집에서 우연히 TV 채널을 돌리다 페레스 대통령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힌 것을 보고 나서야 이·취임식이 그날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정도였다. 그때까지 이스라엘 내부의 모든 관심과 에너지는 당연하게도 하마스와의 교전에 집중되고 있었다.

공식 퇴임을 몇 시간 앞둔 페레스 대통령의 얼굴 표정은 다소 무거워 보였다. 66년 이스라엘 건국 역사의 산증인이자 이스라엘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회원로였던 페레스 대통령의 이임식이 하필이면 사상 최악의 희생자를 내고 있던 유혈충돌 한가운데 열렸기 때문이다.

페레스 대통령의 이임식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도 가자지구에서는 이스라엘군의 탱크와 하마스의 로켓포가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스데롯 등 이스라엘 남부 도시에서는 하마스의 로켓포가 떨어지는 것을 알리는 공습 사이렌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그때까지 민간인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희생자는 1000명에 육박했고 40명의 이스라엘 군인도 교전 도중 숨졌다. 예상보다 많은 이스라엘 군인의 피해에 충격을 받은 이스라엘 사회는 전장에서 숨진 40여명 군인들을 추도하고 애도하느라 어느 때보다 무거운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정치권은 페레스 대통령의 이임식을 연기하는 대신 오히려 행사를 최소화하며 하마스에 대한 전투 의지를 북돋우는 기회로 삼았다. 의회는 가자지구 국경 근처에 인접해 그간 하마스의 로켓포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이스라엘 남부 도시의 시장(市長)들을 대거 크네셋으로 초청해 결연한 의지를 과시했다. 전통적으로 대통령 이·취임식에 열렸던 칵테일 파티 행사는 모두 취소됐다. 음악 연주도 일절 금지됐다.

숨진 군인들에 대한 묵념으로 시작한 행사에서 페레스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의 마지막 연설을 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현직 전 세계 지도자 중 유일하게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페레스 대통령이었던 만큼 평화의 메시지를 잊지 않았다. “가자지구의 시민들은 이스라엘의 적이 아닙니다. 아랍인들 역시 우리들의 적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적은 오직 하마스의 로켓포뿐입니다.”

페레스 대통령은 이날 “군사적 승리보다 평화가 진정한 이 땅의 안보를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약 20분 뒤 페레스 대통령의 연설이 끝나자 의회에 모인 이스라엘의 모든 정치 지도자들과 국민들은 존경의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이임식은 끝났다. 별다른 행사는 없었다.

이후 신임 대통령 리블린의 연설은 훨씬 길었고, 카메라에는 본회의장에 앉아 있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와 모셰 얄론 국방장관의 굳은 표정이 더 많이 잡혔다. 그날 밤에도 이스라엘군과 하마스는 가자지구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미국 신문 워싱턴포스트는 이임식에 대해 “페레스의 정치적 위상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어떠한 팡파르도 없이 끝났다”고 평했다.

이임식이 끝난 후 이스라엘 언론들은 저마다 “페레스는 내일, 70년 만에 처음으로 공직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전했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부터 벤 구리온 이스라엘 초대 총리의 보좌관으로 공직에 입문한 페레스는 제10대 신임 레우벤 리블린 대통령이 평했듯 “자신의 운명을 이스라엘이란 국가 자체의 운명과 결부지어 온 인물”이다.

1923년 폴란드에서 태어난 페레스는 1934년 가족과 함께 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한 뒤 소년 시절부터 이스라엘 시온주의(Zionism·고대 유대인들이 고국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 유대민족주의) 청년 운동을 했다. 1951년부터 국방부 관료로 일한 페레스는 1959년 처음 크네셋에 진출했다. 이후 2007년 대통령에 선출되기까지 총리로 두 번 일하고 외무부 장관 두 번, 국방부 장관 두 번, 재정부 장관 한 번 등 내각의 주요 장관직만 12번을 수행한 이스라엘 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페레스가 이스라엘의 대표적 온건파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1993년 팔레스타인의 자치권을 인정해준 ‘오슬로협정’ 때문이었다. 당시 이츠하크 라빈 총리 정부에서 외무장관으로 일하던 페레스는 야셰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과 물밑 교섭을 통해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양국 간의 역사적 평화 협정을 맺었다. 이듬해인 1994년 이 공로로 페레스는 라빈 총리, 아라파트 의장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한다.

팔레스타인의 자치권을 인정해준 오슬로협정의 여파는 상당했다. 강경파인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뒷받침하기는 했지만, 불안정한 안보 상황 탓에 전통적으로 강경파가 득세해 온 이스라엘 정치권에서 페레스에 대한 비난은 격했다. 야당 지도자였던 베냐민 네타냐후 현 총리는 당시 페레스를 가리켜 “네빌 챔벌레인 전 영국 총리보다 더 나쁘다”고 비판했다.

대표적 유화론자인 챔벌레인 전 영국 총리는 1938년 히틀러로부터 “체코슬로바키아가 국경선 협상에 나선다면 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영국 의회에 이를 곧이곧대로 보고했다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인류 역사를 바꾼 거짓말에 당했다”는 비웃음을 샀다. 네타냐후는 챔벌레인의 온건한 성향과 페레스를 비교하며 언제라도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을 배신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지난 6월 8일 바티칸을 방문해 프란치스코 교황(가운데), 압바스 팔레스타인 정부수반(왼쪽)과 만난 페레스 당시 대통령. ⓒphoto AP
지난 6월 8일 바티칸을 방문해 프란치스코 교황(가운데), 압바스 팔레스타인 정부수반(왼쪽)과 만난 페레스 당시 대통령. ⓒphoto AP

급기야 1995년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공개연설 도중 평화 협정에 반대하는 이스라엘 우파 청년의 총탄에 맞고 숨을 거뒀다. 1996년 직선으로 총리를 뽑게 됐고, 그때까지 라빈 총리를 대신해 총리직을 대행하고 있던 페레스와 보수정당 리쿠르당의 대표 네타냐후가 맞붙었다. 이미 총선 직전 팔레스타인의 소행으로 보이는 자살 폭탄 테러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며 이스라엘 내부의 분위기는 강경해질 대로 강경해진 상태였다. ‘강한 이스라엘’을 모토로 내세워 온 네타냐후는 선거운동 내내 “페레스는 우유부단하다”고 공격하며 1%포인트 득표율 차로 승리했고 47세에 최연소 총리가 됐다.

강경파 네타냐후 정권이 들어선 후 2000년대 초반까지 일선 정치에서 물러난 페레스는 집필 활동과 언론 기고에 전념했다. 오슬로협정은 페레스에게 영광이면서도 상처가 됐다. 일부 강경파는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인정해주지 않았더라면 이후 수많은 테러로 인한 유대인의 희생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논리로 오슬로협정을 비판했다. 하지만 페레스는 “오슬로협정은 실수가 아니었다. 오슬로협정이 아니었다면 팔레스타인에는 오로지 테러 세력만 남았을 것”이라며 맞섰다.

페레스를 우유부단하다고 공격했던 네타냐후였던 만큼 2007년 페레스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2009년 네타냐후가 두 번째 총리직을 시작하면서 둘 사이의 노선 갈등이 예상돼 왔다. 특히 안보 관련 이슈에서 네타냐후는 보수우파를 대변하며 강경 노선 일변도였고 페레스는 네타냐후 총리 몰래 평화 협상을 이끌어내려 시도할 정도였다.

온건 성향인 마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자치정부(PA) 수반과 페레스는 양국 고위 인사 중 유일하게 그나마 관계가 돈독한 사이였다. 페레스가 압바스보다 12살이 많다. 페레스와 압바스가 영국 런던과 요르단 암만에서 비밀 협상을 벌였다는 보도가 수차례 나왔다. 2011년에는 두 사람의 비밀 접촉이 성과 없이 끝났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자 압바스 수반이 직접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페레스 대통령이 이스라엘 정부가 협상을 원하지 않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약속을 지키지 못하겠다며 사과의 뜻을 전해왔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에서 대통령직은 외교 사절로서의 상징적 의미가 강한 만큼 실권을 쥐고 있는 네타냐후 총리 체제에서 페레스가 활동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 얼마나 협소한지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지난해부터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의 주도 아래 9개월간 이어졌던 이·팔 평화협상은 네타냐후 총리의 강경 노선 아래 지난 4월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 이후 5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각각 방문했고, 이 자리에서 페레스 대통령과 압바스 수반을 바티칸 평화기도회에 초청했다.

6월 8일 세계의 이목은 바티칸 교황청으로 쏠렸다. 외신들은 임기를 두 달여 남긴 평화지도자 페레스와 평소 사이가 좋았던 온건파 압바스 수반이 꺼져가던 평화 협상의 불씨를 바티칸에서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들을 늘어놨다.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직접 중재에 나선 만큼 그러한 기대들은 그럴 듯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 현지에서는 누구도 페레스 대통령의 바티칸 평화기도회 참석이 이·팔 평화 협상에 진전을 가져올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외무부 관계자는 “퇴임을 눈앞에 둔 노(老) 대통령이 임기 말 상징적 차원에서 바티칸 평화기도회에 참석한 것일 뿐 양국 관계에 실질적 영향을 끼칠 것이라 보는 이스라엘 국민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바티칸 평화기도회 한 달여 만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소년들이 각각 납치돼 살해됐고 결과는 현재 보는 대로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후 최악의 사상자를 내고 있는 유혈충돌이 계속되고 있다. 교황은 여전히 바티칸에서 평화를 호소하고 있고, 페레스는 이임식 하루 전날까지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과 만나 평화적 휴전 협정을 논의했다. 하지만 페레스가 퇴임 전 대통령으로서 가장 많이 보낸 일정은 결국 숨진 이스라엘 군인들의 유가족을 가가호호 방문하며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이었다.

페레스의 뒤를 이어 10대 대통령에 취임한 레우벤 리블린은 네타냐후 총리와 똑같은 보수당 리쿠르당 소속으로 팔레스타인 독립을 반대하고 유대인 정착촌 확대 건설을 지지하는 강경파다. 이스라엘 언론들은 리블린이 페레스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을 것이라 내다보고 있다. 평화 협상을 비롯한 정치·외교 영역은 네타냐후 총리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사회 내부 갈등을 통합하는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리블린 신임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유대인, 아랍계, 드루즈, 부자와 가난한 자, 종교인과 비종교인 등 이스라엘의 모든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비록 페레스 대통령이 준전시(戰時) 상황 속에서 초라한 퇴임을 맞았지만 이스라엘 국민과 언론에 각인돼 있는 그의 업적은 분명하다. 투자회사에 근무하는 단 크리볼로티(33)씨는 “페레스는 좋은 대통령이자 훌륭한 외교관이었다”며 “이스라엘의 대외 위상을 누구보다 높였다”고 했다. 전시 상황에서 페레스의 퇴임이 다소 주목받지 못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정파와 정치색에 상관없이 크네셋에서 의회 의원 모두가 퇴임하는 대통령에게 박수를 쳐준 것은 흔치 않았다”며 “페레스는 충분히 국민에게 존경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이스라엘의 영자신문 예루살렘포스트는 “페레스의 가장 큰 업적은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영원한 평화 협상 파트너는 하마스가 아닌 압바스라는 점을 알려준 것”이라고 지적했다. 강경파 네타냐후 총리 역시 압바스 수반과는 필요할 경우 전화통화도 할 정도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자체를 전혀 인정하지 않던 과거와 달리 가자지구를 통치하던 무장조직 하마스와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통치하는 압바스의 파타를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번 분쟁은 하마스와 파타가 지난 6월 공동정부 구성에 합의하고 미국조차 이를 인정해 주는 듯한 분위기가 있자 네타냐후 총리가 이에 대항해 하마스를 타격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페레스의 퇴임 하루 전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렸다.

“내 친구이자 변함없는 평화의 수호자인 페레스 대통령의 퇴임을 축하합니다. 그간 당신이 보여준 리더십에 감사를 표합니다.”

페레스 역시 트위터에 답글을 남겼다.

“내 친애하는 친구여, 감사합니다. 우리가 함께 일하게 될 더 많은 시간들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페레스는 퇴임 후 텔아비브에 자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 ‘페레스 평화센터’ 사무실로 출근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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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국희 조선일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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