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Getty Images / 이매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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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을 사이에 둔 영·미 매체에 기사가 나면 무조건 독자들의 관심을 끄는 단골 인물들이 있다. 영국의 다이애나 세자빈이 1위이고 마릴린 먼로, 재클린 케네디, 존 F 케네디 등이 뒤를 잇는다. 그런데 이들 못지않게 항상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 또 있다. 바로 영국 총리를 지낸 윈스턴 처칠(1874~1965)이다. 최근 처칠과 관련된 두 건의 뉴스가 공교롭게도 같은 날 언론에 실려 영국이 들썩였다.

지난 1월 12일 개봉되어 아직도 영국 전역의 극장 스크린을 점하고 있는 영화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가 3월 4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과 분장상을 받았다는 소식이 우선 하나다. ‘다키스트 아워’와 함께 2차대전 덩케르크 상륙작전을 다룬 ‘덩케르크’도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편집상·음향상과 음향편집상을 받았다. 처칠과 덩케르크 철수 작전을 함께 다룬 영화 두 편이 나란히 아카데미 수상작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 특히 작품상과 대개 같이 가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은 ‘다키스트 아워’에서 완벽하게 처칠 연기를 해낸 게리 올드만에게 돌아갔다.

다른 하나의 뉴스는 영국을 완전히 뒤집어놓았다. 일요일 황금시간대인 3월 4일 저녁 8시 영국 상업방송인 ‘채널4’에서 방영된 ‘처칠의 비밀 염문(Churchill’s Secret Affair)’이 그것이다. 내용은 1933년 억만장자들의 별장이 운집한 지중해 프렌치 리비에라 해변을 무대로 벌어졌던 처칠의 염문이다. 당시 59세였던 처칠과 영국 상류 사교계에 온갖 스캔들을 다 뿌리고 다니며 ‘파티걸’로 유명하던 26살 연하의 도리스 캐슬로시와의 사이에 4년에 걸친 비밀 염문이 있었다는 것이 주 내용이다. 도리스는 당시 만나던 남자들 이름만 적어도 명사록이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자유분방한 여인이었다. 심지어는 찰리 채플린도 그녀의 명단에 들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처칠은 비록 하원의원 신분이었지만 가장 어렵던 시기를 겪고 있었다. 처칠 전기학자들이 흔히 말하는 이른바 ‘야인 시절(The Wilderness Period)’을 보내고 있었다.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는 미국인 역사학자 와렌 독터와 영국인 처칠 연구자 리처드 토이 교수가 처칠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케임브리지대학교 ‘처칠칼리지’에서 찾아낸 처칠의 개인비서 존 콜빌 경의 증언 테이프를 기초로 하여 만들어졌다. 이 테이프는 1985년에 만들어졌으나 처칠 명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자료라고 판단돼 그동안 서류창고에 파묻혀 있었다. 이 테이프의 존재는 처칠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알려져 있었고 거기에 담긴 증언들도 알 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확실치 않은 개인비서 한 명의 단순 증언이라는 이유로 처칠의 염문은 세인들의 관심 밖에 있었다. 그런데 이번 다큐멘터리는 두 학자가 철저하게 뒤진 처칠 관련 자료들이 뒷받침하고 있어 특별한 관심을 받았다.

유화 그림으로 남은 불륜

예를 들면 미국 재벌과 결혼해 미국으로 건너간 도리스가 이혼당하고 돈도 다 떨어져 뉴욕에서 오도가도 못 하고 있던 차에 처칠을 만난 기록이 나온다. 1942년 미국의 지원을 받기 위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러 워싱턴을 방문한 처칠이 SOS를 청한 도리스를 만난 것이다. 전쟁 중이던 국가 수반으로 외국을 공식 방문한 와중에도 처칠은 도리스와 만나 저녁식사까지 했다. 다큐멘터리는 루스벨트의 보좌관이 도리스가 영국으로 돌아오기 위한 항공편을 주선해준 기록까지 들춰냈다. 당시는 2차대전 중이라 민간인이 대서양을 횡단하려면 돈이 있어도 쉽지 않은 때였다. 결국 처칠이 도리스라는 여인을 위해 미국 대통령에게 개인적인 부탁을 한 것으로 유추해도 될 만큼 둘의 관계는 보통 사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거기다가 처칠이 망중한에 취미로 그렸던 유화 얘기도 나온다. 처칠의 그림 중 부인 클레멘타인을 그린 것은 단 한 점밖에 없었던 반면 도리스를 그린 그림은 세 점이나 있었다는 사실이 나온다. 그 세 점 모두 긴 안락의자에 속옷을 입고 비스듬하게 누워 있는 내밀함이 완연한 구도이다. 도리스는 처칠의 도움으로 영국으로 어렵게 돌아왔으나 바로 수면제 과용으로 42세의 나이로 죽는다. 사망 후 처칠의 개인보좌관이 도리스의 남동생을 수차례 총리 관저에서 면담한 기록도 나온다. 다큐멘터리는 도리스를 그린 처칠의 유화가 언론에 새나가는 사태를 막기 위한 회수 작업이라고 추정한다. 다큐멘터리는 처칠이 창피를 무릅쓰고 도리스의 영국 귀환을 추진한 이유도 도리스라는 여인의 존재가 미국 언론에 노출되는 사태를 막으려는 사전 예방 조치였다고 해석했다. 다큐멘터리에서 도리스의 질손녀 카라 델리빈은 “도리스와 처칠의 염문은 우리 집안에서는 다 아는 이야기였다”고 증언했다. 카라 델리빈은 젊을 때 영국인 모두가 아는 최고 모델이어서 그녀의 이 증언에는 무게가 실렸다. ‘즐거웠다. 내년 여름에 다시 보자’라는 처칠의 자필 편지와 함께 도리스가 처칠에게 쓴 ‘나는 이제 더 이상 위험하지 않으니 한번 만나자’라는 의미심장한 편지도 다큐멘터리는 찾아냈다. 도리스의 이 편지는 입각한 처칠이 그녀와의 관계를 끊자 쓴 것이다.

처칠의 염문과 관련해서는 더욱 충격적인 얘기도 몇 개 더 있다. 도리스가 처칠을 만나기 1년 전인 1932년 처칠의 맏아들인 랜돌프 처칠과 염문이 있었다는 얘기다. 당시 도리스는 32세였고 랜돌프는 11살 연하였다. 다큐멘터리가 주장하듯이 아버지 처칠이 도리스와 깊은 관계였다면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인과 1년을 사이에 두고 사귀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다큐멘터리에서 언급하지 않은 랜돌프와 처칠의 또 다른 막장 스토리가 하나 더 있다. 랜돌프가 2차대전 참전을 하는 사이 랜돌프의 아내이자 처칠의 며느리인 파멜라가 영국으로 건너온 미국 특사와 연인이 됐다는 얘기다. 당시 미국의 원조를 간절하게 원하던 처칠은 미국 특사 아브렐 해리만의 환심을 사야 할 긴박한 상황이었는데, 해리만과의 저녁식사 자리에 며느리를 데려갔다가 결과적으로 며느리를 부정(不貞)으로 이끌었다는 스토리다. 당시 해리만은 파멜라보다 29살이나 많았다.

처칠이 그린 도리스 캐슬로시의 초상화. ⓒphoto 조선일보
처칠이 그린 도리스 캐슬로시의 초상화. ⓒphoto 조선일보

처칠 며느리와 클린턴의 인연

하여튼 처칠은 며느리의 부정을 방조한 덕분인지 미국으로부터 고급 정보를 얻게 됐고 결국 자신이 원하던 미국의 원조를 얻는 데도 성공했다. 나중에 전장에서 휴가차 귀가한 랜돌프는 아내의 부정을 알고는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고 절연하는 상황까지 가버렸다. 이에 대해서는 랜돌프가 먼저 바람을 피워서 파멜라가 복수했다는 설도 있는데, 파멜라는 랜돌프와 이혼 후 런던 사교계의 꽃으로 활약하다가 해리만과 결혼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 사교계의 거물이 된 파멜라의 스토리도 흥미롭다. 그녀가 나중에 미국 대통령이 된 빌 클린턴의 능력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클린턴의 후견인이 됐다는 사실 때문이다. 파멜라는 클린턴 대통령 시절 프랑스 대사로 임명돼 재직 중 파리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사망 소식을 들은 클린턴은 대통령 전용기를 보내 유해를 싣고 오기까지 했는데 클린턴은 그녀의 장례식에서 “나를 만든 건 파멜라였다”는 애조 띤 조사를 했다.

영국인 사이에서는 “유럽이 2차대전 중 두 명의 여인에게 큰 신세를 졌다”는 말이 있다. 미국의 참전 없이는 유럽이 2차대전에서 이길 수 없었는데 미국의 참전에 두 여인이 큰 힘을 보탰다는 것이다. 그중 한 명이 해리만에게 베갯머리 송사를 한 파멜라이고, 또 다른 한 명이 처칠의 어머니다. 알다시피 처칠의 어머니는 미국인이다. 그래서인지 처칠의 영어 발음에 미국식 발음이 섞여 있었고 이 때문에 미국인들 사이에서 처칠의 인기가 높았는데 결국 이것이 미국의2차대전 참전 여론을 형성했다는 의미다.

이번에 다큐멘터리가 터져나오기 전까지 처칠 부부는 영국의 전형적인 잉꼬부부로 유명했다. 처칠은 영국에서 30명밖에 안 되는 세습 공작 손자이고, 영국 차기 총리 후보 1순위인 재무장관 아들로 태어났다. 비록 유복하게는 컸으나 종손이 아니기 때문에 작위는 없었다. 오히려 나중에는 재산도 거의 없는 무일푼 신세가 됐다.(처칠의 정식 이름은 윈스턴 레오나르드 스펜서-처칠이다. 성이 그냥 처칠이 아니라 스펜서-처칠이다. 눈 밝은 독자는 어디선가 본 듯한 이름이라고 느낄 수 있다. 바로 다이애나 전 세자빈의 성이 스펜서이다. 그래서 다이애나 공주는 처칠의 손녀뻘이다. 촌수로는 12촌이니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깝다.)

처칠처럼 작위도 없고 재산도 변변치 않은 영국 귀족들은 보통 비슷한 지위의 돈 많은 집 딸과 정략결혼(marriage of convenience)을 한다. 그런데 처칠은 34세의 노총각 상태에서 11살 연하의 프랑스어 선생인 클레멘타인과 결혼했다. 클레멘타인 역시 재봉질로 생계를 유지하던 어려운 처지였지만 처칠과 사랑 끝에 결혼했다. 이런 사연은 처칠 부부를 항상 로맨틱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처칠의 생가는 처칠 가문의 종가가 있는 옥스퍼드 근교 블렌하임 궁전인데 처칠이 클레멘타인에게 청혼한 이곳의 ‘다이애나 정자’는 영국 젊은이들에게 청혼 장소로 인기가 높다. 처칠은 64년간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 항상 부인을 동반하고 다녔다. 특히 2차대전 중 공습으로 무너진 현장이나 군수품 제조 공장을 방문할 때도 부인을 데리고 갔다. ‘처칠의 비밀 염문’ 다큐멘터리가 방영된 후 한 영국 언론인은 “정치인 처칠에 대한 우리들의 평가가 이로 인해 달라질 이유는 없지만 처칠의 결혼생활에 대한 우리들의 관점은 분명 달라질 듯하다”고 했다.

처칠과 도리스 캐슬로시. ⓒphoto 조선일보
처칠과 도리스 캐슬로시. ⓒphoto 조선일보

처칠은 영국인의 구세주?

죽은 지 50년도 넘은 한 정치인에 대해 이처럼 뜨거운 관심을 쏟아붓는 영국인들이 잘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처칠은 영국인에게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다. 또 영국인에게 있어 처칠은 사라진 과거의 인물이 아니다. 이번 다큐멘터리에서도 한 내레이터는 처칠을 ‘구세주(savior)’라고 지칭했다. 기독교도인 유럽인에게 ‘구세주’라는 말은 함부로 쓰는 말이 아니다. 진짜 구세주인 예수에게만 써야 정당한 말이다. 그런데 처칠은 예수와 같은 종교적 의미의 구세주는 아닐지 몰라도 현실의 구세주로 통한다. 영국인에게 처칠은 히틀러의 손에 넘어간 유럽은 물론 위험에 빠진 자신들을 구한 진정한 구세주임에 틀림없다. 오죽했으면 2002년 밀레니엄을 맞아 BBC가 전국 시청자 3만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 조사에서 처칠이 28.1%로 1등을 차지했을까. 지금도 영국에서는 국가적인 큰일이 생겨 현명한 혜안이 필요하면 ‘만일 처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기사가 늘 등장한다.

처칠은 두 번(1940~1945, 1951~ 1955)에 걸쳐 총리를 지냈지만 66세에 첫 총리가 되기 전에는 거의 사라져가는 별이었다. 정계에서는 물론 심지어 주변에서도 거의 실패한 구세대 인물로 치부했다. 나이도 나이였지만 주된 이유는 처칠의 지칠 줄 모르는 경고 때문이었다. 처칠은 독일에 대한 경고를 끊임없이 했고, 이 때문에 모두 시대착오적인 전쟁광으로 보았다. 처칠 눈에는 히틀러의 독일군 재무장 목적이 분명 유럽 점령이었지만 당시 영국의 정치인을 비롯해 독일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던 유럽 각국 정치인들마저도 히틀러와의 평화공존이라는 헛된 희망에 매달려 있었다.

이때 처칠은 유명한 말을 남긴다. “유화주의자들은 자신은 제일 나중에 잡아 먹힐 거라고 희망하면서 악어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들이다.” 그는 이웃이 무력으로 자국을 위협하는데 그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힘이 없는 상태에서 유지되는 평화가 얼마나 허망하고 위험한지를 줄기차게 경고했다. 처칠은 “우리는 전쟁과 수치(羞恥) 중 하나를 머지않아 선택해야 한다”면서 총리 체임벌린의 ‘유화정책(appeasement policy)’을 비판했다. 물론 처칠의 주장은 당시 인기도 없었고 별 영향력도 없었다. 영국 조야는 체임벌린 총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히틀러에게 넘겨주고 받아온 뮌헨협정서에 환호했다. 이를 비판하는 처칠에게 당시 영국 정치인들은 “그럼 독일과 전쟁하자는 말이냐”고 따졌다.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지하철의 모든 승객이 “히틀러와 협상을 해야 하나”라는 처칠의 질문에 한결같이 “네버(Never)”라고 외치는 장면인데 실제 분위기는 그 반대였다. 모두들 겁을 먹고 독일과 전쟁을 하지 않고 어떻게든 피해 보자는 심리였다.

결국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하자 영국은 마지못해 선전포고를 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영국은 먼 동구에서 일어난 전쟁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머리를 모래 속에 파묻은’ 상태에서 평화 공존의 희망에 매달리며 8개월간 ‘유사전쟁(phoney war)’ 상태에 빠졌다. 당시 처칠은 “우리가 지금 평화를 생각하느라 빈둥대느니 차라리 싸워서 얻는 조건이 더 좋은 것”이라면서 전의를 가다듬자고 외쳤으나 허공에 지르는 고함일 뿐이었다.

영국이 환상에서 깨어난 것은 1940년 5월이었다. 독일이 적나라한 야심을 드러내면서 벨기에를 침공하자 드디어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히틀러에 대한 처칠의 예상이 맞아떨어지자 영국인들은 처칠의 입각을 원했다. 그러나 그때도 처칠은 모두가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사임하는 체임벌린도, 조지6세 왕도 싫어하고 심지어는 집권 보수당의 동료 의원들도 싫어했다. 이런 상황에서 거국내각에 참여키로 한 야당 노동당과 민주당이 처칠을 더 지지하는 이변이 일어났고 공무원과 군인들마저 처칠을 지지하기 시작하자 처칠의 집권은 누구도 막을 수 없게 됐다. 세상의 믿음이나 희망과는 달리 히틀러의 위험을 고집스럽게 경고한 것이 결국 그를 총리로 밀어올렸다.

처칠이 말년을 보낸 ‘차트웰’.
처칠이 말년을 보낸 ‘차트웰’.

처칠의 명연설이 준 효과

처칠의 명연설은 거의 대부분 2차대전 초기 한두 달 사이에 나왔는데 특히 덩케르크 작전 때 집중됐다. 덩케르크 작전이 끝난 1940년 6월 4일 처칠은 의회에서 철수가 성공적으로 끝났음을 국민들에게 보고하면서 유명한 연설을 한다. “어떤 대가를 치를지언정 우리는 해변에서 싸우고 상륙지에서도 싸울 것이다. 들판과 시가지에서도 싸우고 언덕 위에서도 싸울 것이다. 우리들은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치욕스럽고 곤혹스러운 철수작전을 언급하면서도 그는 결코 항복하지 않고 끝내 승리하리라는 확신에 찬 메시지를 국민들에게 주었다. 역사학자들은 바로 이 연설을 계기로 영국인들이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기 시작했다고 평가한다. 처칠의 명연설이 영국 국민들로 하여금 가장 치욕적인 순간에 역설적으로 승리를 자신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개전 초기의 이런 ‘근거 없는 자신감’이야말로 2차대전의 긴 고통을 견뎌내는 데 큰 힘이 되었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평이다.

처칠은 2주 뒤인 1940년 6월 18일 의회에서 또 명연설을 한다. 프랑스의 상황을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암흑의 시간(The Darkest Hours in French history)”이라고 묘사한다. 그러다가 연설 마지막에 가서는 “만일 대영제국과 영연방이 1000년을 이어간다면 그래도 사람들은 지금이 그들의 최고의 시간이었다(This was their finest hour)고 말할 것이다”고 한다. 한 연설에서 처칠은 나중에 너무나 유명해진 단어인 ‘Darkest Hour’와 ‘Finest Hour’를 같이 써서 명연설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처칠은 처참한 전쟁 와중에 국민들을 안심시키면서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었다. BBC 라디오를 통해 들려오는 처칠의 연설이나 의회 발언을 들으며 영국인들은 위안을 얻었다. 그래서인지 영국인들은 처칠에게 큰 빚을 졌다고 느낀다. 2차대전을 승전으로 이끈 것말고도 자신들을 안심시킨 말의 빚도 졌다고 느낀다.

처칠이 노벨상을 받았다면 대개 평화상이겠거니 여기지만 사실은 문학상이다. 처칠은 평생 생계를 저술에서 생기는 수입으로 이어갔다. 무일푼이었던 그가 하원의원이 된 후 12년 차 의원이 될 때까지도 세비를 받는 제도가 없었다. 지금도 영국 하원의원의 세비는 연 1억원에 불과하다. 정치를 소명(召命)으로 여기고 봉사의 뜻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처칠은 하원의원을 하면서도 열심히 글을 써서 돈을 벌었다. 귀족 집안 아들답게 비싼 시가를 피우고 코냑과 삼페인을 즐기며 심지어 몬테카를로를 출입하면서 도박에까지 빠진 탓인지 그는 평생 돈에 쪼들렸다. 몇 번의 파산 위기를 헝가리 출신 유대인 사업가의 도움으로 간신히 탈출하곤 했다. 그 사업가는 처칠에게 반대급부로 얻을 건 없지만 처칠만이 히틀러를 막아줄 거라는 믿음 때문에 수차례에 걸쳐 구해줬다.

처칠은 총리 사임 후 죽기 한 해 전 하원의원을 그만둘 때까지 런던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차트웰에서 10년간 지냈다. 막판에는 하원의원으로 재직했지만 거의 등원은 하지 않았다. 현직에서 사임한 고위 정치인의 전통대로 어디도 기웃거리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글만 썼다. 이 시기 거의 전문 화가 수준의 유화를 그렸고 ‘2차대전사’와 ‘영어를 쓰는 민족의 역사’라는 명저를 썼다. 이 책들로 처칠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특히 ‘2차대전사’는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어 현재 금액으로 거의 2000만달러의 인세를 그에게 안겼다. 그 덕분에 그는 일생 처음 돈 사정이 확 폈지만 말년에는 다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씀씀이 때문에 집마저 유지하기가 힘들 정도가 됐다. 결국 처칠은 자신과 직계가족은 살 수 있게 해달라는 조건으로 집을 내셔널트러스트에 내주는 비상조치를 취한다. 사실 여기에도 헝가리 출신 사업가의 도움이 있었다. 그가 집을 구입해 일단 처칠이 빚을 갚게 한 뒤 내셔널트러스트에 집을 기증했다.

차트웰은 영국의 정원이라는 캔트 지방의 언덕 위에 위치한 집이다. 벽돌공 노동조합 회원이 될 정도로 처칠이 심취했던 벽돌담 쌓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집 곳곳에는 처칠의 입김과 손길이 느껴진다. 처칠이 책을 썼던 방부터 각국 지도자들로부터 받은 선물, 그리고 훈장을 비롯해 각종 기념물들이 정말 알뜰하게 수집되어 있다. 거인(巨人)을 기리며 찾아오는 연간 23만명의 방문객을 이 집이 묵묵히 맞고 있다. 아직도 처칠을 숭앙하는 신봉자들에게 차트웰은 성지이다.

권석하 재영칼럼니스트·‘영국인 재발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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