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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9호] 2018.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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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시황제’ 설계자 왕후닝의 다음 구상

최유식  조선일보 중국전문기자 

▲ 지난해 12월 3일 중국 저장성 우전에서 개막한 세계인터넷대회에서 왕후닝 정치국 상무위원이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올해 중국 양회(兩會·전국인민대표대회와 중국정치협상회의)의 최대 정치 이슈가 된 중국 국가주석 임기제한 폐지 작업은 작년 9월에 본격화됐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공산당 정치국회의에서 장더장(張德江) 상무위원을 조장으로, 정치국원 리잔수(栗戰書)·왕후닝(王滬寧)을 부조장으로 하는 헌법개정소조를 구성했다고 한다.
   
   장더장이 이 소조의 조장을 맡은 것은 당연한 측면이 있다. 헌법 개정안은 국회 격인 전인대를 통과해야 하는데, 장더장이 전인대 상무위원장(국회의장 격)이기 때문이다. 리잔수 역시 한 달 뒤에 있을 제19차 당대회에서 상무위원으로 승진해 장더장의 후임이 될 예정이었던 만큼 그가 부조장을 맡는 것 역시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에 비해 공산당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인 왕후닝이 부조장을 맡은 것은 의외였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3월 7일자 기사에서 왕후닝이 ‘중국은 경제발전을 위해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신권위주의의 주창자였다는 점에서 그 답을 찾았다. 시 주석 장기집권의 길을 연 이번 헌법 개정안은 사실상 왕후닝의 작품으로, 그가 밑그림을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중국 현대화 위해 강력한 지도자 필요”
   
   “전후 일본과 한국·싱가포르 등이 현대화 건설과 경제발전에서 놀라운 성취를 이뤄낸 것은 권력 집중을 바탕으로 사회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했기 때문이다. 경제발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효율적인 정치 리더십이다.”
   
   개혁·개방 직후 경제 혼란 속에서 전국적으로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가 거세게 터져나온 1988년, 상하이 푸단(復旦)대학 학술지인 푸단학보(사회과학판)에 이런 내용을 담은 짤막한 논문 한 편이 게재됐다. 온 사회가 민주화 요구로 들끓던 시점에 중국 같은 거대 국가가 현대화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공산당의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현대화 과정 중 정치 영도 방식 분석’이라는 제목을 단 이 논문의 저자는 당시 33세의 푸단대 국제정치학과 교수인 왕후닝이었다.
   
   이 논문은 1986년 8월 상하이시 공산당 선전부가 간행한 ‘사상연구내참’이라는 잡지에 처음 실렸다. 자오쯔양 총서기가 취임한 1987년 말에는 중국 최고지도부에도 이 내용이 보고됐다고 한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95년 왕후닝은 장쩌민 당시 총서기에 의해 공산당 중앙정책연구실 정치조장에 발탁돼 ‘중난하이(中南海·중국 최고지도부의 집단거주지)의 책사’ 인생을 시작했다.
   
   
   국가주석 임기 폐지는 종신제의 부활?
   
   강력한 중앙집권적 리더십은 이후 왕후닝의 지론이었다. 비교정치학 전공자로 개발도상국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독재가 더 나을 수도 있다는 미국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의 정치발전이론 등에 큰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왕후닝은 1988년 8월 미국정치학회 초청으로 6개월간 미국 30여개 도시 20여개 대학을 돌아본 적이 있는데, 이때의 경험을 ‘미국은 미국을 반대한다’는 책으로 펴냈다. 그는 이 책에서 “정치체제란 그 나라의 역사·사회·문화적 조건과 맞아야 한다”면서 “중국 같은 미개발국가에 서방의 민주제도를 그대로 이식하는 방식은 안 된다”고 썼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여러 국가의 구체적인 실패 사례를 들기도 했다.
   
   1993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국제토론대회에 참석했을 때도 함께 간 중국 동료들에게 경제개발에 사회적 자원을 집중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1995년 한 매체 인터뷰에서는 “만약 한 국가 중앙정부의 권위가 부족하고 약해지면, 이 나라는 파열과 혼란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고 말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중국이 고통과 희생이 따르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사회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권위를 가진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이런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는 헌법에 기반한 사법체계와 분권 등이 필요하다는 게 왕후닝의 생각이다. 그는 1986년 한 중국 신문에 게재한 ‘정치제도의 각도로 반성해본 문화대혁명’이라는 글에서 “문화대혁명 같은 동란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려면 온전한 정치·사법 분권 체제를 갖춰야 한다”고 썼다. 최고지도자 개인의 말 한마디와 4인방이 주도하는 문혁소조라는 초법적 기구가 당내 질서와 공민의 인권을 마음대로 유리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법 체계와 제도가 구비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전인대를 통과한 중국 헌법 개정안은 이런 왕후닝의 생각이 다수 반영돼 있다. 국가주석 임기제한 폐지는 ‘강력한 지도자’인 시진핑 주석이 임기가 끝나는 2023년 이후에도 추가로 집권할 여지를 열어뒀다. 헌법 본문 1조 2항에는 ‘중국 공산당 영도는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이다’란 문구를 넣어 공산당의 집권 근거를 헌법에 명시했다. 이전에는 ‘사회주의 제도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근본 제도이다’라고만 돼 있었다.
   
   국가주석 임기 제한이 폐지되면서 중국 국내외에서는 마오쩌둥식 종신제가 부활했다거나 역사를 거꾸로 돌렸다는 등의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중국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주석 임기제한 폐지가 곧바로 시 주석의 종신집권으로 이어질 것으로 단언하기는 어렵다는 시각도 많다. 지금의 중국은 마오쩌둥 시기의 중국과 다르고, 향후 중국 정치 상황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다. 정영록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중국공산당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연임 가능성, 강력한 경제개혁 필요성 등 여러 상황을 감안해 시 주석 임기제한 폐지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며 “시 주석이 임기가 끝나는 2023년에도 한 차례 더 연임해 총 15년 정도를 집권하도록 하자는 데 컨센서스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상하이 출신의 ‘중국판 키신저’
   
   왕후닝은 1955년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문화대혁명 와중인 1971년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상산하향(上山下鄕·도시 학생과 지식인들을 농촌에 보내는 운동) 정책에 의해 농촌으로 가야 했다. 하지만 몸이 약해 학도공 신분으로 집에서 머물렀고, 이 시기에 책 읽기에 몰두했다고 한다. 1974년에는 노동자와 농민, 병사 재교육 차원에서 도입한 공농병 특례 케이스로 상하이 화동사범대 서양언어학과에 입학해 3년간 프랑스어와 영어를 배웠다. 이 학과 출신은 외교부로 가는 경우가 많아 ‘대사 훈련반’이라고 불릴 정도였지만, 학문에 뜻을 둔 그는 상하이의 명문대학인 푸단대 국제정치학과 석사 과정에 진학했다. 그의 스승은 중국 내에서 마르크스 ‘자본론’ 연구의 권위자로 유명한 천치런 교수였다. 석사 과정을 끝낸 뒤에는 곧바로 푸단대 교수로 임용됐다.
   
   왕후닝을 눈여겨보고 책사의 길로 이끈 인물은 당시 상하이시 공산당 선전 부문을 맡고 있던 쩡칭훙이었다. ‘인사(人事)의 귀재’로 불리는 그는 1990년대 후반부터 장쩌민과 협력해 상하이방 시대를 열었고, 태자당의 일원으로 시진핑 주석의 집권에도 기여했던 인물이다. 그는 1990년대 초 푸단대 설 다과회 행사에 참석해 30대 초반의 왕후닝과 격렬한 토론을 벌이면서 그를 탐색했다고 한다. 장쩌민에 이어 상하이 서기로 부임한 우방궈 전 전인대 상무위원장도 그를 장쩌민에게 천거했다.
   
   1995년 장쩌민 총서기에 의해 공산당 중앙정책연구실 정치조장에 발탁된 왕후닝은 이후 중국 역대 최고권력자의 책사로 이름을 날렸다. 장쩌민의 3개 대표사상,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 시진핑의 ‘중국몽’ 등 주요 집권 이념이 모두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중국공산당이 노동자·농민뿐만 아니라 자본가와 지식인의 이해까지 대변해야 한다고 한 3개 대표사상은 개혁·개방에 속도가 붙은 장쩌민 집권기에 적합한 이론이었다. 고도성장에 따른 각종 문제가 불거진 후진타오 시대에는 조화롭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중시하는 과학적 발전관을 입안했다. 중국이 G2(주요 2개국)의 일원이 된 시진핑 시대에서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몽’을 제시했다.
   
   그는 외교·안보 문제에도 관여해 최고권력자의 자문 역을 담당했다. 장쩌민과 후진타오, 시진핑은 해외 방문 때 왕후닝을 동행토록 해 회담 때 자문을 구했다. 뉴욕타임스는 한 서방 외교관의 말을 인용, “왕후닝은 미국 외교의 거물인 헨리 키신저와 부시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칼 로보를 합쳐놓은 듯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47년 만에 나온 이론가 출신 상무위원
   
   시진핑 집권 2기의 문을 연 작년 10월 제19차 당대회의 최대 이변은 당내 이론가인 왕후닝의 상무위원 승진이었다. 공산당 최고지도부에 해당하는 상무위원회를 구성하는 상무위원은 중앙과 지방의 요직을 거쳐 발탁된다. 그중에서도 31개 지방 성시(省市·성과 직할시)의 당서기와 성장을 거치면서 통치 능력을 검증받는 것이 중요하다. 후진타오 주석 집권기의 원자바오 총리도 지방 당서기나 성장 경험 없이 상무위원에 발탁된 일이 있다. 지질광산부에서 일했던 그는 후야오방·자오쯔양 총서기 시절 중앙판공청(우리의 청와대 비서실)에서 일한 비서 출신으로 상무위원이 됐다. 하지만 왕후닝은 이런 정도의 공직 경험도 없는 이론가라는 측면에서 그의 발탁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론가 출신 상무위원은 마오쩌둥의 정치 비서 역할을 한 천보다(陣伯達·1904~1989) 이후 47년 만이다.
   
   제19차 당대회를 앞둔 작년 중국 내에서는 왕후닝이 은퇴할 것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허이팅 등 시진핑의 다른 책사들이 그의 위치를 물려받지 않겠느냐는 예상이었다. 그러나 왕후닝은 이런 예상을 뒤엎고 중국 최고지도부의 일원이 됐다. 시 주석이 자신의 장기집권 근거를 이론화하는 중요한 역할을 그에게 맡긴 것이 주된 요인으로 분석된다. 왕후닝이 상무위원으로 관할하는 분야는 당 이데올로기와 선전 분야이다. 전임인 류윈산이 맡았던 역할이다. 왕후닝은 7명의 상무위원 중에서 미국에 직접 살아본 유일한 인물이다. 아이오와대와 캘리포니아대 방문학자 등으로 6개월을 미국에 머무르면서 미국 정치와 사회에 대해 공부했다. 이런 그의 경력도 미국과 대국 외교를 꾸려가야 하는 시진핑 주석에게 필요한 부분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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