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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호] 2018.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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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美 대학 종신교수서 中 중앙은행장까지

이강 ‘깜짝 발탁’의 배경

최유식  조선일보 중국전문기자 

photo 뉴시스
지난 3월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국회 격)에서 이뤄진 인민은행 행장 인선에서는 이변이 속출했다. 행장으로 선출된 이강(易綱·60) 부행장은 당초 유력한 행장 후보군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 인디애나주립대 교수를 지내다가 돌아온 하이구이(海歸·해외유학파) 출신이다. 해외유학파 출신이 인민은행 행장에 임명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통상 행장이 겸임해온 인민은행 당 서기에 궈수칭(郭樹淸·61) 중국은행보험감독관리위 주석이 임명된 것도 의외였다. 이강 행장의 전임으로 15년을 재임했던 저우샤오촨(周小川)은 행장과 당서기를 겸했다.
   
   인민은행은 중국 통화정책과 외환정책을 총괄하는 중국의 중앙은행이다. 세계 2위 경제대국의 중앙은행장 인선을 앞두고 중국 국내외에서는 갖가지 관측이 나돌았다. 중국 내에서는 경제 담당 부총리가 된 류허(劉鶴·66)가 인민은행 행장을 겸임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1990년대 초반 주룽지(朱鎔基)처럼 경제 부총리와 인민은행장을 겸임하면서 시진핑 정권의 경제개혁을 강도 높게 밀어붙일 것으로 본 것이다. 인민은행 근무 경력이 있는 장차오량(蔣超良) 후베이성 서기와 궈수칭 주석도 인민은행장 후보군이었다.
   
   이강을 유력 후보로 보지 않은 건 지난해 10월 19차 당대회 당시 그가 공산당 중앙위원에 선출되지 못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 인민은행 행장은 장관급으로 당내에서는 중앙위원을 맡는데, 그는 후보위원으로 선출되는 데 그쳤다.
   
   당초 유력 후보가 아니었던 이강이 인민은행 행장에 발탁된 데는 중국 최고위층의 의중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그의 전문성을 높이 평가한 누군가가 막판에 그를 점찍었다는 것이다. 그 인물은 이강의 전문성을 높이 평가하고, 2014년에도 그를 공산당 중앙재경영도소조 부주임으로 발탁했던 류허 부총리일 가능성이 높다. 시진핑 집권2기 경제개혁 책임을 맡은 류허 부총리가 자신의 오른팔로 이강 행장을 선택한 것이다.
   
   
   개혁개방 직후 첫 유학 세대
   
   이강 행장은 1958년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집안 내력은 공개돼 있지 않은데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장을 지냈다고 한다. 이강이 고교를 졸업하던 시기는 광란의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대학 입시가 부활한 1977년이었다. 베이징 제162중학을 다녔던 그는 졸업 직후 베이징 근교로 하방(下放·지식 청년을 시골로 보내 농촌 생활을 시키는 것)돼 수개월 농촌 생활을 하다 그해 말 대학 입시에 응시해 베이징대 경제학과에 합격했다. 당초 이과를 택할 생각을 했다가 물리·화학을 복습할 시간이 없어 문과로 응시를 했다고 한다. 고교 시절에는 학교 간부를 맡았고, 문학지망생으로 지식 청년들의 하방 생활을 다룬 소설을 쓴 적도 있다.
   
   1978년 대학에 입학한 이강은 3학년 때인 1980년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돼 미국 유학을 떠났다. 개혁개방을 선언한 덩샤오핑이 인재를 키우기 위해 국외 유학을 대대적으로 장려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에 있는 햄라인대학에 편입해 대학을 졸업하고 경영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초기 유학 생활은 참담해서 수중에 단돈 2달러뿐일 때도 있었다고 한다. 주린 배를 채우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1주일에 3일 동안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1986년 일리노이주립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고 인디애나주립대 교수로 임용되면서 그의 미국 생활은 안정됐다. 1992년에는 34살의 젊은 나이에 이 대학 종신교수직을 따냈다. 당시 그는 1주일에 이틀 강의를 나가면서 연봉 6만달러를 받았다고 한다. 일리노이대 석사 출신인 중국인 부인 궈징핑(郭京平)과 결혼해 아들 이반(易般)을 뒀고 인디애나폴리스 시내에 자택도 구입했다. 주변 중국인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그를 부러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강의 마음은 덩샤오핑의 남순강화로 개혁개방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는 중국에 가 있었다. 1990년대 초반 그가 미국 학술지 등에 게재한 논문은 대부분 당시 중국 경제에 관한 것이었다. 개혁개방 초기의 통화팽창과 물가안정 등이 주된 주제였다. 당초 그는 박사 학위를 받자마자 귀국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베이징대 총장이 그에게 미국에서 교직 생활을 경험하고 올 것을 권해 귀국 시기를 미뤘다고 한다. 미국 생활 14년 만인 1994년 그는 부인과 아들을 미국에 남겨놓고 홀로 귀국했다.
   
   
   인민은행서 21년 근무한 최고 금융 전문가
   
   귀국한 그해 베이징대 경제학과 교수로 임용된 이강은 같은 해외유학파인 린이푸(林毅夫) 교수와 함께 베이징대 중국경제연구센터를 설립해 중국 정부의 금융 분야 싱크탱크로 활약했다. 계량경제학과 금융 이론을 전공한 그는 지금도 금융 분야에서 중국 내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그가 1999년에 쓴 화폐금융학은 지금도 이 분야의 가장 권위 있는 대학 교재로 인정받고 있다.
   
   이강이 인민은행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아시아 금융위기가 발생한 1997년이었다. 다이샹룽 당시 인민은행장은 이 위기가 중국 금융 개혁에 미칠 영향을 분석하고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이강을 통화정책위원회 부비서장으로 불러들였다. 그의 21년 인민은행 경력은 이때 시작됐다. 이후 통화정책위 비서장, 화폐정책국장 등을 거쳐 2007년 부행장으로 승진했고,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에는 국가외환관리국장을 맡았다.
   
   그의 부인 궈징핑도 2008년 중국 정부의 해외 인재 귀국 프로그램에 따라 귀국해 중국 국부펀드인 중국투자공사(CIC) 고위간부로 일했다고 한다. 궈징핑은 일리노이주립대 경제학 석사 출신으로 미국 대학 펀드의 펀드매니저로 일한 경력이 있다. 아들 이반은 올해 30세로 미국 카네기멜론대학을 졸업하고 MIT대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아마존 계열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이강은 1990년대 후반부터 류허와 교류를 해왔다. 1998년에는 류허가 창립한 민관 합동 경제 싱크탱크인 ‘중국 경제 50인 논단’에 참여했다. 하지만 류허가 그를 자기 사람으로 끌어들여 함께 일을 한 것은 2014년이다. 중국공산당 최고 경제 정책 결정 기구인 중앙재경영도소조 판공실 주임이었던 류허는 그해 이강을 부주임으로 발탁했다.
   
   
   시장 중시하는 개혁파
   
   미국에서 경제학을 배운 이강은 중국 경제를 시장 중심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개혁파이다. 귀국 초기부터 금리자유화를 지지했고, 외환관리국장으로서도 시장 상황에 맞춰 위안화 변동 폭을 점진적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중국이 2005년 관리변동환율제를 도입하고 2015년 위안화 환율의 하루 변동폭을 상하 2%로까지 확대할 때도 깊숙이 개입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에는 달러 중심인 외환보유고를 유로화, 엔화 등으로 확대하는 다원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2015년 위안화 환율 변동폭 확대 조치 당시 가진 기자회견에서 “고정환율제는 중국 국가 상황과 맞지 않고 지속될 수도 없다”며 “시장을 믿고, 시장을 존중하며 심지어 시장을 경외하고, 순응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개혁적 성향은 류허 부총리와도 일맥 상통한다.
   
   학자 출신인 그는 전형적인 중국 관료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부하 공무원에 좀처럼 화를 내지 않고, 잘못이 있어도 상대방이 자존심 상하지 않게 간접적으로 잘못을 지적하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유창한 영어를 구사해서 전임 저우샤오촨 행장이 국제회의 등에 나갈 때마다 동행했다. 2016년에는 워싱턴DC 브루킹스연구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벤 버냉키 전 미국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과 중국 금융개혁 문제를 놓고 논전을 벌이기도 했다.
   
   인민은행장으로서 이강 앞에 놓인 가장 큰 과제는 고도 경제성장 과정에서 누적된 국가부채를 줄여 금융리스크(위험)를 낮추는 것이다. 중국의 민간과 공공 부채는 연간 국내총생산(GDP)의 250% 수준으로 미국과 비슷하다. 공개되지 않은 숨은 부채가 적잖을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이런 부채가 금융위기를 부르지 않도록 국유은행과 상업은행의 투명성을 높여가는 금융개혁이 급선무이다. 미·중 무역전쟁의 주요 쟁점인 위안화 환율 시스템 개혁, 중국 자본시장 개방 등도 그가 짊어져야 할 난제로 꼽힌다.
   
   
   당 서기엔 중량급 당 관료 배치
   
   이강이 인민은행장으로 선출된 지 1주일쯤 뒤인 지난 3월 26일 중국공산당 중앙조직부는 인민은행 당서기에 궈수칭 은행보험감독관리위 주석을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당이 우위인 중국에서는 당 서기가 기관장보다 서열이 앞선다. 일상적인 업무 처리는 기관장이 총괄하지만 전략적 방향은 당 서기가 결정한다. 이론적으로는 궈수칭 주석이 인민은행 1인자이고 이강 행장은 2인자가 되는 셈이다. 당장 중국 당국이 오랫동안 미국 생활을 해온 이강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반대로 두 사람의 역할 분담을 통해 강도 높은 금융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인사 배치라는 분석도 있다. 이강은 금융 분야에서는 최고의 실력을 갖춘 전문가이지만 고위 관료로서 조직 장악력이 떨어지고 당내 기반도 약하다. 이런 그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산둥성장으로서 지방 통치까지 경험한 중량급의 궈수칭을 인민은행에 보냈다는 것이다. 궈수칭은 인민은행 당 서기와 은행보험감독관리위 주석을 겸해 금융개혁이 더 효율적으로 이뤄질 수도 있다.
   
   궈 주석은 30대 초반에 중국 경제체제 개혁을 담당하는 국가경제체제개혁위원회에 발탁됐던 엘리트 경제관료 출신이다. 1986년에는 1년 동안 영국 옥스퍼드대에 체류한 적이 있다. 뛰어난 업무능력으로 주룽지 전 총리의 총애를 받아 ‘주룽지 사단’으로 분류된다. 2001년 인민은행 부행장으로 승진하면서 금융 분야에서 발을 들여놓은 그는 국가외환관리국장, 증권감독관리위원회 주석 등을 거쳤다. 2013년부터 4년간 산둥성 성장으로 지방통치 경험도 쌓았다. 베이징 외교가의 한 분석가는 “이강의 전문성과 궈수칭의 정무 감각을 결합해 금융개혁을 강도 높게 추진하겠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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